[향토문화]명도암에 은거 수도(隱居修道)..봉개동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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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명도암에 은거 수도(隱居修道)..봉개동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6.29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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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오현단이 바로 그 유적지요 탐라상교(耽羅庠校)의 효시(嚆矢)라.

봉개동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


 

제주도 향토유산 明道菴先生遺墟碑
위치 ; 제주시 봉개동 산2번지(오름 전체가 산2번지임). 명도암마을 안세미오름 북쪽 기슭. 명도암 마을에서 남쪽으로 명도암휴게소 100m 못 미쳐 오른쪽의 농로를 따라 80m 정도를 가면 기슭에 샘이 있고, 샘 뒤쪽으로 50m쯤 돌아 들어간 곳.
유형 ; 유허비(遺墟碑)
건립시기 ; 1965년
관련인물 명도암(明道菴) 김진용(
金晉鎔))의 활동 시기 ; 조선 중기
크기 ; 높이 200㎝, 너비 71㎝, 두께 39㎝

 

 

조선 중기 김진용(金晉鎔)의 교육 진흥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본관이 광산(光山)이며 아버지는 김경봉(金景鳳)이다. 선조38년(1605) 구좌읍 한동리에서  태어나 처가인 봉개리의 명도암으로 옮겨 살았다.

김진용은 광해군10년(1618년)에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 귀양온 간옹 이익(李瀷, 1579〜1624)에게 수학하였다. 간옹 이익은 광해군7년(1615년)에 대북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서 죽게 한 것과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것에 반대하는 극언극간의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던 인물이다. 김진용은 고홍진 문영후 등과 더불어 이익이 배출한 걸출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이다.


김진용은 이익에게서 수학하여 인조13년(1635)에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인조21년(1643)에 경학전강에 급제하여 숙녕전(肅寧殿) 참봉(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제주에 머물렀다. 김진용이 제주에 은거하면서 훈학에 힘쓰는 한편 1659년에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괴(李禬)에게 건의하여 고득종(高得宗)의 옛 집터(현 오현단)에 제주 교육 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장수당(藏修堂)을 세워 육영에 평생을 바쳤다.


효종9년(1658)에 제주로 부임한 이괴 목사는 남달리 학문을 중시하여 김진용으로 하여금 인재를 육성하게 하였고, 김진용과 더불어 장수당이라는 학사를 창건하였다. 장수당은 후일 귤림서원의 효시가 되기 때문에 제주에서는 최초의 사학으로 자리매김된다.

장수당은 12칸으로, 35명의 학생이 수학하였으며, 김진용은 장수당에 은거하면서 삼읍(三邑: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학생들을 훈학하는 데 힘썼다. 그로 인해 제주의 유학이 왕성해지고, 풍속이나 교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후인들은 김진용이 살았던 곳의 이름을 빌어 명도암이라 칭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김진용은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 현종4년(1663)에 생을 마감했는데, 그로부터 약 170년이 지난 순조31년(1831)에 유림의 건의로 이예연 목사가 김진용의 업적을 기려 그의 위패를 영혜사(永惠祠)에 모셨다.

그러다가 헌종15년(1849)에 장인식(張寅植)목사 때 위패를 향현사(1843년 창건)로 옮겨, 고득종과 더불어 향사하고 향현으로 받들어 왔다. 고종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이 추향 제도가 없어졌다. 제주 유생들은 향현사유허비를 세우고 임시로 제향한 적이 있다.

그의 묘는 이 오름 기슭에 있었는데 20여 년 뒤에 그 자리가 나쁘다 하여 서귀포시 토평동 2724번지로 이장했다.

명도암(明道庵)이란 호는 그가 명도암 마을에 살았으므로 세인들이 명도암 선생이라 불렀으므로 자연스럽게 그의 호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9대손인 心齋 金錫翼의 耽羅紀年에도 金晉鎔 字晉叔 本州人也 其先光山 以明經潔行稱 仁祖乙亥 中生員 補參奉 不仕 後人 因所居里 稱明道菴先生(김진용은 字가 晉叔으로 제주사람이다. 본관은 광산이다. 경서에 밝고 행실이 깨끗한 것으로 칭송되었다.

인조 을해년(1653)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의 이름을 따라서 명도암 선생이라 일컬었다)이라고 밝혔다.

※명도암 선생이 살았던 마을이므로 명도암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김진용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5년 10월 명도암 선생 탄신 6회갑 기념으로 명도암 김진용 선생 유허비가 명도암오름 산기슭에 세워졌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는


김진용(金晉鎔)에 대하여


1605년(선조 38)∼1663년(현종 4). 조선 중기 유학자‧문신. 자는 진숙(晉叔), 호는 명도암(明道菴)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제주도 구좌읍(舊左邑) 한동리(漢東里)에서 출생하였다. 제주 입도조(入島祖) 김윤조(金胤祖)의 8세손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김귀천(金貴泉)의 현손이고, 부친 교생(校生) 김경봉(金景鳳)의 차남으로 태어나, 처가가 있는 제주읍(濟州邑) 봉개리(奉蓋里)로 옮겨 살았다.


1615년(광해군 7) 제주에 유배 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에게 수학하여 경서에 밝고 행실이 정결(淨潔)하였다. 1634년(인조 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상경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진학하고, 1643년 숙녕전참봉(肅寧殿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이후 다른 벼슬을 하지 않고 귀향하였다.

1658년(효종 9)에 이회(李檜)가 목사(牧使)로 부임하여 학문의 작흥(作興)과 조례규범(條例規範)을 오직 그에게 자의(諮議)하였다. 학교를 창건(創建)하고 장수당(藏修堂)이라 편액(扁額)하니 이로부터 학문이 진흥하여 문교(文敎)가 널리 행해져서 남방풍속(南邦風俗)이 일변(一變)하였다.(※이회(李檜)는 이괴(李襘)의 잘못)


아들은 예조정랑(禮曹正郞) 김계륭(金繼隆)‧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김계창(金繼敞)을 두었다. 1831년(순조 31) 유림들의 진정으로 영혜사(永惠祠: 일명 상현사(象賢祠))에 추향되었으나, 1849년(헌종 15) 고득종(高得宗)의 봉향처인 향현사(鄕賢祠: 1667년 현액된 귤림서원(橘林書院)의 별사. 일명 영곡사(靈谷祠))로 옮겨 배향하였다.


1965년 10월 탄신 6회갑 기념으로 이숭녕(李崇寧)의 명문으로 된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明道菴金晉鎔先生遺墟碑)’가 명도암오름에 건립되었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유허비의 앞쪽에는 “명도암선생유허비(明道菴先生遺墟碑)”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南溟의 靈峰인 漢拏山의 儲精(저정)이 뻗어 그 東北 기슭 六十餘里에 明道菴兀音(=명도암오름)을 이루었으니 水石이 幽邃하고 秀氣 감도는데 冽泉을 사이에 둔 이곳 安胎田은 바로 선생이 居處를 卜하여 養德尙志하신 遺墟이니라.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諱는 晉鎔이요, 字는 晉叔이며, 선생이 明道菴에 隱居脩道하시매 世人이 敬慕하여 明道菴 先生이라 일커렀다(일컬었다).


先生은 光山金氏로서 麗朝門下侍中 諱 台鉉을 中始祖로 都染領同正 諱 逸을 入海始祖로 모시니 이로써 탐라의 文物敎化 자못 刷新된 바 있더니 先生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儒家로서 일찍이(일찍이) 뜻을 聖賢의 學에 두고 硏學尙志로 能히 荒蕪를 旣除하니 南方의 敎化 蔚然히 이룩되어 드디어 萬人 崇仰의 儒宗이 되시니라.


先生은 李氏朝鮮 宣祖 乙巳에 降生하시니 天性이 高明하고 才質이 特出하여 幼時에 謫居中인 艮翁李瀷先生에게 受學하시다. 仁祖 乙亥에 司馬에 오르셔 泮宮에 出遊하시고 肅寧殿參奉에 敍함을 입자 辭하고 歸鄕하니 本志 仕宦에 있음이 아니러라.


爾來俊才를 모아 聖賢의 길을 講하며 育英에 힘써 오시더니 孝宗 戊戌에 晩悟李公襘 목사로 到任하자 于先 興學을 첫 事業으로 삼고자 先生께 條規方略을 諮訪하매 선생이 더부러(더불어) 經論하여 學舍創建에 이르니 이것이 藏修堂으로 오늘의 五賢壇이 바로 그 由緖地요 耽羅庠校의 嚆矢라.


이로 말미암아 敎學이 興隆하고 人才輩出이 이루 헤아릴 바 아니니 先生의 功은 靑史에 길이 傳할지어다. 癸卯에 逝去하시니 享年五十九라.


純祖 壬辰에 牧使李公禮延이 선생의 遺德을 欽仰하고 士林의 要望도 있어 永惠祠)에 從享하고 憲宗 癸卯에 知州 李公源祚가 따로 鄕賢祠를 세워 髙靈谷得宗과 幷享하여 왔으나 高宗의 辛未에 大同 撤享되더니 癸巳에 士林이 모여 鄕賢祠遺墟碑를 建立하였도다.


이제 또 先生의 後孫들이 모여서 遺墟碑를 세워 先祖의 遺德을 顯揚코자 하니 참으로 感激할지어다 噫라 先生은 일찌기(일찍이) 山林에 隱居하면서 硏學과 育英으로 生涯를 마치신 분으로 耽羅의 海荒을 깨치시고 鄕土에 獻身하여 그 敎化는 婦孺에게까지 미치게 되니 참으로 거룩하시도다.


길이 그 遺志를 繼承하여 先生의 偉業을 보람 있게 할지니라. 文學博士 延安 李崇寧 譔 安東 金忠顯 書 先生嶽降之六周 乙巳 十月 日 立”

2015년 3월 9일 향토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작성 2009-11-06, 보완 20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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