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절왓, 또는 불탄터라고 구전되던 곳..오등동 절터(梧登洞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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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절왓, 또는 불탄터라고 구전되던 곳..오등동 절터(梧登洞寺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6.30 0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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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중기 사이에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등동 절터 梧登洞寺址

 

위치 ; 제주시 아라동 255-5번지. 죽성마을(加多時) 골프연습장 동쪽에서 남쪽으로 난 길 가다가 왼쪽 직선 진입로 끝 일대
시대 ; 미상(고려 추정)
유형 ; 불교유적

오등동_절터기와편

 

오등동_설새밋당 진입로.

 


오등동사지는 예로부터 절왓, 또는 불탄터라고 구전되던 곳이다. 절에서 사용하던 샘물이라는 절새미(또는 설새미)와 과수원 일대에서 기와편은 물론 명문 기와도 출토되었다.

절터에는 배수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이 배수로는 일제시대 시설임) 절터에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중기 사이에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시 오등동 일대에 위치하며, '절새미', 혹은 '설새미'라 불리는 샘물 인근에 있다. 사진의 길 오른쪽 과수원이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집필자 오성)에 의하면 원래 이 지역은 행정 구역상 오등동에 속했으나 아라동으로 행정 구역이 편입되었다.

사찰 터는 아라동 죽성마을의 절새미라는 샘물 반대편에 있는 과수원 일대를 말한다.


사찰 터에서 청자가 출토되었으나 수량은 매우 적다. 대접, 매병의 기종이 확인되었다. 1점이 출토된 백자는 접시 저부편으로 확인되었으며, 안쪽 바닥에는 굽이 직경보다 큰 내저 원각이 있다. 문양은 없고 푸른빛이 백자유를 시유하였다.


표면에는 빙렬이 없다. 굽은 다소 높은 편이며 접지 면에는 모래를 받쳐 번조한 흔적이 남아 있다. 내저에는 태토 비짐을 받쳐 번조한 흔적이 있다. 1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사찰 터 일대는 옛 고대 사찰이 존재하였던 곳일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4·3사건 당시에는 제9연대 소속 군인들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이와 연계하여 이곳에 대한 정비가 시급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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