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아! 어찌 이들 네 선지자를 잊으리오. .회천동 이덕구가족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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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아! 어찌 이들 네 선지자를 잊으리오. .회천동 이덕구가족묘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8.0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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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드르 껴안은 신촌리 선지자 네 분..이호구 선생, 이좌구 선생, 이덕구 선생, 이순우 선생

회천동 이덕구가족묘지

 

위치 ; 제주시 회천동 673 번지. 동회천(새미마을)에서 동(와흘)쪽으로 마을을 막 벗어나면 커다란 마을표석이 있고 그 맞은 편(남쪽)으로 내창을 따라서 새로 난 길로 300여 m쯤 가면 길 오른쪽 밭 안에 있다.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비석(묘비)

회천동_이덕구조모깨진묘비

 

회천동_이덕구묘비

 

이곳은 2007년 10월 12일에 조성된 이덕구의 가족묘지이다. 이덕구는 조천읍 신촌리 출신으로 일본에서 立命館대학을 다녔으며 재학중 학병으로 입대 관동군 장교(소위)로 제대 귀향했다.

미군정 하의 해방조국은 사상적 대립으로 인한 갈등의 심한 가운데 조천면 민청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1946년 3월에 개원한 조천중학원(1948년 4월 폐교, 조천지서 건너편 일제시대의 경방단 사무실을 학교로 씀, 국어 현유복, 영어 김동환, 수학 물리 김민학, 역사 사회 체육 이덕구)에서 1947년 3월 총파업 이전까지 역사와 체육 교사로 재직하다가 3.1 사건에 관련, 조천중학원 파업 문제에 대한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왼쪽 고막이 터졌다고 하며 한 달 이상 경찰에 구금되어 있었다.

풀려난 뒤 다시 교단에 얼마 동안 섰다가 학생들에게 ‘마지막 수업이다. 육지로 간다’는 인사를 한 뒤 장기휴가원을 내고 교단을 떠났으며, 47년 8.15 검거 선풍 후 잠적하였다.


1948년 1월 22일~1월 26일 사이에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 221명이 검거되는데 여기에 이덕구도 끼어 있었다. 며칠 후 63명은 방면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덕구의 방면 여부는 불확실하다.

4.3항쟁이 일어나면서 입산한 것으로 보이는데 1948년 4월 15일 남로당 제주도당부대회에서 4.3봉기를 추인하고 인민유격대를 조직할 때 제1연대장을 맡은 것으로 보아 강경파 핵심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4.16.에는 인민유격대 총책 김달삼(본명 이승진)의 명의로 ‘5.10 망국단선 반대를 위한 무장 봉기 성명’을 발표하여 무장 투쟁을 공식화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참가한 김달삼이 제주로 돌아오지 않게 되자 2대 유격대장으로 군사부 총책임자가 된다.

뛰어난 지도력으로 항쟁을 지휘하지만 토벌대의 대규모화 등으로 항쟁이 악화된 무렵인 1949년 6월 7일 화북지서에서 출동한 토벌대에 포위되어 격전 끝에 자살(또는 사살, 불확실함)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덕구의 은신처를 알아서 길 안내를 한 사람은 용강동 출신 고○○씨이며 유격대에 있다가 내려와 자수한 사람이다. (고씨는 2002년 현재 생존)


이덕구는 민중들 사이에 신화적인 존재로 새겨져 있어 그에 대한 일화들이 많다.

예를 들면, 그가 얼마나 날쌘지 경찰이 그를 발견하여 총을 겨누다 보면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없어져 버리고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모래만 수북이 남아 있더라는 것이며, 평소에 다리에 모래 주머니를 차고 다니다가 위급한 상황이 되면 풀고 달아나니까 얼마나 빠르겠느냐는 것,

‘덕구 덕구 이덕구 박박 얽은 이덕구 장래 대장 심’하는 노래가 전해지는 것 등이다.

이덕구의 시신은 관덕정 앞 당시 경찰서 정문에 가슴 호주머니에 숟가락을 꽂은 채 십자가에 묶인 모양으로 며칠 동안 전시되었었다. 이런 모습을 찍은 사진이 일본 신문에 게재되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조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총살된 어머니를 비롯하여 이덕구의 가족, 친척들은 수십명이 화를 당했다. 1948년 10월 25일, 여순사건 직후 경찰이 마을에 와서 이덕구, 이좌구, 이호구의 집을 방화했다.

이호구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나 그의 아들 이순우 때문이었다. 비문에 의하면 이순우는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해방 전에 귀국하여 제주도청에 근무하던 중 부친이 설립한 사립신촌초등학교를 광주교육청에서 공립으로 인가받았으며 부친 사망 후 최연소 신촌리장에 추대받아 고향발전과 후진양성에 힘쓰셨다.

4․3 민중항쟁 발발 시 좌구 덕구 숙부님과 민중봉기 선두에 서셨으며 1949년 음8월 10일 민중항쟁 중에 체포되어 마포형무소로 이송중 사살되어 행불되었다. … ”고 한다.


이 무렵 경찰은 삐라를 만들어 이덕구의 항복을 촉구했다. 즉 "이덕구가 항복해 내려오면 가족들은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을 전부 죽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바로 뒷날 조천과 신촌에 무장대의 습격이 들었으므로 이덕구의 가족들은 살아날 방도가 없어져 버렸다.


일본에서 4·3진상규명운동에 앞장 섰던 강실 재일본 4·3유족회장은 이덕구의 외조카(누님 아들)이다. 그는 울음을 삼키며 증언한다.

"1948년 12월 26일 이덕구 가족·친인척 20여명이 몰살되었습니다. 결국 48년 12월 20일경 경찰은 우리 어머니를 포함해 이덕구의 가족과 친인척 20여명을 연행했습니다.

처음에 끌려간 곳은 조천지서이고 곧 읍내 제1구서로 옮겨졌다가 약 일주일만인 48년 12월 26일 별도봉에서 학살당했습니다.

특히 이덕구의 샛아버지 가족 3명도 희생되었는데 이 중 한명은 조천중학원생으로서 불구자인데도 불구하고 바닷가 고깃배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죽었습니다. 조천리에서는 외할머니의 친척들이 친지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우리 집에 경찰이 들이닥치기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직감을 했는지 매일 진수성찬으로 우릴 먹였고, 좋은 옷만을 입혔습니다. 경찰이 우리 집에 들이닥친 것은 새벽 2시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나(11)와 여동생(9)을 가리키며 '저것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셨습니다.

그러자 책임자는 '이것들은 씨나 전하게 내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쫓아가려 했으나 경찰이 우리를 집 안으로 밀어넣었죠. 경찰은 어머니가 업고 있는 2살난 누이동생도 떼어놓아도 좋다고 했으나, 어머니는 '저것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밥을 빌어먹을 수 있지만, 이 아이까지 살리려고 하면 결국 모두 죽게 된다.'며 그냥 업고 가셨습니다."


1949년 2월 4일에는 제주시 동부 8리 대토벌 시 봉개 인근 주민 40여 명이 토끼몰이식 수색을 피해 동회천 남쪽에 위치한 소낭굴에 숨었으나 토벌대에 걸려 학살되었다.

이덕구의 조모 묘지가 이 지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묘지에 있는 비석은 당시 토벌대에 의해 두 동강난 채 최근까지도 그대로 서 있었다. 비석에는 총질을 한 흔적도 일부 남아 있다.

훼손된 비석은 하단부만 남아 있으나 '강씨의 묘(姜氏之墓)'란 비명과 비문 중 이덕구 항렬의 이름들을 볼 수 있다.(한라일보 2008년 5월 27일)


이덕구의 외조카 강실의 증언에 따르면 이덕구의 시신은 남수각 상류 지점에서 화장했으며 유골은 비로 불어난 냇물에 쓸려가 버려 수습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제주작가회의 카페 이종형 글 http://cafe.daum.net/jejuwriters/)


가족묘지는 전주이씨 계성군파 李樞溓(이덕구의 고조)으로부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 형제, 사촌형제, 조카, 아들의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세운 이는 李樞溓의 6세손, 6세손녀, 7세손녀와 사위이다.

옛 비석들은 뒤편에 세워 두었다. 할머니(姜氏)의 묘비는 토벌대에 의해 두 동강난 아래 부분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묘비들이 세워진 앞에는 이승익 시인이 쓴 시비가 있다.


"진드르 껴안은 신촌리엔 선지자 네 분 계셨다.

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피어 한라산 골짜기마다 산새 지저귀고 물오른 나무 이파리 푸르름 가득하여 평화와 희망을 목청껏 노래하던 그해 무자년 사월 초승, 제주 온 섬 아수라장 누가 우리 부모 형제를 범하는가.

누가 우리 친구 이웃을 범하는가. 이건 아니야! 친구여, 형제여, 이웃이여, 당하고만 있을 쏜가. 분연히 일어나 불쌍한 백성 함께 하자. 59년 전, 산에서 들에서 골짜기에서 제주백성에게 외치던 그들의 함성 들립니다.

온 몸을 불사른 신촌마을 네 분 선지자. 이호구 선생, 이좌구 선생, 이덕구 선생, 이순우 선생, 이제는 구천에서 고이 내려오소서. 맺힌 원혼을 푸소서. 살아 있는 우리가 앞에 나서 저 산새들 울음 멈추게 하리오.

아! 어찌 이들 네 선지자를 잊으리오. 이 민족을 사랑했고 온 백성을 다독이던 그 정신 그 애국심 후세에 남기려 작은 정성 모아 여기 작은 돌에 이름 석자 새겨 영원히 기리리라."


"공은 일본 오사카 일신상업학교, 입명관대학을 졸업, 군 임관 제대 후 해방전 귀향하여 청소년 및 민중지도에 힘쓰셨다.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 교편 생활중 4·3민중항쟁이 발발하자 3·1지대 지휘관으로 민중봉기의 선두에 섰으며 이후 총지휘관으로 추대되었고 1949년 6월 9일 16시, 623고지에서 서거하셨다. 배 제주양씨 후상은 … 1948년 12월 26일 4·3사건으로 희생되었다."(사망 날짜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6월 7일과 이틀 차이난다.)


이덕구와 그의 부인 양후상의 비석의 비문이다. 앞 열에는 아들 이진우의 비도 있다.

“ … 서기1942년 2월 27일에 출생…. 제주에 불어닥친 4․3의 광풍에 희생되었으니 애석하도다. 서기1948년 12월 26일 운명하셨다. 고인의 넋을 위로하며 명복을 비옵니다.”

살려달라는 7살 아이의 울음에 토벌대는 말했다.

"아버지가 있는 산으로 뛰어라" 그러자 아이는 산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토벌대는 그 등 뒤에 총을 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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