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俗離)의 자유로움, ‘곱다. 사치라 할 만큼 화사하구나.’ .. '물레나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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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俗離)의 자유로움, ‘곱다. 사치라 할 만큼 화사하구나.’ .. '물레나물꽃'"
  • 박대문(우리꽃 자생지 탐사 사진가)
  • 승인 2020.08.11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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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하루일망정 화사하게, 물레나물처럼

하루일망정 화사하게, 물레나물처럼

 

물레나물 (물레나물과) Hypericum ascyron

 

틈만 나면 가능한 한 산을 찾아 나서고만 싶은 요즘의 심정입니다. 원래는 야생화를 찾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만 올봄에는 팬데믹(pandemic)에 따른 사회적 격리라는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되다 보니 어쩔 수 없게 찾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쫓기듯 산을 찾게 되는 주된 원인은 바로 뉴스 공해로부터의 도피 및 탈출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론 매체가 쏟아내는 뉴스라는 것을 보고 들으면 정신이 혼미하고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새 소식의 대부분이 기껏해야 편 가르기, 내로남불, 치받아 되씌우기, 상대 비방, 철면피한 유체이탈 화법과 남의 탓 타령, 임의적 자기 잣대에 의한 공정과 정의의 개념 왜곡 등 뉴스 공해입니다.

어쩌다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런 세상을 살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문과 방송, SNS를 가급적 멀리하려고 해 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철 안, 버스 안, 찻집, 공중 장소의 대형 TV 광고판 등 쓰나미처럼 범람하는 뉴스 공해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피하는 방안으로는 산을 찾기가 가장 쉽고 무난한 듯싶습니다.

홀로 걷는 산길의 즐거움, 굳이 야생화를 찾는 산행이 아니어도 집을 나서서 산속 오솔길을 걷는 시간은 행복합니다. 번거로움과 심란함의 해소와 속리(俗離)의 자유로움을 만끽합니다. 물론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휴일이 아니고서는 그림의 떡과 같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무정한 세월이 흘러 일을 할 나이도 아니고 딱히 할 일도 없는 무료한 상황에서는 나름 행복한 선택이 아닌가 싶습니다. 간혹 호젓한 오솔길에서 볼륨을 한껏 높인 휴대용 라디오나 녹음기를 자랑스럽게 켜고 산행을 하는 짓궂은 양반(?)들 땜에 기분이 상하는 일도 있지만 그래도 뉴스 공해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예년과 달리 지루하게 긴 장맛비가 연일 기승을 부립니다. 날씨 예보는 많은 양의 비가 온다고 하는데 웬일로 날씨가 갠 듯하여 시내에서 가까운 둘레길 산행을 나섰습니다.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는 장마 중이라서인지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임에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발걸음이 타박타박 둔해집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쉬면서 앞 비탈을 내려다보니 뭔가가 눈에 환하게 들어옵니다. 양지바른 비탈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큼직한 꽃 한 송이가 보입니다. 그 순간은 산길을 오르는 고단함도 등에 흐르는 땀줄기도 잊게 했습니다.

‘곱다. 사치라 할 만큼 화사하구나.’ 감탄의 말이 절로 나옵니다. 바로 짙푸른 풀숲에 드러난 물레나물꽃입니다. 뉴스 공해를 피할 겸 찾아온 산행에서 기대하지도 않은 횡재를 한 듯한 기분입니다. 세상이 온통 즐거움으로 가득한 듯한 모습으로 반기는 화사한 미소를 봅니다.

▲ 물레나물 Hypericum ascyron ▲ 망종화 hypericum patulum

 

     
타래난초는 우거진 숲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묘지나 밭둑 등 개활지의 잔디밭에서 자라는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입니다.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한여름에 짙은 분홍의 덮개 꽃에 하얀 입술 꽃을 피우는데, 줄기를 중심으로 한 나선(螺線) 모양으로 빙 둘러 가며 꽃이 달립니다. 간혹 흰색의 꽃도 있습니다.

꽃대는 곧게 선 외줄기입니다. 길지 않은 짧은 꽃대에 밥풀만 한 꽃이 수십 개 달립니다. 작은 꽃들이 가녀린 꽃대를 중심으로 꼬여 올라가며 피는 모습이 실타래를 닮았다고 하여 타래난초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명의 Spiranthes가 뜻하는 것도 희랍어의 speira(나선상으로 꼬인)와 anthos(꽃)의 합성어로 나선형으로 꽃대를 감아 올라가며 피는 꽃 모양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합니다.

타래난초는 잔디가 없이는 살 수 없는 풀꽃입니다. 잔디 뿌리에 붙어사는 박테리아균(菌)과 공생하기 때문입니다. 녹색식물인 난초류는 공생하는 균류(菌類)의 협력 없이는 종자가 발아하지 않고 발육도 못 하는 것이 많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박테리아균의 협력이 없으면  발아가 불가능합니다. 난초류인 타래난초 역시 그 씨앗이 너무도 작아서 발아에 필요한 영양분을 씨앗에 저장하지 못합니다. 난초의 씨앗에는 발아에 필요한 영양분을 저장하는 배젖(endosperm)이 없습니다.

그 결과 홀로 발아하여 싹을 틔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타래난초는 자신의 몸에 난균(蘭菌)이 기생하도록 하여 자기 몸속에 들어온 균사(菌絲)로부터 영양분을 흡수해서 발아하고 나아가 난균까지 완벽하게 분해, 흡수하여 자라는데 필요한 영양분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되면 타래난초가 균의 침입을 받게 돼 오히려 균의 희생물이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에서나 전해 들었던 고육지계(苦肉之計)의 생존술을 쓰는 셈입니다. 이토록 처절한 생의 몸부림과 고도의 생존전략으로 그 생을 이어가는 식물의 면면을 알고 나면 하찮게만 여겼던 이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지혜에 숙연함과 감탄이 함께 일기도 합니다.

가냘파 보이기만 한 조그만 타래난초 꽃대, 이 꽃대에 왜 수많은 꽃이 비비 꼬이고 뒤틀린 듯 감고 돌아가며 매달려 있을까? 이것은 외줄기 꽃대의 표면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꽃의 배열이며 어느 방향에서든 곤충의 눈에 잘 띄기 위한 전략이라 합니다. 나아가 씨앗이 여문 후 사방팔방으로 씨앗을 날려 보내기 위한 비책이기도 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름이 끼치도록 외로움과 고적감이 감도는 묘지의 산만한 잔디밭 사이에서 가녀린 외줄기 꽃대를 올려 꽈배기처럼 꼬고 뒤틀린 구조를 이루며 꽃을 매달고 있는 타래난초를 보며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 우리의 보편적 사고와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정상과 관례를 일탈한 이상한 모습, 꼬이고 뒤틀리고 되감는 현상은 볼썽사납고 역겨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연 세계에서인지라 모진 생을 이어가는 타래난초의 기이한 모습과 행태가 오히려 곱고 신기하게만 보입니다.

인간사회에서는 한평생 세상살이를 통해 으레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면서도 꼬이고 뒤틀린 현실 사회의 제반 상황을 참고 보기가 역겨운데 식물의 세계를 보면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아니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르기에 서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비정상적이며 예외적 현상임에도 자연세계는 거부감 없이 도리어 신기함과 감탄으로 곱게 받아들여질까? 그것이 참으로 궁금할 따름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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