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장맛비에 무너져 내린 30억원.. '김만일 기념관', 무용지물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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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장맛비에 무너져 내린 30억원.. '김만일 기념관', 무용지물 되나(?)..
  • 고현준
  • 승인 2020.08.2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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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포커스)'김만일 명칭' 쓰지 못하게 하면서 위기에 처한 '헌마공신 김만일기념관' 가 보니..

 

 

 

국비 10억원과 지방비 20억원 등 30억원을 투입해 자연친화적으로 만들었다는 서귀포시 남원면 한남리 헌마공신 김만일 기념관이 지난 7월 장맛비에 흙과 잔디로 만들어진 외벽이 무너지면서 부실공사 의혹과 김만일 명칭사용 불가 등 파문이 커지고 있다.

지난 19일 헌마공신 김만일기념관을 찾아본 결과 아직도 당시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는지 피해상황이 그대로 남아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얼마나 많은 토사가 흘러내렸는지 아직도 담밖에는 흙더미가 그대로 쌓여 있었고 건물 뒷쪽 외벽에는 당시 당한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듯 보수도 못한 채 토사가 흘러내린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건물을 한바퀴 돌아 보니..

중간중간 담벽도 일부 무너져 내렸고 건물 옥상에 심어진 잔디는 말라죽어가고 있는 모습도 포착됐다.

곰팡이가 생겼다는 실내는 문이 잠겨 들어가보지 못했지만 안에는 말 모형이 하나 만들어진 모습이 창밖으로 확인됐을 뿐이었다.

가칭 ‘헌마공신 김만일기념관’은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992번지 일대에 부지면적 4,405㎡, 건축면적 1층 886.5㎡(전시실, 영상실, 체험실, 수장고)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당초 5월 개관예정이었지만 개관을 10월로 미룬 상태다.

문제는 김만일 기념관이 이처럼 비에 무너질 정도로 빈약한 사실에 대해 (사)헌마공신 김만일기념사업회(이사장 김부일)가 “김만일 명칭사용 금지와 함께 어떤 유물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어 앞으로 이 기념관이 제대로 운영될 것인지도 의문이라는 사실이다.

더욱이 김만일기념사업회 측에 따르면 “기념관 예산 30억원은 건물에 대해서만 지원된 것으로 1회성”이라며 “기념관 관리 등 지속적인 지원계획이 없어 기념사업회가 추진한 일도 아닌 만큼 우리가 직접 기념관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 기념관 부실공사 논란은 일파만파 커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김만일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다음은 의귀리 설촌유래에 소개된 한마공신 김만일에 대한 내용이다.

 

감목관 경주김씨

 

이홍의 아들이자 경주김씨 입도조인 김검용의 7세손인 김만일(1550-1632)은 의귀리만이 아니라 제주의 경주김씨 가문을 증흥시켜 후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으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찍 무과에 오른 김만일은 선조 15년(1582) 순천부에 있는 방답진 검제절사가 되어 벼슬을 지내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목축 사업에 뜻을 두어 선대로부터 내려온 마축개량번식에 전념하는 등 생업에 힘썼다.

그 무렵 필마(匹馬)의 용역은 전마(戰馬)·체신(遞信) 뿐만 아니라 승마(乘馬) 등으로 국가적인 비중이 컸으므로 그는 특히 육마(育馬)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김만일의 이러한 노력은 날로 그 열매를 맺어 입도 후 침체 속에 빠져 있던 집안을 크게 일으키며 더욱 육마 사업이 번창하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란으로 말미암아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 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각지에서 굶어죽는 백성이 속출하는 등 국난의 여파는 엄청났다. 수축(獸畜)은 굶주린 백성에 포살(捕殺)되어 필마 등 운송수단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됐다. 이러한 참상을 딛고 조정에서는 전후복구와 민생구휼을 위해 마정(馬政)의 진흥을 도모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과 마육에 성공한 김만일의 명성은 당시 사간원에서 올린 "전마충당이 막급한 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주에 가계만금의 당신 김만일이 있어 사마가 반식부지하여 기수 불지계산하므로 마필을 진상토록 하사이다."라는 계장에 잘 드러나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마필 진상을 요청하게 됐고, 김만일이 조정의 요청을 받아들여 양마 5백필을 헌상한 것은 선조 33년(1600) 경자년의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높이 사 초공으로 우대하여 그해에 선조가 직접 소견(召見)한 자리에서 가선대부 오위군총부총관에 금위중질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다.

얼마 후 김만일은 자헌대부동지추부사에 제수되고 광해군 13년(1621)에는 다시 자헌대부에 중작 되었으며 또 인조 6년(1629)에는 종일품 숭정대부를 제수하게 되어 제주출신으로 최대의 영예를 누리고 그 명성이 경향에 떨쳤다. 그가 83세로 천수를 마친 것은 인조 10년(1632) 10월이었다.

별세하기 전 김만일은 가문이 귀한 것을 뼈아프게 여겨 조정에 입도선조(김검용)의 유덕을 밝혀주도록 요청하여 훈련원군감을 추증하게 되었다. 별세후 그는 남원읍 의귀리 1773번지 '서위남 루'에 묻혔는데 조정에서는 의귀리 종묘에 봉사케 하였다.

그런데 김만일의 갑작스런 높은 관작 제수는 선조에서 광해군을 거쳐 인조조에 이르는 동안 경향의 토로들과 관리배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어 시한부에서는 "김만일은 육마천승 가루만금의 해중구민에 불과한데 병부상등 위임막중한 총관직을 제수함은 부당하니 환수성명하고 김백미포로 상하심이 가하이다"하고 계하였으나 임금은 이를 무시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의 큰 아들 김대명은 수령을 제수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을 세워 보성군수(현지에 선정비가 있다 함)가 됐으며 둘째아들 김대성은 승당상이 되었다.

한편 효종 10년(1659)에 이르러 김만일의 큰 손자인 여와 아들 대길이 다시 양마 2백필을 나라에 바쳐 그 유덕을 이었다. 이때 목사 이증은 그 공로를 가리기 위하여 종문세습직으로 감목관직을 특설하여 주도록 조정에 품신하고 왕의 윤호를 얻어 상장감목관을 두게 되니 이것이 감목관의 시초가 되었고, 초대감목관에는 김대길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 관직은 경주김씨 종문에서 계승되어 오다가 숙종 28년(1703), 입도 11세손인 김진혁(金振赫)이 감목관 때에 그 직이 혁파되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숙종 43년(1717)에 이르러 13세손 김세태(金世兌)가 그 아우 세화(世華)를 서울로 보내어 수차 탄원하고 상소한 끝에 경종 원년(1721)에 다시 복구되어 감목관직은 20년 만에 환직되었다.

그후 고종 29년(1892)에 감목관으로 피선된 17세손 김경치(金暻治)가 재직시인 고종 32년(1895) 봄 종문(宗門)의 청원에 의하여 그 직제가 폐지되었다. 임기 5년인 감목관은 제주목사와 경주김씨 도종손(都宗孫) 및 시직관(視職官) 3인의 공동 천거로 후계자를 선임한 후 조정에 품신하여 왕의 윤허를 얻게 되어 있었는데, 녹곡(綠穀)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직급은 종삼품(從三品)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같이 국난과 백성의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대대로 충효와 절의에 힘쓰니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그 공을 높이 여기어 1752년 영조임금으로 옷 1습(특사 표량 일습)을 하사받았다. 이에 사의(賜衣)를 받은 마을이라 하여 '옷귀'라 부르니 '의귀리(衣貴里)라는 마을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의귀리는 예로부터 경주김씨의 세도가 대단했던 듯하다.

마 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경주김씨에서 행해지는 굿의 형식도 다른 가문과는 차이가 나는데, 이를테면 무당의 사설에 경주김씨 집안의 내력이 전부 설명되고, 다른 집안에서는 '큰대'를 한 개만 꽂는데 비해 경주김씨는 3죽을 세웠다고 한다.

의귀리가 이 지역의 중심지이며 마을의 세력이 컸음은 지금도 남원 2리를 '서옷귀(西衣貴)'라고 부르는 데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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