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발 빨리 죽여 달라' 애원.. 조천리 도피자가족집단수용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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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발 빨리 죽여 달라' 애원.. 조천리 도피자가족집단수용소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8.26 0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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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리는 조천중학원 중심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해방직후 지역 정국 주도 많은 피해 발생

조천리 도피자가족집단수용소터

 

위치 ; 조천읍 조천리 2685-1번지. 비석거리 맞은 편.
유형 ; 건물
시대 ; 대한민국(1948~1949)

 

조천리_정미소터

 


항일만세운동이 조천리에서 시작된 배경에는 이 마을에 항일운동을 주도하는 인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들이 해방 이후에는 좌익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제주인민위원회 위원장과 남로당제주도당 위원장을 역임했던 안세훈도 조천리 출신이었다. 그리고 4·3의 도화선이 되었던 조천중학원생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도 조천지서에서 발생했다.


또한 조천리는 조천중학원을 중심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해방직후 지역의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에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이 마을에 조천지서와 면사무소가 있어서 무장대의 공격이 잦았고, 우익인사들이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피해를 당한 우익인사들이 어김없이 보복공격을 감행했는데, 보복 대상은 주로 조천리에서 가족이 없어진 도피자 가족이나 중산간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4․3 당시 정미소였던 40~50평 규모의 건물이 민간인집단수용소로 쓰였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은 헐어내고 새로 지은 건물이 있다. 1948년 11월 하순 이후 조천면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면서 주민들은 해안마을인 조천과 함덕으로 피난했다.

하지만 중산간 마을의 청년들은 이전 토벌대의 횡포를 겪었기 때문에, 해안으로 내려와도 살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대부분 야산의 동굴등지로 피신했다.

그러한 은신 등으로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빠진 주민들은 도피자가족이란 혐의로 함덕, 조천의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조천리 집단수용소에는 조천리에 속하면서도 중산간으로 분류되는 양천동, 신앙동, 봉소동 등은 물론 이웃마을인 대흘리와 와흘리 등지의 도피자 가족들과 이웃 해변마을인 신촌리, 신흥리의 도피자 가족들도 수용되었다. 그 숫자는 200~300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곳에선 조천리민이 경찰에 돈을 주어 수용자를 빼내려다 발각되어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수용되었던 중산간 주민 중 젊은이들은 수시로 선별되어 총살당했고, 어린이, 노약자를 포함한 도피자가족 30명이 1949년 1월 13일에, 또 60명이 1949년 2월 1일에 조천지서 앞밭에서 집단 총살을 당했다. 두 번에 걸쳐 어린이와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도피자 가족 90여명을 몰살당한 것이다.


다음은 조천리 출신 김이선(1931년생)씨의 증언이다.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아들 하나 숨겼다고 온 가족이 잡혀 가던 때였으니까요. 아들 형제를 다 감췄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양심적으로 자진해서 수용소로 들어갔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은 눈이 팡팡 오는 날 밤이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수용소에서 잠깐 나와서 우리를 만나고 갔죠. 그 때 하신 말씀이 ‘어느 날 오라고 해서 죽어질지 모르니까, 옷도 헌 옷 입지 말고 고운 옷, 깨끗한 옷 입고 다니다가 오라고 하믄 가거라’하셨어요."


혹여 자식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자발적으로 집단수용소 생활을 감내한 그녀의 아버지는 그해 1월 5일 조천지서 앞 밭에서 총살을 당했다. 아들을 숨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시 수용소로 돌아간 어머니도 얼마 되지 않아 총살을 당했다. 아버지가 죽은 장소와 똑같은 조천지서 앞이었다.


다음은 당시 조천면 서기로 일했던 김진주(1923년생)씨의 증언이다.


"도피자 가족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총살하려 하니 무서워서 아무도 집 밖을 나올 수 없었지. 내가 면 서기 일을 하면서 들은 말인데, 죽일 때도 그냥 총으로 쏴 죽인 게 아냐. 도피자 가족들을 한명씩 세워놓고 여성 민보단원에게 죽창을 주면서 찔러 죽이라고 했지. 아무리 민보단원이라고 해도 살아 있는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몇 차례 찔러도 죽지 않으니 죽는 사람들이 '제발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는 거지. 그러다가 보다 못한 경찰이 마지막으로 총으로 죽이는 식이야."
《작성 100606, 보완 1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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