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추억으로 남은 우미밭..화북1동 삼양3동 버렁성창(버렁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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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추억으로 남은 우미밭..화북1동 삼양3동 버렁성창(버렁포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8.3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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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북1동 1반과 삼양3동 4반을 합친 지역을 버렁이라 한다.

화북1동 삼양3동 버렁성창(버렁포구)

 

위치 ; 제주시 화북1동 1469번지의 북쪽, 삼양3동 2647번지의 서쪽 바닷가.
유형 ; 어로유적
시대 ; 조선~

 

 


버렁마을은 화북1동의 동쪽 끝부분과 삼양3동의 서쪽 끝부분의 경계에 형성된 마을이다. 지금의 화북1동 1반과 삼양3동 4반을 합친 지역을 버렁이라 한다.

버렁포구는 행정구역상 화북동에 속하나 어로집단은 삼양3동에 속한다. 버렁마을 앞에 펼쳐진 바다 역시 화북1동과 삼양3동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이 바당은 예로부터 우미밭으로 통했다. 우미는 우뭇가사리다. 우미는 제주 바다에 골고루 퍼져 있는 해조류지만 특정 지역에만 밭이 형성될 정도로 우미가 많이 생산되는 바다는 흔치 않다.

우미 채취 시기는 대개 5월부터 펼쳐진다. 우미 채취를 시작하는 때를 우미조문이라고 한다.


한 때 버렁 바당에서는 화북과 삼양 잠녀들 간의 어장 다툼이 자주 있었다. 어장 분규의 주된 원인은 실정법상 어장도면과는 다르게 마을마다 그어진 경계선을 관행선이라 주장하는 데에 있다.

테우나 작은 배를 이용해 조업을 하던 전통시대에 조난사고에 따른 시체 인양을 놓고 경계수면 어장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었고 시체를 인양한 마을에서 경계선 수면을 점유하여 입어를 해온 관행을 들어 실정법상의 경계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어장 다툼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지리적 원인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버렁포구는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의 할아버지 시대에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일일이 등짐으로 돌을 져 날라 쌓은 성창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 버렁포구에는 어선이 한 척도 없다.

조간대의 상층에 위치하여 물이 조금만 빠져도 배 밑바닥이 암반 위에 얹혀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걸석’ 현상이 잦기 때문에 포구로서는 알맞지 않다.

그래서 최근에 버렁 사람이 부리는 배 한 척도 버렁포구에 배를 매지 않고 삼양3동 ‘검은여개’에 매고 있어서 버렁포구는 늘 비어 있다.


필자의 외할머니께서 버렁성창에 바로 붙은 집에서 사셨으므로 어렸을 때(1960년대) 외할머니댁에 갔다가 외가동네 형들과 함께 성창에 가서 막 들어온 어선에서 자리를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1970년대까지만 해도 7척 정도의 어선이 터잡고 있었으나 연안 어족이 고갈된 데다 포구시설도 빈약하여 버렁포구는 추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이 일대 용천수로는 ‘괸물’, ‘빌레물’, ‘서펜물’이 있다. 이 중 빌레물과 서펜물은 포구 안쪽에 있어서 배의 선식충을 막아주기도 했으며, 가까이에 있는 ‘너븐여’ 줄기 한켠에 갯담인 ‘버렁원’도 있었으나 지금은 보수를 하지 않아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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