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말 사육, 국가차원 주요사업..이도1동 마조단(馬祖壇)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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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말 사육, 국가차원 주요사업..이도1동 마조단(馬祖壇)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9.1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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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신과 교감하는 천마이며, 신에게 바쳐지는 성물인 헌마로서 존중되었다

이도1동 마조단(馬祖壇)터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708-14번지. 제주칼호텔 자리
유형 ; 생산기술유적(목축)
시대 ; 조선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말은 교통수단과 군사용으로 사용된 중요한 가축이었다. 한국이나 몽골의 문화에 등장하는 말은 신승물, 신성성, 의리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는 존재, 재앙을 예시하는 존재, 민중의 이상과 꿈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존재, 정력과 지혜로움, 도약 등의 상징성을 지닌 동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말은 신과 교감하는 천마이며, 신에게 바쳐지는 성물인 헌마로서 존중되었고, 그리고 신성한 존재인 마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제왕 출현의 징표로서 신성시했으며 초자연적인 세계와 교통하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왔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 왕은 말이 전해 준 알에서 태어났으며, 고구려 시조 주몽이 타고 땅 속을 통하여 조천석(朝天石)으로 나아가 승천했다는 기린도 말을 신성시한 징표이다.

말과 관련한 풍습으로는 또한 말은 기가 왕성하므로 말날(午日)은 먼 길 나서기에 좋은 날로 믿고 있다. 정월의 첫 말의 날인 상오일(上午日)에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전해진다. 첫 말날에 장을 담그면 장맛이 좋다고 하는 것은 말이 콩을 좋아하므로 콩을 원료로 하는 장을 담그는 것이고, 말날에 담은 장은 말피처럼 빛깔이 진하고 맛이 있다는 것이다.

마조단은 말의 수호신인 방성(房星)에 제사 지냈던 곳이다. 방성은 천자를 보위하고 천마를 관장한다. 이 별은 일명 마조․천사성(天駟星)라고도 하며 말의 조상으로서 말에 대한 모든 일을 좌우하는 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말의 역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 별에 제사를 올리는 일이 고려시대에 시작되었다. 이 제사를 마조제라고 하였으며 제를 지내는 곳을 마조단이라 한다.

마조단의 기원이 어느 때인지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고려시대에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답습으로 볼 수 있다. 『春官通考(춘관통고)』,『文獻備考(문헌비고)』에서도 옛터가 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어느 왕 때 처음 마조단을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마조단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세종실록 오례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단유(壇壝) ; 사직단(社稷壇)은….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은…. 영성단(靈星壇)은…. 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마보단(馬步壇)은 너비[廣]가 2장1척이요, 높이는 2척5촌인데, 한 개의 유가 있다. 무릇 예감(瘞坎=제사지낸 뒤폐백과 축판을 묻는 구덩이)은 모두 묘(廟)와 단(壇)의 북방 임지(壬地)에 있는데, 남쪽으로 섬돌을 내게 하고, 방과 깊이는 매장될 물건을 용납할 만하게 한다.

그 제도는 벽돌[磚石]을 사용하여 섬돌을 만들고 하나의 조그마한 천정(天井)을 만들어, 깊이와 넓이는 3,4척 정도로 하고, 그 남쪽은 밟고 다니는 길[踏道]을 만들어 오르내리게 하고, 일이 없을 때[閑時]는 흙으로 메워두었다가, 제사 지낼 때에 와서 흙을 취하여 버리고 소제하여 깨끗하게 하며, 제사를 마치면 사람을 시켜 폐백과 축판(祝版)의 등속을 가지고 와서 밟고 다니는 길을 따라 내려가서 구덩이 속에 들여보내고 난 연후에, 흙을 내려 쌓아 메우기를 예식(禮式)대로 하게 하고, 사람을 시켜 지키고 감시한다. 여러 제사지내는 신의 단·묘·원(園) 밖의 30보 안에서는 나무하고 농사짓는 일과 행인(行人)의 내왕을 금단(禁斷)한다.〉

英祖25년(1749)에 소의 돌림병 때문에 살곶이 목장 안에 단을 쌓고 先牧을 제사하였는데 位版은 奉常寺에서 새로 만들었으며, 또 각 고을에 명하여 고을 중앙에 단을 만들어 先牧의 神位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여 재앙과 돌림병을 물리치게 한 기록이 있으며, 그 뒤 正祖20년(1796) 정월에 마조제는 이 해부터 仲春(중춘)의 中氣(중기)후 剛日 중 길일을 택하여 지내게 하였다. 강일은 강일 ; 甲, 丙, 戊, 庚, 壬이 들어가는 날이다.

기록상으로는 헌종 때에도 단을 설치하고 마조제(馬祖祭)를 실시했다고 한다. 고종 때의 승정원일기(1886년 2월 15일)에도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마조단(馬祖壇) 제사의 축문(祝文) 가운데 예전대로 목장을 설치한다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넣으라고 분부하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승정원일기에는 마조단 기사가 334건이나 나온다.


마조단제는 임금이 신하로 하여금 제를 지내도록 했는데, 고려초기에는 마조단의 규모가 너비가 9보, 높이가 3자이며 사방에 출입하는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동대문 밖에 마조단을 설치하였는데,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중춘의 길일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마조제는 국가적으로 큰 행사임과 동시에 조선말까지 이어왔던 우리의 전통적 행사였다.

병조 산하에 있는 전국 목장과 말 사육을 책임지고 있는 사복시목장 즉 살곶이목장이 있는 현재 한양대학교 캠퍼스가 위치한 마조단(현재 백남학술정보관 광장 옆에는 옛 마조단 터임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에서 길일을 택하여 집행됐다.

말의 수호신인 마조(馬祖), 최초로 말을 기른 사람인 선목(先牧), 말을 처음 탄 사람인 마사(馬社), 말을 해롭게 하는 신인 마보(馬步)의 신위가 각각 모셔져서 마조제, 선목제, 마사제, 마보제를 각각 지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말 관리와 질병 치료를 담당하는 馬醫와 무마(巫馬)도 있었다.(Weekly Hanyang, 제주마문화연구소, (http://blog.naver.com/jc0041/)

이성계가 애용한 팔준마(八駿馬) 중 하나가 응상백인데 이 이름은 서리가 엉켰다는 뜻이니 곧 백마를 지칭한다. 이를 줄여서 응백(凝白)이라고 불렀다. 조선 태조의 명마 응상백(凝霜白)은 제주에서 진상한 말이었다.(제민일보 080302)

마조단은 한양을 제외하고 지방에는 오직 제주에만 있었다. 이는 제주도가 국마를 공급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마장을 가졌기 때문이다. 제주의 목마장은 고려시대 원제국이 탐라에 총관부를 두면서 동서에 아막을 설치한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 년간에 제주도에 10개 소장을 설치함으로써 그 후 5백년 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말 생산지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고려시대부터 원에 의해 대규모 목장이 세워지면서 말을 돌림병으로부터 지켜 달라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며, 그 장소는 아마도 동․서아막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말 사육이 국가차원의 주요사업으로 대두됨에 따라 제주에 도임하는 목사와 판관은 감목관을 겸임하게 되었고, 도민들도 말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하게 되었다. 마조단제가 관에서 말을 위해 지내는 제라면, 백중제는 그 해의 목축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대표적인 민간목축의례이다. 또한 절기를 이용, 말을 돌보느라 애쓴 목동들을 위한 마불림제 등이 열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한양은 동대문 밖에 마조단을 설치하여 임금이 신하로 하여금 중춘(仲春)의 길일(吉日)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제주도는 고려 충렬왕2년(1276)에 원(몽골)으로부터 말 160필이 들어와 목장을 개설하였고 몽골사람들이 체계적으로 말 관리를 하였으므로 마조제를 동·서아막[동아막:ㅇㅇ당(堂), 서아막:축일당(모동장내 堂)]에서 지냈다고 추정이 되며, 조선시대 철종3년(1852)에 제주시 이도 1동 현 KAL 호텔터에 마조단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으나 갑오개혁 이후 1908년 칙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말 관리와 질병치유를 담당하는 마의(馬醫)와 무마(巫馬:무당)가 있었다.(제주타임스 050406)

철종3년(1852) 이곳에서 창건되었던 마조단의 제사는 순종1년(1908) 7월에 칙령에 의해 산천단(山川壇)을 비롯하여 제단의 치제(致祭)를 폐지할 때 함께 폐지되었다.(야후백과사전)

5소장에는 백중마제단이 있다고 하나 필자는 답사하지 못하였다.

2013년부터 제주마문화연구소(소장 장덕지)가 주관이 되어 들불축제일에 마조제를 지내고 있다. 다만 고려시대부터 치러졌던 무속적 의례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 형태를 찾을 수 없어서 유교적 제사 방식을 따르고 있다.(제민일보 140310)
《작성 100711, 보완 130914, 1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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