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양잠단지로 형성된 마을.. 고성2리 누에공판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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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양잠단지로 형성된 마을.. 고성2리 누에공판장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9.2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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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잠단지분교장(分敎場)’ 자리에는 제주외국어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고성2리 누에공판장터
 

위치 ; 고성2리 마을회관
시대 ; 현대
유형 ; 산업기술유적

 

 


고성2리는 1967년 12월부터 1968년 봄까지 120㏊ 면적에 40세대가 입주하여 양잠단지로 형성된 마을이다.

이와 같은 양잠단지 사업은 정부의 「농가소득증대특별사업지원정책」의 일환으로 제주도와 강원도에서 시행되었으며 제주도에서는 선흘리, 동광리와 이곳이 대상지역이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그 시기에 제주시 도련동에서도 새로 뽕나무를 심는 밭이 있었다.


당시 입주하여 지금까지 정착한 ○○○에 의하면 10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의 융자금 226,000원으로 땅 사고 집 지어서 양잠을 시작했다. 땅은 융자금에 대한 담보로 북제주군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환이 끝난 1996년에야 자기 소유가 되었다.

주로 애월읍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이주해 왔었다. 당시는 정우식 도지사 시절인데 사업 추진을 재촉했으므로 서둘러 입주해서 강풍에 지붕이 날리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살아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부지를 제공해도 일이 서툴러서 입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2010년 7월 11일 면담)


육지에서 양잠기술자를 데려다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으며 누에고치는 농협에서 수매했다. 억새밭에 뽕나무를 심어놓고 나중에 개간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사람도 있고, 양잠으로 살아보려고 했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떠났다고 한다.

실패의 주원인은 국제경제 상황의 변화였다. 중국의 견사가 덤핑으로 국제시장에 진출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노지(야생)에서 키운 누에를 작잠(산누에)이라 했는데 이 누에에서 나온 견사는 붉은 색을 띠었으며 미국 시장에서는 오히려 호평을 받아 한국산 견사의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져 버린 것이다.

융자금 상환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이주해 버리고 양잠단지 개척촌락은 쇠퇴해 버렸다.

1981년 서부산업도로(현 평화로)의 포장과 동시에 마을 입구로 큰 도로가 지나게 된 후 최근에 원래 입주했던 주민들과는 무관하게 전원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과거 뽕밭에는 약용작물(가시오가피)이나 채소 등이 재배되고 있다. 일부 밭에 한두 그루가 남아 있을 뿐 뽕나무도 거의 없어져 버렸다.

현재 상황을 보면 누에공판장 터에는 마을회관이 들어섰고, 공판장 건물 하나는 개조하여 부녀회관으로 쓰고 있다.

양잠단지가 조성되면서 함께 생긴 ‘양잠단지분교장(分敎場)’ 자리에는 제주외국어고등학교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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