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임스 월러의 테시폰 시스템..금악리 테시폰(크테시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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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임스 월러의 테시폰 시스템..금악리 테시폰(크테시폰)주택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9.2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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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는 외인(外人)주택, 삼안식, 이시돌식, 크테시폰, 테시폰 등으로 쓰여 통일되지 않은 상태

금악리 테시폰(크테시폰)주택

 

위치 ; ① 금악리 135번지 이시돌목장 내, ②젊음의 집 진입로 옆
유형 ; 주거유적
시대 ; 대한민국

 

 



금악리 이시돌은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제주로 부임한 맥그린치(P James McGlinchey) 신부님을 빼고는 말할 수 없는 마을이다. 이 분이 제주 땅, 제주 사람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이 말해 준다. 바람 많은 제주 땅에 알맞은 건물의 모형을 연구한 끝에 보급한 것이 바로 테시폰 건물이다.


옛 메소포타미아 지역 이라크 바그다드 가까운 곳에 티크리스 강 인근 고대도시 유적 테시폰(Ctesiphon,크테시폰)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이런 건물의 기원을 찾을 수 있으므로 이런 건축을 테시폰(크테시폰)이라 한다. 삼안식 주택이라고도 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아일랜드인 엔지니어 제임스 월러가 고안한 구조형식을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아일랜드의 엔지니어 제임스 월러(James Waller)는 호주에서 태어났지만 아일랜드로 이주해 공과대학을 졸업한 전문가로서 1913년에 동료와 함께 건축구조 전문업체를 설립했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테시폰 시스템(테시폰 헛)’이라 불리는 구조원리와 공법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는 20세기 초 아일랜드의 철근콘크리트 구조 발전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건축구조 기술 개발로 건축기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대개의 엔지니어들이 그러하듯 제임스 월러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군 공병으로 참전했는데 그리스 살로니카 전투에서 물에 젖은 텐트에 시멘트 가루가 부착되면 상당한 강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섬유질 재료를 목재 형틀에 엮은 뒤 시멘트를 반죽해 텐트 천 위에 붙이는 공법을 착안하게 된다. 월러의 아이디어는 이라크 바그다드 근처의 사막에서 발견된 고대 왕국 테시폰의 거대한 아치 구조물 유적을 1922년에 방문하며 다시 발전했고, 회사로 돌아온 뒤 합판 양끝에 핀을 꽂고 체인을 늘어뜨리면 생기는 자유로운 곡선을 이용한 구조 원리를 터득해 다채로운 실험과 시험 시공을 거쳐 기술을 완성했다.

그는 이 기술을 ‘테시폰 시스템(테시폰 헛)’이라 명명하고 유럽과 미국 등에서 수많은 특허를 획득했다.


그가 고안한 테시폰 시스템은 1940년부터 1970년까지 영국, 아일랜드, 짐바브웨,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호주, 스페인, 그리스와 인도 등에서 다양하게 적용되었는데 대부분 주택, 창고, 대규모 축사나 공장 혹은 격납고 등으로 사용됐다. 지금까지도 많은 엔지니어에 의해 그의 구조적 원리와 성과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는 아일랜드를 기반으로 활동했고, 제주 이시돌목장을 개척한 맥그린치 신부도 아일랜드 사람이다. 제임스 월러와 맥그린치 신부가 아일랜드에서 머문 시기 일부가 겹쳤고, 맥그린치 신부는 이미 아일랜드와 콜롬반 신학교에서 듣고 보았던 다양한 크기와 용도의 테시폰을 4H클럽 학생들과 실험한 뒤 개척농가를 위해 이를 대량 보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기초로 한국에 특허를 출원해 등록한 뒤 그 실시권을 당시 도급순위 상위에 자리하고 있던 삼안산업에 이전한 것이다.


결국 1940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용된 제임스 월러의 테시폰 시스템이 맥그린치 신부에 의해 우리나라 제주의 이시돌목장에서 최초로 구현됐고, 그 핵심 기술이 서울의 폭발적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채택돼 대한주택공사의 수유리 시험주택 B형과 서울시의 구로동 시영주택에 삼안산업을 통해 적용되었던 것이다.(경향신문160607 박철수 글)


용어는 외인(外人)주택, 삼안식, 이시돌식, 크테시폰, 테시폰 등으로 쓰여 통일되지 않은 상태이나 원어 Ctesiphon을 필자는 테시폰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이곳 테시폰은 1961년 4H 회원과 함께 이시돌목장의 주택(숙소)인 이시도레하우스를 만든 뒤부터 1963년 이시돌목장의 사료공장, 1965년 협재성당(금능공소, 2011년 철거하였음), 1970년대에는 조금 작은 규모의 돼지우리 등을 테쉬폰 방식으로 건축했다.(연합뉴스 150626)


이 건물은 합판을 세워 윗부분의 양끝에 못을 박고 쇠사슬을 늘어뜨린 뒤 그 포물선(抛物線) 모양을 따라 합판을 오려내 거꾸로(엎어) 세운 뒤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곡면 모양의 목재 형틀을 여럿 만들고 이를 줄줄이 세워 물 뿌린 가마니를 덮은 다음 모래와 시멘트를 섞은 반죽을 그 위에 3~4회 덧씌워 지었다.(경향신문160607 박철수 글)


물결 모양의 아치가 연속된 형태의 쉘 지붕이며, 내부에는 기둥이 없어 넓은 평면 구정이 가능하다. 주택, 군용막사, 교회 등에 사용되었다. 각재 또는 평철을 기본 구조로 하고 합판 대신 삼베나 가마니 등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구조체를 제작했다.

공법이 간단하고 특수기능공이 필요 없으며 빠른 시일내에 완공할 수 있으며 목재가 절약된다는 장점이 있으나, 균열이 발생하기 쉽고, 곡면으로 인하여 창문 위치에 제한을 받으며, 채광과 환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콘크리트를 사용한 근대식 주택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며, 절대적으로 부족한 당시의 제주 지역 주택 사정과 잘 결합되었다.(김태일 강의)


건축 과정을 짐작컨대, 철근이나 파이프 같은 것으로 골조를 세우고 그 위에 가마니를 연결하여 덮은 위에 시멘트 버무린 것을 일정한 두께로 발라 말린 것 같다. 지붕이 굳어지면 골조를 떼어냈을 것이다. 천정에는 이어붙인 가마니 무늬가 고스란히 찍혀 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 구조가 무게를 지탱한다는 것이다. 지붕의 두께가 5㎝ 정도로 보이는데 그 정도 두께면 속에 철근을 집어넣지 않아도 과연 자체 장력으로만 견딜 수 있는 것은 곡선형으로 연결된 것이 그 비밀이라고 한다.

금악리에 이런 건물 5동이 남아 있고 아래 사진 옆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곳에만 유일하게 있다고 했으나 금악리 5곳, 선흘리 4곳, 월평동 4곳, 동광리 1곳, 귀덕1리 1곳 등 모두 합치면 15채에 이른다.


한편, 서울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이와 같은 건물이 지어졌다. 5·16 쿠데타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육사 8기 졸업생이자 5·16 쿠데타에 참여한 장동운 대령이 현역 군인으로 대한주택공사의 전신인 대한주택영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들은 모두 서울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대응해 새로 편입된 서울 교외지역에 서민주택을 어떻게 하면 빨리, 많이, 싸게 지을 것인가에 골머리를 썩였다. 이들의 각오와 다짐은 판자촌과 불량주택들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새로 편입한 서울의 교외 주택지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쉽게, 빨리 지을 수 있는 시험주택을 고안해 시험 삼아 지어본 뒤 성능과 비용, 공기 등을 검토해 다른 외곽지역에 확대하기로 결정했고, 대상지로 서울 수유리 국민주택지구를 선정했다.

장동운이 이끈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는 A~F형의 6가지 시험주택을 고안해 제시했고, 수유동 국민주택지구에는 주택공사가, 구로동에는 서울시가 이를 건설했다. 이것이 ‘63 시험주택’이다.


19평형짜리 단독주택인 시험주택 B형은 모양이 매우 특이했다. 이를 설명할 방법이 마땅찮아 ‘흡사 구름다리처럼 생긴 집’이라고 했고, 주택공사 기술자들 역시 ‘벽체와 지붕을 한꺼번에 시멘트 모르타르로 지을 수 있는 쉘 구조’인데 ‘미군용 퀀셋을 조금 아름답게 변형한 것’이라 얼버무렸다.

뿐만 아니다. 다른 시험주택과 달리 ‘평면은 건설업체의 제안에 따랐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1963년 7월에 작성된 설계도에는 ‘시험주택 B형’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시돌식’ ‘이시도레식’ 등의 별칭이 함께 표기돼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일컬어 ‘삼안식’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수유리 시험주택 B형의 별칭으로 사용되는 ‘이시돌식’ 혹은 ‘이시도레식’이라는 수식어는 곧 제주 금악의 ‘이시돌’이라는 목장 이름에서 연유했고, ‘삼안식’이라는 별명은 대한주택공사가 수유리 시험주택 B형을 지을 때 ‘평면은 건설업체의 제안에 따랐다’고 했던 건설업체가 바로 삼안산업주식회사(설립자 예관수)였기에 비롯된 일이라고 추측된다.

특허 기록으로는 ‘돔형 건물의 주벽체’라는 특허는 분명 이시돌목장의 대표인 피제·메·그렌지(맥그린치 신부)에 의해 1963년 2월23일 출원되었고, 같은 해 5월20일 등록·공고됐다. 등록 이후 특허권 이전에 관한 항목에는 ‘등록권자의 허락에 의하여 1963년 8월12일부터 1973년 7월27일까지 10년간 전국에서 제조, 판매, 사용 및 확포에 대한 실시권을 삼안산업주식회사가 갖도록 한다’고 기록돼 있다.

즉 제주 이시돌목장의 테시폰 주택 특허권을 가진 맥그린치 신부가 특허 사용권한을 삼안산업에 10년 동안 양여했기 때문에 삼안산업은 수유리와 구로동에 주택을 대량 보급하면서 ‘삼안식’이라는 일종의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3년 10월22일자 경향신문 기사에는 〈지난 9월10일부터 구로동과 수유동에서 착공된 이시돌식 주택은 지붕이 흡사 구름다리처럼 생긴 집이며 앞으로 구로·오류·미아 등에 시영주택 1040동을 지을 예정인데 우선 구로동에 40호를 시범으로 짓는다. 특히 이시돌 주택의 특허를 받은 삼안산업과 다른 회사 한 곳이 자비로 주택을 먼저 지은 다음 분양할 때 그 비용을 되돌려 받는 방식을 택했다.〉는 내용이 있다.


제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테시폰 주택이 제주에는 거의 버려진 상태로 여럿 방치돼 있고, 해가 거듭할수록 줄고 있다. 이에 반해 영국과 아일랜드, 스페인, 호주, 피지 등의 국가에서는 제임스 월러가 창안한 테시폰 시스템이 갖는 문화사적, 건축사적, 기술사적 의미를 높이 사서 국가 지정 문화재나 근대건축유산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맥그린치 신부는 목장 개척과 함께 많은 수의 개척농가를 유치하려고 주택이며 돈사로 사용할 수 있는 테시폰을 공급하기 위해 서울의 ‘공영건업’으로 하여금 공사에 참여하도록 했는데 어깨너머로 이를 익힌 주민들이 중산간 등 여러 곳에 테시폰 주택을 모방한 집을 스스로 지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경향신문160607 박철수 글)


전문가들은 테시폰이 제주와 떼놓을 수 없는 맥그린치 신부의 개척정신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국내 근현대 건축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주는 가치를 지닌다고 하며,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가치 조명과 등록문화재 지정 등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제주의 소리 150626)


최근에는 영화, 화보, 웨딩 촬영지로 주목받고 있으며 관광객들도 많이 찾고 있다. 2015년 테쉬폰 활용방안 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한 서울시립대 박철수 교수는 제주 테쉬폰 루트를 제안했고, 권기혁 교수는 "테시폰 구조는 우리나라 건축 기술사적 의미가 크고, 또 그 자체로도 독특한 구조형식임에도 현재 제주도에 남아 있는 테시폰은 우레탄을 덮어쓰고 있거나 방치돼 붕괴되고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우리 후손들은 테쉬폰을 책 속에서만 접하게 될 것이다. 남아 있는 실물의 테시폰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보존 가능한 테시폰을 선정해 등록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고 제 기능을 회복시키고 문화자산의 형태로 활용해야 한다. 단순 보존하고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 테쉬폰 구조가 가지고 있는 향토성을 활용해 현대적으로 재전유(再專有)하는 것이 그 가치를 더욱 높이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제민일보 150626)
《작성 100715, 보완 1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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