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마을과 마을 사이 혼인이 금지된 까닭, 신들의 다툼 때문..서귀동 서귀본향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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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마을과 마을 사이 혼인이 금지된 까닭, 신들의 다툼 때문..서귀동 서귀본향당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10.02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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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홍마을 간에는 결혼은 물론 밭을 매매할 수도 없다고 한다.

서귀동 서귀본향당

 

위치 : 이중섭 거리 중간쯤 구 아카데미극장(현재는 폐가로 방치)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귀동 535번지이다. 서귀포기상대 옆 길로 올라가면 좌측에 약간 아랫쪽 지반에 위치하고 있다.(건물들로 가려진 사이에 위치)
유형 ; 민간신앙(본향당)
시대 ; 조선~현대

서귀동_본향당후박나무.
서귀동_본향당영등맞이제



지난날 서귀포에 살던 사람들이 신앙의 귀의처로서 본향을 모셨다 하여 '서귀본향당(西歸本鄕堂)'이라 부른다.


서귀본향당의 당신은 다른 본향당과는 달리 신목 아래 별초당을 지어서 좌정했으며 5칸 짜리 초가집이었는데 현재 당을 매고 있는 박정석씨(23대째 당주)의 백부 되시는 큰심방 박생옥(朴生玉)께서 43년 동안 지키다 돌아가신 후 지킬 사람이 없어 방치되다가 임오년 3월 기묘일에 박정석씨에 의해 슬레이트 건물로 중수되었다.


당신이 후박나무로 내려와서 초가에 좌정했기 때문에 당제를 지낼 때에는 본향신에게 먼저 고하고 후박나무 앞에도 예를 갖춘다고 한다.(2007년 3월 18일 박정석씨 이야기)


서귀본향당의 신목(神木)은 약 420살 된 후박나무로 키 11m, 가슴 높이 둘레가 4.6m인데 원래는 두 그루였다고 한다. 1959년 9월 태풍 ‘사라호’로 인해 큰 가지가 꺾이면서 회생이 불가능하게 되자 제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내었고 현재 한 그루만 남아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매년 네차례 당제를 지낼때마다 나무 앞에 제물을 차리고 제를 올렸는데 1961년 서귀포측후소(현 석귀포기상대)가 들어선 이후 출입이 통제되면서 이같은 전통은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당제를 지낼 때마다 제물을 차리고 제를 올리지는 않지만 신목을 찾아 간단한 인사를 올림으로써 과거 신목에 대한 예를 올리고 있다.(제주일보 2006-05-11)


《본풀이》 : 서귀본향당의 당신의 이름은 "바람웃님"(風神을 뜻함)이다. 2007년 현재 당집 안에 세워져 있는 위패에는 〈東壁前日雲官 西壁前池山國 西歸本鄕大明神之位〉라고 되어 있다. 東壁前日雲官은 東壁前日文官이라고도 한다.

박정석 심방은 현재 위패 안쪽에 東壁前日文官이라고 되어 있는 위패가 있다고 한다. 박 심방은 백부가 돌아가신 뒤 당이 폐허로 변해서 집이 다 허물어졌었지만 안에 들어가 보니 신위는 글씨하나 번지거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신이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본풀이》바람웃또는 본래 홍토나라 비우나라의 대가집 아들인데, 어느 해 삼신산을 보려고 지상으로 내려온 곳이 고산국(현재의 내몽고 지역)이었다. 중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대신의 집에 유숙하러 들어간 바람웃또는 그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대신과 바둑을 두며 이기기도 하고 져 주기도 하며 친하게 사귄 후에 대신에게 딸과의 결혼을 청하였으나, "어찌 대감집 딸을 쉽게 내줄 수가 있느냐, 바둑이나 두어보고 이기면 내어주마."라고 하였다.

바람웃도가 바둑으로는 한 수가 위여서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첫날밤 신방에 들어가 신부의 너울을 걷어보니 얼굴에 곰보가 있는 추녀였다. 작은딸을 보고 청혼을 한 것이 큰딸(고산국)을 맞게 된 것이라 말도 못하고 뒤돌아 앉은 바람웃도는 그 때부터 세숫물을 떠와도 세수를 안 하고, 밥상을 가져와도 식사를 안 하고 벽을 향해 돌아앉아 책만 읽었다.

그러다가 시녀를 통해서 처제와 서찰을 주고받으며 눈이 맞아 제주도로 도망와 버렸다. 그 때만 해도 제주도는 암흑천지(심방들은 이를 ‘천지혼합시절’이라고 함)였는데 바람웃도가 도착하여 한라산의 말라죽은 구상나무 가지를 꺾어 세 번을 치니 닭이 되어 울기 시작하면서 대명천지로 바뀌었다.


쌀오름까지 내려와서 천막을 치고 앉았으니 인간(김봉태)이 사냥하러 상잣까지 올라오다가 신을 보게 되었다. 인사를 드리니 이리 오라고 해서 좌정할 곳을 물었다. 처음 동홍동 굴왓으로 안내했더니 그을음내에 멩감내(인간 냄새)가 싫다고 해서 서홍리 안카름으로 갔다. 여기서는 마소, 개 닭 등 가축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워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호근리 가시머리로 안내하였다.


한편 버림받은 큰 부인(고산국)은 얼굴은 못 생겼지만 똑똑하고 무예에 능한 여장부였다. 천기를 받아 이들이 제주도로 달아난 것을 안 고산국은 남장을 하고, 천근 짜리 무쇠 활에 백근 짜리 화살을 들고 칼을 차 축지법을 써서 백리를 오리로 앞당기며 뒤쫓아왔다.

이에 당황한 바람웃도는 풍운조화를 부려 섬 전체를 안개와 비로 캄캄하게 덮었으나 고산국이 청부채를 휘두르니 이내 걷혀버리고 말았다. 쫓아올 때 생각에는 보이기만 하면 단칼에 베어 죽일 요량이었으나, 막상 얼굴을 보니 그것도 못할 노릇이었다.

"우리 이대로 고향에 돌아가면 남부끄러운 일이니 여기서 살되 동생은 아버지 성을 쓰지 말고 어머니 성을 쓰면 살려주마."고 하여 동생은 어머니 성을 따라 지씨가 되니 "지산국"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이 때 고산국이 활을 쏘니 흑담에 떨어져 서홍마을을 차지하였고, 바람웃도는 서귀포의 앞 바다 문섬으로 떨어져 서귀동 아랫마을을 차지하고, 지산국은 나머지 동홍마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 지역의 땅과 물을 가르게 되었는데, 동․서홍 마을 간에는 결혼은 물론 밭을 매매할 수도 없게 되었다. 결혼을 금한 것은 부부의 자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밭 매매를 금한 것은 사이가 나쁘기 때문이다.


박정석 심방은 조선 숙종 시대 제주도의 모든 당과 절이 불태워질 때에도 훼철을 면한 곳이 이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시대부터 마을마다 포제를 지내도록 했는데 이곳 서귀․동홍에서는 본향당이 있어서 포제를 시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이 마을에서는 포제를 지내지 않는다.


서귀 마을의 주요 세력을 가지고 있는 성씨들(姜, 吳, 金, 李, 朴, 玄)이 자금을 내어 20평 짜리 별초당(別草堂)을 지은 것이 지금의 이 자리이다. 특히 서귀본향당에 다니는 사람들은 닭이 천지를 밝게 하였기 때문에 제를 지내는 날에는 닭고기를 먹지 않으며, 닭고기를 먹은 사람은 이곳에 가지 못한다고 한다.


전설에는 1770년대에 송씨 집안에 일흥(逸興)이라는 분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도평(道枰)과 도성(道聖)이다. 서귀본향당의 당신의 이름은 "보름웃님"이다. 보름웃님은 본래 홍토나라 비우나라의 대가집 아들인데, 여느해 중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대신의 집에 유숙하러 들어간 보름웃도는 그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문관 보름웃도가 중국으로 유람을 갔다가 유숙하게 된 집의 딸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결혼을 한다. 그런데 첫날밤 신부 얼굴을 보니 박색이어서 알아보니 자신이 결혼한 여인은 큰딸이고, 미인은 작은딸인 것을 알게 된다. 보름웃도는 작은딸과 눈이 맞아 제주도로 도망치고, 화가 난 큰딸이 두 사람을 뒤쫓아 온다.

제주도에서 두 사람을 발견한 큰 딸은 동생과 남편을 차마 죽일 수 없어서 포기하고, 큰딸은 김봉태의 인도로 서홍리에 신으로 좌정한다. 작은딸은 지산국으로 이름을 바꾸어 동홍리로 좌정하고, 보름웃도는 하서귀에 좌정한다. 그리고 큰딸은 자신이 다스리는 서홍리와 동생이 다스리는 동홍리 사람들은 서로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다음전문자료) 동.서홍마을 간에는 결혼은 물론 밭을 매매할 수도 없다고 한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혼인이 금지된 까닭이 신들 사이의 다툼 때문이라고 한다. 이 자료는 다른 제주 당신화들과는 달리, 남녀간의 사랑을 주된 주제로 삼고 있으며, 이 때문에 갈등이 생겨 서로 영역을 나누게 된다.

또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상당한 문학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또 구상나무로 닭모양을 삼아 어둠이 걷히게 한다거나, 원시적인 도구인 뿡개를 사용하는 모습 등에서 원시신화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어서 흥미로운 자료이다.(다음 문화원형)


이 당은 ①천지연포구의 바다광덕요왕의 딸 ②관청할망당(조방장의 밥을 하던 송씨할마님) ③솔동산에 거부용신(農神)당 ④굴왓의 산신여드렛당(김봉태여드렛당) 등 4位의 하위신을 거느리고 있다.


매년 정월 초하루에는 과세문안대제, 2월 13일에는 영등손맞이제(영등대왕신맞이), 7월 13일에는 마풀림제, 11월에 시만국대제(본향탄신제)를 지낸다.

특히 영등손맞이제는 영등신을 맞이하여 오곡 씨앗을 주어서 풍농을 기원하고, 바다에는 옥돔, 조기, 갈치, 우럭 등의 생선 씨앗을 주어서 어선들의 만선을 기원하고, 무사와 안녕을 위해 액막음을 해 주고, 해녀들에게는 미역, 톳, 우미, 가시리 등 해초의 씨앗과 전복, 소라, 해삼 등의 해산물의 씨앗을 주어서 풍작케 하고, 사업하는 시민들께는 뜻하는 대로 소망을 이루도록 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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