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부정부패로 원성이 높았다'.. 용담1동 홍종우(洪鐘宇)마애명
상태바
[향토문화] '부정부패로 원성이 높았다'.. 용담1동 홍종우(洪鐘宇)마애명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10.13 09: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연경관 수려한 명승지 찾아 풍류 즐기면서 바위나 절벽에 유람의 흔적 남긴 마애명

용담1동 홍종우(洪鐘宇)마애명

 

위치 ; 제주시 용담1동 용연 동쪽 절벽
유형 ; 마애명
시대 ; 조선~

 

용연 홍종우마애명


용연은 수심이 깊어서 그 깊이를 알지 못할 정도로 길이는 백보 남짓 하다고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제주에 부임했던 목사나 판관들, 유배왔던 적객들이 자연경관이 수려한 명승지를 찾아 풍류를 즐기면서 바위나 절벽에 유람의 흔적을 남겼는데 이것이 마애명이다.

마애명이란 자연석벽에 이름이나 싯귀를 새겨 놓은 것을 말한다. 마애명이 발견되는 곳은 한라산․방선문․용연․산방굴사․천제연․안덕계곡 등인데 오등동의 방선문에 가장 많다.

용연에는 양쪽이 암벽으로 되어 있고 양쪽 암벽에 마애명이 있다.


용연 벼랑에 있는 마애명은 대부분이 제주목사를 지낸 역대 13명의 인물과 함께 자리한 사람들의 것이다. 그 중에 동쪽 벼랑 높은 곳에 있는 굵은 한자로 새긴 '洪鐘宇'라는 이름이 두드러진다. 〈洪鐘宇 子 淳大 光武 甲辰 四月 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光武 甲辰이면 1904년이다.


홍종우는 철종5년(1854)~? 조선 말기의 정객. 본관은 남양(南陽). 도사 재원(在源)의 아들이다. 고종27년(1890) 말에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갔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파리의 키메박물관 촉탁으로 있으면서 〈춘향전〉․〈심청전〉 등 한국고전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1893년 7월 파리를 떠나 귀국하던 길에 동경(東京)에 머무르면서 친구 김유식(金有植)을 통하여 이일직(李逸稙)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이일직은 자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역적으로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을 주벌(誅伐)하라는 국왕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왔다고 털어놓은 뒤 김옥균을 암살하는 일에 가담하여 줄 것을 권유하였다.


이 제의를 받아들여 그 뒤 동지로 가장하고 김옥균에 접근하여 마침내 그를 중국 상하이(上海)로 유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1894년 3월 28일 상해 미국 조계(租界)내의 일본호텔 동화양행(同和洋行)에 투숙한 김옥균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그곳의 경찰에 붙잡혔다.


그러나 조선정부와 청국정부의 교섭으로 석방되어 4월 13일 청국군함의 호송을 받으면서 김옥균의 시체를 가지고 양화진(楊花津)으로 귀국하였으며, 김옥균 암살의 공으로 고종과 민씨 척족 정권으로부터 홍문관교리직을 제수받고 서울에 사택(舍宅)까지 하사받아 세도를 누렸다.


1898년 황국협회(皇國協會)에 가담한 뒤 길영수(吉永洙) 등과 함께 약 2,000명의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하여 독립협회가 개최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습격하고 앞서 독립협회를 모함한 죄로 구금된 조병식(趙秉式) 등을 지지하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수구파 정권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 홍종우는 승승장구하는데, 이 때문에 그는 개화세력에 의하여 길영수․박유진(朴有鎭)과 더불어 삼간(三奸)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1898년말에 독립협회가 해체되자 수구파내각의 의정부총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엠파스한국학)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한 인물이기도 한 그는 법학을 공부한 이력 때문인지 평리원 재판장까지 지냈다. 그 뒤에 하락세에 들어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제주목사를 지냈다.

현행복의 <취병담>(각)을 보면 제주 목사 재임시에 '산에 있는 소나무를 많이 벌채하고 민재 1만 냥을 징수하여 삼군에 분장한다고 하면서 뇌물로 쓰는 등 사회가 부정부패로 가득차 원성이 높았다고 함'이라 적혀 있기도 하다.(오마이뉴스 2010년 2월 4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