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원거리 항해에 앞서 무사항해 기원.. 용담1동 제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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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원거리 항해에 앞서 무사항해 기원.. 용담1동 제사유적
  • 고현준
  • 승인 2020.10.3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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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을 때 관탈도·추자도·해남 반도 여러 섬 끝머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용담1동 제사유적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311. 제주향교 서쪽
시대 ; 고대/남북국시대/통일신라

용담1동_제사유적유리옥

 

용담1동_제사유적금동허리띠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탐라 후기의 제사 유적이다. 용담동 제사 유적은 제주시 앞 해안가에서 한 단 올라온 표고 20m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날씨가 좋을 때면 관탈도·추자도·해남 반도의 여러 섬 끝머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옛 제주읍성의 서쪽으로 흐르는 한천과 병문천 하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드넓은 ‘동한드기’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한천(漢川)․병문천(屛門川)․산지천(山地川) 등 대외교역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제주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있다.


용담동 제사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93년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일정한 집자리나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범위만 확인되었다.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범위는 남북 길이 11.2m, 동서 너비 5.4m 정도였다. 특히, 중심 둑을 경계로 4개의 피트 내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유물은 지표 아래 10~25cm에서는 장경병·사각편병·중국계 도자기·대호·투공지석(透孔砥石) 등이 출토되었다. 지표 아래 25~35cm에서는 냇돌과 할석이 적석된 곳이 드러났고, 청동제 유물과 철제 화살촉·파상밀집대호·금동제 허리띠 장식·주름무늬병이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 유물과 잡석군이 뒤섞인 상태로 나타났다.


지표 아래 35~40cm에서는 잡석이 전혀 없고 유리 구슬과 철제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상층에서 다량 출토된 도기 유물은 극히 소량만 분포하고 있었다. 바닥 부분은 대형 할석이 군데군데 불규칙하게 놓여 있었다.


용담동 제사 유적에서 출토된 그릇은 모두 통일신라 토기인 회색 도기로 병과 항아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문양은 시문 수법에 따라 그은 무늬와 찍은 무늬·두드림 무늬·돌대 무늬로 나뉜다.


그은 무늬와 두드림 무늬는 회색연질도기, 찍은 무늬는 회청색경질도기에 시문되어 있다. 찍은 무늬는 밀집 원문·이중 권문·국화문·마적문 위주이다. 7세기 중엽 이후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골호 등의 장식 시문으로 유행했던 영락문이나 이중 능형문, 수적문 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찍은 무늬는 장경병과 단경병에 시문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문양의 모티브는 7세기경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회색 도기의 문양과 동일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경주 지역에서 벗어난 변방 지역, 특히 한강 유역의 이성산성이나 사당동 요지 등에서 출토된 토기 문양과 동일한 형태이다.


일부 돌대 무늬가 부착된 회색 도기는 어깨 하단에 1~2조의 돌대 턱을 두른 광견상 대호(옹)의 일종이다. 이러한 돌대문 대호는 미륵사지·정림사지 우물지·보령 진죽리·영암 구림리·양주 대모산성 등에서 출토된다. 편년 자료는 미륵사지 출토 ‘대중(大中) 2년(858)’명 대호가 있다. 이러한 대호류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기종으로 파악된다.


용담동 제사 유적은 제주 앞 해안이 훤히 조망되는 주변보다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유물은 제기로 많이 쓰이는 장경병 등의 병류와 호류만이 출토되었고, 생활 용기인 발·완·대접·시루·반·동이 등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 제주도에서 주거 유적과 패총에서 흔하게 확인되는 적갈색심발형토기, 즉 고내리식 토기가 전혀 공반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게다가 주변에서 특정 시설물이 확인되지도 않았다.


이와 유사한 성격의 유적으로는 변산반도 자락에 위치한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이 있다. 바닷가에 바로 인접한 언덕에 고급 도기와 제사장이 사용했던 각종 장신구들이 깨지거나 폐기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 용담동 제사 유적에서 출토된 나팔형의 목이 긴 병·금동제 허리띠 장식·유리 구슬 등의 고급 유물은 단순하게 폐기될 수 있는 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특별한 행위, 즉 제사 행위를 행한 후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에는 ‘·····시탐라왕적전유속(是耽羅王積田遺俗)’이라 하여 탐라국주가 주관하는 농경과 관련된 의례 행위가 있었음을 전한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일본서기(日本書紀)』·『당회요(唐會要)』 등의 문헌에 나타나는 탐라국의 활발한 조공 외교 관련 기록도 보인다. 용담동 제사 유적은 이러한 중대사와 관련하여 배를 떠나 보낼 때마다 원거리 항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행위가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시사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강창화)


용담동 제사유적은 탐라인들이 원거리 항해를 무사히 이루기를 기원했던 곳이다. 탐라국시대에 주변국가들과 교역활동을 전개했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1928년 제주시 산지항 축항공사 때 출토된 한대(漢代)의 화폐 구리거울 등은 기원후 1세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담동 유적에서는 장검․단검․끌형무기․주조도끼․소형도끼 등 수십 점의 철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이것들도 역시 한대(漢代)의 유물이다. 이 유적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남한 지방에서 유행했던 회색도기편과 당(唐)나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고급 유물이 깨진 상태이지만 다량 출토되었다.

이들 회색도기와 중국 고청자(古靑磁) 주전자 한 개체분․금동과대편(金銅銙帶片)․구슬 등은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도기라는 점에서 철기 등의 생활필수품과 함께 해외교역을 통해 입수된 물품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곳에 원거리 무역을 통해서야만 입수가 가능한 다량의 물품이 집중 폐기되었다는 것은 원거리 항해에 앞서 무사항해를 기원했던 제사유적임을 뜻하는 것이다.(한라일보 1997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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