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본 제주의 역사, 오돌또기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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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본 제주의 역사, 오돌또기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나..
  • 강문칠
  • 승인 2020.11.0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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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문화칼럼(연재1))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본지 명예문화대기자인 강문칠 선생(작곡가, 음악평론가)이 최근 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라는 음악으로 본 제주의 역사서로 볼 수 있는 연구서를 내놓았다. 이 연구서는 그동안 제주에는 전무하다 시피한 음악의 역사를 살피고 숨어있는 얘깃거리를 발굴함으로써 제주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굴한 내용 중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제주도에 직접 내려와 제주시에서는 제일극장에서 서귀포시에서는 서귀포관광극장에서 제주시민과 서귀포시민들을 대상으로 직접 애국가를 가르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전까지는 올드랭사인 곡에 애국가를 맞춰 불렀는데 이후 현재의 애국가로 바꿔 부르게 됐다는 얘기도 새로운 내용이다. 제주도의 작곡가이자 퍙론가인 음악가가 조사한 제주도 음악사를 통해 제주도 역사를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편집자주)

 

서귀포관광극장
서귀포관광극장

 

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강 문 칠(작곡가, 음악 평론가)

 

1. 序言

강문칠 작곡가

 

한라산(제주) 속의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고 진행이 되었을까? 필자는 이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각종 서적들을 뒤지고 훑어 왔다. 그러나 뚜렷한, 신빙성이 있는 학설을 바탕으로 한 증거를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짐작을 할 뿐 그것이 뚜렷한 증거나 학설을 뒤 받침 할 내용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학설들을 제시함으로 궁금한 독자들의 나름으로 짐작 하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제주의 음악의 시작

 제주의 음악은 언제 부터일까? 그리고 어떻게 그려졌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아마도 아주 오래 전(삼국시대이거나 아니면 그 이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부터 전해져 오는 음악은 고연 어떠한 모습일까? 이에 대한 연구는 제주 음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眺望)하기 위한 것이라 보아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제주 음악의 과거에 관한 서적이나 참고 문헌이나 자료가 미비하여, ‘도라악’(度羅樂)(현행복 저, 민속원, 2003년 8월)의 내용을 바탕으로 참고하여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古代시대의 제주의 음악을 지칭하는 양식에 관한 내용으로 [속일본기續日本記](주; 도라악이 탐라악일 것이라는 추정하는 일본의 음악학자로 하야시 겐조(林謙三), 기시베 시게오(岸邊成雄) 등이 대표적이다)에 ‘度羅樂’이 바로 탐라악일 가능성이 있다는 논의가 일본학자들 사이에 줄곧 제기 되었다. 당시(6~7세기)의 음악이라는 것이 기껏 샤마니즘의 의식에 사용했던 음악(굿, 무당 등)에서 제주의 음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道羅樂’이 반드시 제주의 과거의 음악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은 이에 관한 서적이나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6~7세기 고대의 탐라와 일본 간의 문화적 교류의 사실을 바탕으로 탐라의 음악을 말하고자 한다면, 현재 까지는 ‘도라악’을 바탕으로 제주의 고대 음악사를 재구성한다는 면에 있어서, 탐라와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와 국내 사정을 고려한 새로운 조명을 바라는 마음이다.

 

2)제주음악(서양음악)의 발전의 시작

 제주음악(서양음악)의 시작은 언제 부터일까? 제주에 근대식 교육과 함께 초등학교(초등학교) 음악교육이 실행된 것은 해방 후(1945년)부터 현재 까지(2020년)를 제주음악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서양음악의 역사를 100여년이라 하는데, 제주의 음악은 그보다 못미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지리적 한계로(육지부와 교통이 안되는 상황)여러가지 면에서 문화적인 소외를 지녀야 하는 제주의 상황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거기에다 일제 강점기, 8.15광복, 제주 4.3 사건, 6.25쟁, 5.16쿠테타, 4.19 학생운동 등 국내의 소용돌이 속에 사회적 변혁기와 함께 했던 것이다.


 위에 열거한 사건 중에서 6. 25 전쟁의 영향으로 제주의 음악사회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6. 25전쟁으로 피난민이 제주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특히나 본토에서 들어 온 피난민이 육군 제1훈련소가 있었던 모슬포에 진을 치고 있었다. 군인들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가수나 작곡가, 연주자들이 주둔하고 있었다(고복수(가수), 구봉서(배우, 탈렌트), 남인수(가수), 황금심(가수), 박시춘(대중가요 작곡가), 금수현(가곡 ‘그네’ 작곡가)), 특히 1950년대에는 제주도 내의 예술 활동 무대가 모슬포 읍내에서 펼쳐졌으며, 콩클 대회도 열렸었다고 한다.

전도에서 학생들이 펼치는 학예회 모습이 군악대(모슬포 제1훈련소 군악대)의 협조 속에 진행이 되었던 것이다. 1951년부터 1956년 까지 50만명의 신병들이 이 모슬포 훈련소를 거쳐서 전선으로 투입이 되었던 것입니다. 1955년 제주도 인구가 28만 여명이었다고 하니, 현재는 서귀포시 인구가 20만 여명, 제주시는 40만 여명이라고 하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수 밖에~


 이러한 제주 음악의 역사는 시작이 되고, 숱한 얘기꺼리를 만들면서 진행이 되고 있었다. 숱한 얘기들과 인물들 중에는 제주도 출신이 아닌 인물도 있었으니, 그가 남긴 음악의 역사는 실재적으로 예술적인 음악의 바탕 위에 활동하고자 했던 인물 중 하나이라고 여긴다. 그 인물은 목포 출신이며, 어머니가 제주 출신으로 청년 시절에 제주에 머물면서 살아 간 김국배라는 인물이다.

 

2. 김국배는 누구인가?

  1)김국배(金國培) 선생은 1929년 9월 13일 전남 목포에서 출생하였다. 목포가 고향이며, 제주가 고향이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김국배 어린이는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 목포에서 초, 중학교를 마치고, 그 후에 평양의 숭실 전문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받았다. 

6,25가 발발하기 전에 외가인 제주에 정착을 하기 위하여 내려와서 살다가 친분이 전혀 없는 제주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음악 밖에 없는 그로서는, 손재주가 있었던 남문로의 한 가게를 빌어 시계 고치는 일을 하였다(시계 수리방). 전문가도 아니고 그의 기술이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라, 매일을 손님이 없는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일을 마치는 오후가 되면 가게에서 바이얼린을 꺼내어 연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연습 겸 연주를 하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의 바이얼린 실력에  동네에서 하나 둘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어느 덧 제주시의 인사(人士)들의 귀에 까지 전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제주 유지들이 김국배 선생을 모시고 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거나하게 술이 취한 분위기에 휩싸여 김국배 선생의 바이얼린 연주를 청하게 된다. 그의 연주를 들은 제주의 인사들은(그 자리에는 교육계의 인사들이 있었음) 다들 환호하면서 그의 연주 솜씨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분들이 나서서 그의 취업 자리를 알선하게 이른다. 그곳은 다름 아닌 제주여자중, 고등학교의 음악교사 자리였다. 김국배는 제주여자중, 고등학교의 음악 교사가 되어서 일을 하게 된다(1951년 6월 3일 부임~1963년 2월 28일 퇴임).


  이전부터 계속이 되어 왔던 제주여자중학교의 예술제는 1953년 이전과 그 이후의 공연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 일은 가설극장으로의 역할을 하던 제주극장이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개관하게 된다. 제주극장이 개관이 되면서 교내행사에서 교외 행사로 바뀌는 여건이 조성이 되었고, 제주여중고의 예술제가 제주시민의 예술제로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주1, ’제주여고 50년사' p239).


 1950년대에 들어서서 제주여자고등학교의 무용부가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제주도를 대표하여,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을 획득하게 된다. 김국배(음악교사) 선생이 지도하에 원곡 이외에 후렴을 편곡하여, 제주여고 합창단의 3중창으로 녹음을 한 ‘오돌또기’가 1957년 5월 당시의 문화공보부 주최 전국민요 방송 프로그램 현상 모집에서 특선으로 당선이 된다.

 

1958년에도 제11회 방송음악 작품 심사에 출품한 고전 민요인 ‘이야홍 타령’과 ‘즐거운 농부‘가 입상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제3회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주2, ’제주여고 50년사 p244)(악보1, 오돌도기).


 이렇게 김국배 선생이 제주에 들어오게 된 것은 6.25사변으로 서울에서 지내고 있는 선생을 어머니(제주 조천 출신)께서 그의 안전을 위하여 소개를 하였다. 1930년대에 제주에 정착한 그는1939년
<악보1> 오돌도기


 제주여자중,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1963년 2월 28일에 학교를 떠나게 된다. 1964년에는 제3회 제주도 문화상을 수상한다. 술 때문에 병약해진 그는 1965년 음력 1월 5일 세상을 떠나게 된다.

 

 
 김국배 선생의 <오돌또기>의 합창을 살펴보면 가사가 맨 처음부터 “한라산 허리엔 시로미 익은 숭 만숭 둥그데 당실 여도 당실/연자 버리고 달도 밝고/내가 머리로 갈까나/서귀포 해녀는/바다에 든숭 만숭/달도 밝고 갈까나/내가 머리로 갈까나/제주야 한라산 /고사리 맛도 좋고 좋고/산지야 항구 끝 뱃고동 소리도 좋구나/우---오돌또기/저기 춘향 나온다/달도 밝고/내가 머리로 갈까나/제주야 한라산/고사리 맛도 좋구나/산지야 항구 끝/뱃고동 소리도 좋구나”(악보2, 오돌또기 합창곡) 

 


 위의 가사를 보면 전승되어서 내려오는 가사를 수정하였는데, 유독 한라산을 강조하는 가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아마도 제주도민이 아닌 사람으로서 한라산의 의미를 새삼 특별한 것으로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기사 계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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