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고려시대 대찰.. 외도1동 수정사(水精寺)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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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고려시대 대찰.. 외도1동 수정사(水精寺)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11.05 0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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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밀기 道詵密記〉에서 지정된 비보소(裨補所)는 3,800개소에 달한다.

외도1동 수정사(水精寺) 터

 

위치 ; 외도1동 276번지 일대 1만여㎡, 현재 어린이놀이터
유형 ; 불교유적(절터)
시대 ; 고려

2000년 8월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돌(용도 미확인, 혹 탑의 심초석?)
1997년 7월 수정사에 있던 주춧돌

 


고려시대 대찰이었던 수정사 터이다. 수정사지가 발굴되기 이전, 이곳에는 외도초등학교의 서쪽 울타리를 따라 남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1376년 경에 중수했던 기와 명문을 비롯하여 그 동안 초석, 기와, 청동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17세기 중엽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는 수정사가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26년인 서기1300년에 元나라 황후의 명에 따라 세워진 사찰이라고 기록했으나 수정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때는 충암의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중종16년=1521)에 나오는‘생각하건데, 원조(元朝)의 구물(舊物)로 우뚝하게 홀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도근천의 수정사뿐이다.’라는 기록 등을 근거로 원에 의해 세워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1300년 중반기의 여러 자료에는 수정사가 퇴락된 건물로 묘사되고 있어 수정사 창건연대는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하원의 법화사지 발굴 결과 원에 의해 창건된 것이 아니라 원이 10년 간에 걸쳐 대대적으로 중창한 사실이 밝혀진 것처럼 수정사도 원의 제주 간섭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다만 1300년대를 전후하여 원이 기존의 사찰을 허물고 대대적으로 중창한 것이 아닌가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8년(1408) 2월 28일자 기록에 「의정부에서 제주의 법화사․수정사의 두 절에 있는 노비 수를 정하도록 아뢰었다. 아뢰기를 ‘제주목사의 정문(呈文, 밑에서 위로 올린 글)에 따르면 주경(州境) 비보사찰(裨補寺刹)이 두 곳 있는데 수정사에는 현재 노비가 130인이 있고 법화사에는 280인이 있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두 절의 노비를 다른 사찰의 예에 의하여 각각 30인만 주고, 그 나머지 382인은 전농(典農)에 부치십시오’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고 되어 있다.(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 35쪽)


사노비(寺奴婢)가 130명이나 있어 하원동 법화사, 삼양동 원당사와 함께 제주 최대의 비보사찰(痺補寺刹)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의 적극적인 배불정책에 의해 1408년에는 노비의 수가 30명으로 줄어들면서 수정사의 위상은 점차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부터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지만 법화사보다는 지속적인 활동을 벌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제주에 유배되었던 충암 김정(金淨)은 제주유배기간 중 불자인 고근손의 요청에 의해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靜寺重修勸文)을 지어주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일부다.


〈생각해보니, 원대부터 있던 오래된 것이면서 아직도 우뚝 홀로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도근천의 수정사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 기와와 서까래가 깨지고 벗겨졌는데, 그것이 장차 무너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생각을 강개하게 먹고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그 옛것을 보존하면서 그것을 다시 건설하였다.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와서 문장을 구함에 무척 열심히 하였다. 이에 그 객에게 답하는 형식의 문장을 써서 그에게 준다.〉


이런 사실을 보면 수정사가 어느 정도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켜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수권문은 1521년 충암 김정이 사약을 먹고 사사되기 직전에 쓴 것이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수정사는 원제국 시대에 지어진 3대 사찰(원당사, 법화사, 수정사) 중 최후까지 남아 있었으며, 1521년 경 한차례 중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창된 수정사는 이후 100년도 못되어 거의 황폐해졌다. 어사 김상헌이 선조34년(1601) 이 일대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을 요량으로 수정사에 들렀다가 남긴 기록에는, "도근천에 사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 날이 어두웠으므로 숙박하기 위해 이르렀다. 그러나 초가집 수 칸으로 바람과 비를 가릴 수도 없었고, 기거하는 중들이 모두 부인을 거느려 자식을 두고 있어서, 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국가지도이념으로 자리잡자, 수정사도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 불교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제주의소리 2008년 9월 23일 장태욱 글) 17세기에 이르면서 수정사는 초가 수 칸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가 숙종20년(1694) 이전에 폐사된 상태에 있었다.

이해에 이익태 목사(절제사)가 연무정을 중수하기 위해 폐사된 수정사의 재목들을 가져다 써 버림으로써 수정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제주 민담에서는 이형상 목사가 제주의 모든 당과 절을 파괴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 부임하기 이전(1702년)에 수정사는 이미 훼철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정사에 관한 고려시대의 노래가 전하는데 가사는 전하지 않고 이제현의 《익재난고》에 한역시가 전한다. 홍수로 물바다가 된 수정사의 중이 상방에 미인을 숨겨 두고 뱃사공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세태를 풍자하였다. 작가와 연대는 알 수 없다.


水精寺
都近川頹制水坊 도근천 물둑이 무너져
水精寺裏亦滄浪 수정사 안에 물이 출렁이네.
上房此夜藏仙子 상방에서는 이 밤에 여인을 품고(숨겨두고)
社主還爲黃帽郞 주지는 도리어 뱃사공이 되었네.


내용이 음란하여 불교를 배척하던 유학자의 편견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현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항간에 떠도는 민요를 옮긴 것이니 유교 이데올로기로 각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 노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어 당시의 사회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근 높은 벼슬을 하는 관리가 연회 자리에서 늙은 기생 하나를 희롱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승려들과는 어울리면서 사대부가 부르면 오는 것이 어찌 그리 늦느냐?'고 했다. 기녀가 대답하기를 '요즘 사대부들은 돈 많은 상인들의 딸을 취하여 두 집 살림을 차리거나 노비를 취하여 첩을 삼는데, 우리가 중과 속인을 구별하여 대한다면 어찌 입에 풀칠인들 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부끄러워했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그 당시 사회는 부패한 관리와 원나라의 약탈로 인해 일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관료층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해가던 기녀들까지도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웠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말기의 참담했던 현실을 짧은 노래 한 편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http://cafe.daum.net/loveletter23/)


수정사의 창건이나 제주불교가 번영한 것이 모두 몽골의 정치적 영향과 관련이 있었고, 제주에서는 존자암을 제외한 모든 사찰이 대처승 사찰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런 타락상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수정사에 대한 기록은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602년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 1700년대의 「조선강역총도(朝鮮彊域摠圖)」, 1800년대 후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저본인 「동여도(東輿圖)」 등에 나타난다.

수정사지에는 10여 기의 민가와 함께 수정사라는 근대 사찰이 있었고, 사찰 경내에는 옛 수정사지의 주춧돌로 여겨지는 10여 기의 석재가 방치되어 있었다. 1990년대 후반에 수정사지가 자리 잡은 외도동의 택지 개발 계획이 본격화되면서 당시 수정사의 사역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 개설 계획이 세워졌다.


수정사지는 1987년 11월부터 12월 말까지 제주대학에 맡겨 지표조사를 벌여 초석과 기와 등을 발굴한 적이 있다. 그 후 제주시의 의뢰로 제주대박물관에서 2차(1998년 6월∼1월, 2000년 2월∼6월)에 걸친 발굴조사를 했다. 건물지 12동과 도로와 보도는 물론 11세기의 청자에서 18세기 중엽의 백자류까지 출토되었다. 특히 금동제품, 숟가락 등 청동제품, 인왕상이 양각된 탑제 부속구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다른 절터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탑지(塔址)가 발견됐다. 수습된 점판암제 탑재로 기단 탑면석 좌우에 음각된 인왕상(仁王像)은 제주도 최고(最古) 회화자료이며 고려후기 걸작품이어서 고려시대 수정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석등지·담장지도 발굴되었다.


유물로는 9~10세기의 해무리굽 순청자가 발굴되어 수정사의 창건 연대를 짐작하케 한다. 고려청자 가운데 방형향로와 투각의자 등 특수 용기가 확인됐는데, 이들은 고품격 기종으로 왕실과 대찰 등 최상위층에서만 향유하던 위신재(威信財) 성격을 갖는 청자로 수정사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송·명·청대 도자와 함께 중국 화폐인 開元通寶(개원통보, 621년), 景德元寶(경덕원보, 1004~1007년) 등이 확인돼 수정사와 제주의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중엽의 백자류까지 출토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된 곳 남북으로 능선을 따라 외도동 498·499·376번지 일대를 중심으로 12동의 건물지가 배치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남북 120∼150m, 동서 50∼60m 정도이다. ‘二月修正禪師’등이 새겨진 기와와 고려시대 청자 등 토기 자기류, 그리고 등이 발굴됐다. 출토유물로 보아 수정사는 늦어도 12세기 이전 창건돼 1300년대 원에 의해 중창된 후 16세기에 중수됐으며 1694년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도1동 376-5번지 일대 590평에 대한 유적발굴조사는 2000년에 이루어졌다. 특히 외도1동 376-1번지 일대에서는 건물지 12동, 도로와 보도, 탑지, 석등지, 담장, 폐와무지, 적석유구 등이 확인됐다. 또 11세기 순청자에서 18세기 중엽의 백자류, 그리고 중국의 청자와 백자 등이 다양한데 매병은 12세기 강진 사당리에서 극소수 확인되는 것으로 질과 장식, 유약 등 청자 최전성기 작품이고, 백자는 15세기초부터 16세기까지 만들어진 것이 모두 출토됐다. 이밖에도 연판문·일휘문 암막새, 연판문 수막새, 만호·목사 등의 명문기와, 평기와, 그리고 금동제품, 숟가락·젓가락 등 청동제품도 다량 출토됐다.


발굴조사를 담당한 제주대박물관 관계자는 “수정사지 유물은 지금까지 도내 사찰에서 나오는 유물 출토 상황과 비교해 가장 화려하다. 문헌상으로 14세기 이전의 기록이 나왔을 뿐 아니라 북송대의 화폐유물과 11세기 청자류의 존재로 보아 12세기경에 창건된 탐라고찰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현재상태로 수정사 전체를 복원할 수는 없지만 노출된 유구와 출토유물의 가치는 높기 때문에 발굴지만이라도 원상 복토해 보존하고, 수정사 유물을 담은 소전시관을 건립해 제주의 옛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했으나, 제주시는 이곳에서 발굴된 유구·유물을 인근지역에 옮겨 복원하고 발굴지는 당초 계획대로 동서를 가르는 폭 12m의 도로를 개설했다.

시가 수정사지를 관통하는 도로를 개설키로 한 것은 이 일대가 이미 주택이 들어서 있는 주택밀집지역으로 문화재로 지정하는 자체가 힘든데다 전체적인 사찰유구의 보전상태가 양호하지 못해 현재 발굴된 건물지 등을 그대로 이전복원하는 게 최선책이라는 조사단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제민일보 2000년 6월 16일 이재홍 기자, 2000년 12월 13일 김순자 기자) 이렇게 중요한 성과가 있음에도 도로개설과 공원으로 유적 대부분이 멸실됐다.


2007년 12월 외도동과 주민자치위원회가 복원, 배수로와 울타리를 정비한 용천수「납세미물」은 당시 수정사 스님들이 식수로 이용했던 물이다.


2000년 이전에는 옛 수정사 터에 아주 작은 절이 있어 수정사라는 이름으로 경내에 칠성각․산신각의 거대한 주춧돌들과 대웅전의 문지도리 등만 남아 있었다.(제민일보 1995년 9월 14일, 열린제주시정소식 2000년 3월 1일) 그러나 2000년 도시개발사업으로 수정사의 흔적은 완전히 없어졌고 2010년 현재 안내판 하나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어디에 옮겨졌는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교래리 돌박물관에는 수정사지 다층석탑을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다. 전시된 다층석탑은 수정사지에서 출토된 23장의 점판암제 탑재료를 기본으로, 현존하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점판암제 석탑 일명 청석탑에 근거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다.

1층 몸돌 정면에 붙였던 것으로 보이는 점판암제 판석에는 음각으로 문을 새기고 좌우에 문을 지키는 수문신장의 역할을 하는 인왕상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오른쪽의 인왕상은 연꽃을 밟고 있으며 위로 치켜든 한쪽 손에 불꽃이 표현되었고 허리춤의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 형상이다. 왼쪽의 인왕상은 일부 훼손되었으나 손에 긴 칼을 들고 있는 점이 약간 다를 뿐 거의 동일한 형태로 표현돼 있다.


돌박물관에는 수정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대형맷돌과 주춧돌도 전시되어 있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맷돌은 지름 74cm, 높이 40cm로 일반 민가에서 사용했던 맷돌에 비해 2배 정도 큰 크기이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기 위한 곳에서 사용됐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춧돌은 부정형의 현무암을 이용하여 기둥자리를 볼록하게 다듬어 만들었다. 왼쪽의 주춧돌은 길이 방향으로 하방(하방석 또는 하방벽)이 얹히는 고맥이가 표현되어 있다. 주춧돌의 크기나 다듬은 솜씨로 보면 당시 수정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위 사진에 나온 주춧돌들은 2013년 상귀리 항몽유적지 앞 잔디밭으로 옮겨졌다.


비보사찰(裨補寺刹)
《정의》도선(道詵)의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에 의하여 지정되거나 건립된 불교사원.


《배경》비보사탑설 또는 비보사상이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격변기에 도선이 불교교단을 재정비하고 나아가 전국토를 재개발하기 위하여 수립한 사상체계이다. 이 사상은 밀교사상(密敎思想)과 도참사상(圖讖思想)이 불교와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밀교사상은 신비한 주문(呪文)을 외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불교사상으로 전국토를 하나의 부처님세상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밀교사상의 택지법(擇地法)에 따라 사원과 탑 및 부도를 세우고 그곳에서 여러 부처와 보살에게 보살펴주기를 빌어서 나타난 신통한 힘으로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고 세상이 태평하기를 염원하는 도참사상은 미래에 다가올 국가와 왕실의 흥망성쇠 및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것으로, 도선에 의하면 땅의 기운, 즉 지기(地氣)는 왕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지기가 쇠퇴할 때 그곳에 자리잡은 인간이나 국가는 쇠망하기 마련이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산천(山川)의 자연스런 흐름과 변화에 어긋나거나 반대되는 곳에 인위적으로 사탑을 건립해서 쇠퇴해가는 지기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와 반대로 산천의 흐름에 어긋나게 자리를 잡거나 비보를 믿지 않고 사원과 불탑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하고 사람들이 불행하게 되는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변천》비보사탑설은 신라의 쇠망 원인 가운데 하나를 지덕(地德)의 손실에서 찾는 고려 태조에 의해 크게 신봉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뒤 고려시대를 통하여 널리 확산되어, 시기에 따라선 도선을 따른다고 내세우며 수많은 각종 비기류(祕記類)들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고려 말의 승려인 굉연(宏演)이 ≪고려국사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을 저술하여 비보사탑설을 체계화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태조는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도선의 비보사탑설에 의해 지정된 곳 이외에는 어디에도 사탑을 건립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국가적 차원에서 비보사원을 장려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한 정책 가운데 하나로 비보사원에 국가 토지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 결과 모든 사원이 비보사원으로 바뀌어가는 경향이 나타나서,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지정된 비보소(裨補所)가 3,800개나 되었다.

이와 같이 지나치게 비보사탑설이 성행하고 비보사원의 수가 너무 확대되어 고려 말기에는 불교계에 폐단을 가져왔고,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 사대부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비보사탑설은 조선 불교의 한 사상으로 수용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억불숭유정책의 엄격한 제약을 받는 것이었다. (http://yoksa.aks.ac.kr/jsp/ 한국학중앙연구원)


밀교(密敎)의 택지법(擇地法)과 음양오행설의 풍수지리에 근거한 사상으로 『고려국사 도선전』이라는 고려말의 문헌에서는 비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람이 만약 병이 들어 위급할 경우 곧장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곧 병이 낫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천의 병도 역시 그러하니, 절을 짓거나 불상을 세우거나 탑을 세우거나 부도를 세우면 이것은 사람이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것과 같은지라.”


즉 산세, 지세, 수세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그 기운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약한 곳은 필히 화가 생기므로 풍수적으로 과하거나 부족한 곳에 재앙을 막고자 세운 절이 비보사찰이다. 예를 들어 서울 삼성산에 자리잡은 호압사(虎壓寺)는 삼성산의 산세가 마치 호랑이가 사냥감을 잡아먹을 듯한 형국을 하고 있어 호랑이의 꼬리에 절을 지어 산세를 잡아두었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사상은 조선조에 들어 각 고을의 민속신앙과 결합하여 탑을 세우는 사탑비조, 숲을 조성하는 숲비보, 인공적으로 산을 만드는 조산비보, 장승을 세우는 장승비보, 연못을 만드는 못비보 등 다양한 양식으로 확산되었으며, 오늘날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 비보사찰로 알려진 유명한 사찰은 서울 관악산의 관음사, 화순 천불산의 운주사, 순천의 향림사, 남원의 선원사, 승주 선암사, 진주 용암사 등이 있다.(http://blog.naver.com/adbank/ 부적연구소)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추점(推占)해서 창건한 것이다.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것 이외에 마구 새로 지으면 지덕(地德)을 손모(損耗)해서 국조(國祚)가 영속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도선밀기 道詵密記〉에서 지정된 비보소(裨補所)는 3,800개소에 달한다. 비보사탑설을 태조가 신봉하자 이후 고려의 전 시기에 걸쳐 이 설은 크게 성행했고, 이에 따라 건립된 비보사찰은 국가에서 토지를 분급(分給)받을 정도로 신봉되었다.

그러나 비보사탑설의 지나친 유행과 국가의 혜택은 모든 사원의 비보사찰화를 빚으며 국가적인 폐해를 낳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고려말 신흥사대부들의 세찬 비난의 대상이 되면서 고려의 패망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Daum백과사전)

《작성 101004, 보완 1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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