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은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이 직접 애국가 지도..감동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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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은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이 직접 애국가 지도..감동의 도가니"
  • 강문칠
  • 승인 2020.11.0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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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문화칼럼(연재3))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본지 명예문화대기자인 강문칠 선생(작곡가, 음악평론가)이 최근 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라는 음악으로 본 제주의 역사서로 볼 수 있는 연구서를 내놓았다. 이 연구서는 그동안 제주에는 전무하다 시피한 음악의 역사를 살피고 숨어있는 얘깃거리를 발굴함으로써 제주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굴한 내용 중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제주도에 직접 내려와 제주시에서는 제일극장에서 서귀포시에서는 서귀포관광극장에서 제주시민과 서귀포시민들을 대상으로 직접 애국가를 가르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전까지는 올드랭사인 곡에 애국가를 맞춰 불렀는데 이후 현재의 애국가로 바꿔 부르게 됐다는 얘기도 새로운 내용이다. 제주도의 작곡가이자 퍙론가인 음악가가 조사한 제주도 음악사를 통해 제주도 역사를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편집자주)

 

 

(앞에서 계속)

 

3. 안익태와 제주음악

 

 

안익태

 

안익태(安益泰, 1906. 12. 5~1965. 9. 16)는 애국가 작곡가로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대학 재학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항일 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1926년 구니다치(東京都 서부) 국립학교에 들어가 첼로를 전공하고, 1930년에는 미국으로 유학 길에 오른다.


 신시내티 음악대학,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카네기 홀에서 리사이틀을 가진다. 템플대학에서는 음악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1936년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빈에서 유명한 바인가르트너(오스트리아 작곡가, 지휘자, 1863~1942)에게서 베토벤의 음악을 배우며, 지휘, 작곡 공부를 한다. 1936년 몇 년 전부터 생각해 오던 <애국가>를 작곡한다. 193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 음악학교 특별 연구생으로 들어가서 코다이(1882~1967 헝가리 작곡가)의 지도를 받는다.


 1940년 까지 비인에서 R. 슈트라우스(1864~1949.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독일)의 보조지휘;자로 있다가, 그 후에 독일,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하고, 1946년 7월 5일에 스페인 여인인 탈라베라 로리타와 결혼한다. 로리타와 사이에  3녀를 두었다. 스페인 국적을 얻고 스페인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영국, 이탈리아, 미국 등 저명한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자로 활동한다.

1959년에는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 1965년에 7월에는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1955년에 한국을 떠난 지 25년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 환상곡’을 초연한다. 1961년 다시 귀국하여 서울 음악제를 개최 하도록 하였으며, 1962~1964년 까지 서울 음악제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965년 7월 4일 런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공연을 하였고, 이후 건강 악화로 투병하다가 1965년 9월 16일에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생을 마감한다.


 死後 마요르카에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안익태 거리>가 생겨나게 되었다. 1957년 문화표장을 받았으며,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2012년 2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원한 한국문화원 내 한극 배움터에서 안익태 선생 관련 자료 전시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2012년 2월 10~11일 양일간에 걸쳐 열리는 전시회에는 안익태 선생이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사진 등 이 전시회에서는 안익태 선생의 악보 모음집, 표지 사본, 언론 기사 등이 공개가 되었다.


 특히나 서울시의 재정적 지원으로 제작이 된 안 선생의 흉상 제막식이 성대하게 거행이 되어 더욱 뜻 깊은 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코다이 선생의 미망인도 찬석을 했다고 한다. 한국과 헝가리 수교 50주년을 맞이하면서 부다페스트의 시민고원에 안익태 선생 흉상이 안치가 되었다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애국가>, <한국 환상곡>, 이외에도 <강천성악, 降天聲樂>, <진혼곡>, <논개> 등이 있고, 저서로는 <R. 슈트라우스의 전기>, <R. 슈트라우스 서한집> 등이 있다.

 

 

1)제주와의 인연

안익태 부인 로리타 여사

 

이상은 제주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을 소개한 듯하다. 개괄적으로나마 안익태 선생의 내용을 소개한 것으로 이해를 하였으면 한다. 생전의 안익태 선생과 제주의 인연은 깊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이 분을 소개하면, 아마도 왠만한 제주 출신들은 모두가 아실 분으로 유명한 김봉학(金鳳鶴, 제주출신, 재일교포, 제주은행 설립자)이다.


 그는 어느 날 일본에서 회사에서 업무가 끝나서 집에 도착하여 TV를 보다가 음악회를 진행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NHK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이가 바로 안익태, 한국 사람인 것이었다.

교향악단 지휘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김봉학씨가 감동을 받아서 TV를 보다가 즉시 공연이 열리는 공연장으로 달려가서 안익태 선생이 직접 지휘하는 모습을 감상하게 되었다.

음악회가 끝이 나서 자신을 소개하고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동질감이 생겨 그 후로 일본에서 음악회를 할 때에는 줄곧 안익태 선생을 직접 모시기도 하고 차량을 제공하기도 하였다(‘한국 환상곡’ 안익태 저 중에서 일부 발췌). 그러한 관계로 하여 안익태 선생이 제주도에 오게 된 것이다.


 1963년 1월 26일 저녁 7시, 제주시 칠성로 제일극장에서는 제주의 성인 합창단인 ‘탐라 합창단’의 공연이 있었다. 40여명으로 구성이 된 합창단을 안익태 선생이 직접 지도, 지휘하였다. 영락교회와 동부교회 교인들로서 청년들이었다. 이 합창단이 제주도 최초의 혼성 합창단이었다.

당시의 합창단 단원들은 지금은 80세의 노인이 되었다. 당시의 연주곡은 제주도 음악협회 지부장인 김국배 편곡인 ‘오돌또기’ 합창곡과 안익태 작곡인 ‘무궁화’ 등으로 제주시 칠성로 제일극장과 다음날 서귀포 관광극장에서의 공연이 있었다(1960년대의 제주음악활동에 관한 상황들을 들을 수 있는 일과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안익태 선생의 제주에서의 활동에 관해서는 이미 별세 하신, 전 제주도 문화진흥원 공연과장이셨던 임정부님께서 쓰신 <안익태 선생과 탐라 합창단>이라는 글 일부 내용과 당시의 단원들 중에서 고운봉 선생과 이청사, 이봉헌 선생 등이 제보한 내용들을 인용한 것임을 밝혀 둔다.


 탐라 합창단은 이미 1962년도 한국음악협회 제주도지부가 결성이 되고(초대 지부장 김국배선생), 합창단은 그해 9월 각 교회의 교인들로 구성이 되었으며, 이후 1970년 까지 약 9년간 활동을 해 왔다. 1962년, 1963년도에 안익태 선생을 초청하여 합창지도를 받았으며, 특별히 선생으로부터 <애국가>를 지도 받았다.


 객석을 꽉 채운 그날의 공연은 여러 가지의 어렵고 힘든 과정 속에서 안익태 선생은 전혀 망설임 없이 지휘를 해 나아갔다. 당시 공연곡들 중에는 시벨리우스 작곡의 <핀란디아 중 코러스> 부분, 김국배 편곡의 제주민요 <오돌또기>, 안익태 작곡의 <무궁화 삼천리 강산>, 헨델의 메시아 중에서 <할렐루야>, 요한 시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강>, 베토벤 곡 <신의 영광> 등 요즈음의 합창단 프로그램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 높은 곡들로 연주가 되었다.

그리고 꽉 들어찬 관객들과 함께하는 합창단 공연은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이 되었다. <애국가>를 첫 곡으로 힘차게 부르던 합창단을 잠시 멈추게 하고는 객석에 앉아서 음악회를 감상하고 있던 제주도 부지사이신 하형모님을 무대로 모셔서 객석에 모이신 제주도 도민들에게 소개를 시켜드린 후에, 관객과 부지사에게 <애국가>를 지도를 30분간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애국가>는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펼치시는 독립투사들의 심정으로, 장엄한 마음으로 힘차게 불러야 한다’고 강조 하셨다. <애국가>의 구절구절 마다 꼼꼼히 해석을 하고 주석을 붙이면서 지도를 하시는 안익태 선생을 보면서, 객석의 많은 분들이 눈물을 훔치는 장면들이 곳곳에 비추었다.

작곡가로부터 직접 <애국가>를 지도 받은 도민은 제주도민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런 자부심과 <애국가> 가사와 선율에 담긴 내용을 들으면서 깊은 감동에 젖은 흥분한 관객들이 흘리는 눈물은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전에 불렀던 <애국가>는 ‘올드랜 사인’의 가락에 가사만 ‘애국가’를 입혀서 부르고 있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도 그렇게 불렀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제주도민들에게 <애국가>를 지도하신 작곡가 안익태 선생에 관해서 이렇게 방치해서 두어도 되는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해 본다.

그 당시의 감동과 의미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제라도 행정당국에서 ㅇ러한 사실을 널리 알려서 기리는 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 다시 음악회 분위기로 돌아서 그 시간에 <애국가>를 지도를 박았던 객석에 모였던 약 7~800여명의 제주도민들에게는 깊은 감동과 당시의 장면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반주를 맡았던 M 모양은 전날 리허설 시간에 안익태 선생으로부터 피아노 반주에 관해 혹독하게 지도를 받아 혼이 난 후에, 공연 당일에는 불참을 하여 튜닝기로 모든 공연을 아카펠라(무반주)로 끝마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마도 앞에서 제시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휘를 하셨던 분이기에, 이러저러한 일들과 이 보다도 더한 일들을 경험하셨으리라 짐작을 하게 된다. 합창의 불모지요 고상한 클래식 음악을 접해 보지 못한 제주도민들, 그러나 그러한 음악에 대한 목마름이 절실하였던 상황에서 그날의 공연은 가히 놀람과 감격의 시간이었으리라,


 또한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지휘자가 단원들 앞에서 지휘를 하다가 보면 단원들과 겹치게 되어서 객석에서는 단원의 모습이 가리게 된다. 그러던 주에 객석에서 지휘자를 가리키면서 불만을 늘어 놓는다.

‘도대체 저 양반은 뭐를 한다고 화면을 가리느냐, 내가 보고자하는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의 제주도 문화의 수준을 가름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당시 단원들 주에는 4남매가 동시에 합창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혜숙, 혜실, 종헌, 봉헌(필자의 고교 시절 은사, 후에 제주산업정보대학 교수)이었다.


 이봉헌 선생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애국가’를 가르치시는데, 말씀이나 지휘하시는 움직임이 얼마나 감동을 두는지 그런 열정적인 모습에 단원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애국가>의 감정표현에 대하여 많은 감명을 받고, 그 후 교단에 섰을 때에 그러한 인연으로 <애국가>를 반 학생들에게 지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4남매가 그날의 공연에서 4중창을 했다. 합창공연 중간 부분에서 노래를 했는데, 불렀던 노래는 슈베르트의 작곡 ’보리수‘와 그와 한 곡이다. 당시에 안익태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를 전혀 몰랐던 그들은, 그 후에 안익태 선생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작곡가인 것을 한참 시간이 경과한 후에 알았다고 한다.

 

2)서귀포에서의 공연

작곡가 강문칠

 

1964년 7월 3일, 제주시민회관이 개관이 되고 그 기념으로 안익태 선생의 지휘로 탐라 합창단의 정기 공연을 마친다. 연주회 다음날은 서귀포에서의 공연이었다. 그 당시에는 제1횡단도로가 개통이 되어 있지 않을 때였다.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서회선으로 무려 5시간이 걸려 서귀포에 도착한다. 도착 즉시 피아노가 준비 되어 있지 않아서 안익태 선생이 직접 서귀포 초등학교에 가서 풍금(오르간, 피아노가 없었음)을 가지고 온다. 마차로 운반하는데, 선생께서 줄곧 운반을 총 책임자가 되셔서 직접 운반을 하셨다. 언덕바지를 무사하게 통과하여 운반을 마친다. 그리고는 분주하게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무대를 준비하고 리허설을 준비를 한다.

서귀포 관광극장

 

그의 음악적 열정과 지도는 언제나 적극적이다. 음악에 대한 사랑과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유난히 아끼고 사랑하는 눈동자가 빛나는 듯하다. 공연 시간은 저녁 영화 상연 전에 모두 끝나야 한다.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지금은 삼일극장 남쪽 터에 앉아서 서귀포 앞 바다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서귀포 시가지와 앞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였다(지금은 서귀포 회관이라는 건물이 들어 서 있다). 단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선생께서 서귀포 앞 바다를 손으로 가리키시면서 아름다움에 빠져서, ‘서귀포는 진정으로 동양의 나폴리다’라는 말을 한다. 그와 함께한 단원들은 전부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필자는 당시의 선생과 단원들 4, 5명이서 찍은 사진을 본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것을 찾을 길이 없어 아쉽게 여기고 있다.


객석(400여명)이 꽉 들어 찬 관광극장은 무대에서 안익태 선생 지휘하는 모습에 매료 되었다. 제주시와 동일한 모습으로 <애국가>를 관객들에게 작곡가로서 지도를 하시고 같이 불렀다. 안익태 선생이 제주(제주시와 서귀포)에서 탐라합창단을 지휘하신 기록은 세밀하게 남겨 있지는 않지만 무대에서 공연을 하신 탐라합창단 단원들과 음악회를 감상하신 관객들 일부분이지만 직접 그 날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는 닳아서 지붕이 없는 채로 덩그러니 벽채만 서 있는 서귀포 관광극장. 그러나 지금에도 작은 공연은 계속 열리고 있다. 벽들은 제주 현무암으로 건축이 되어져 있으며, 현무암은 소리를 잘 공명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공연장의 벽을 메운 돌이 제주 현무암이라고 하는데, 현무암이 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에 객석에서 감상하시는 관객들이 소리를 잘 들을 수가 있다고 한다.

때문에 지붕이 없는 관광극장에의 울림은 지금에도 공명이 잘 되는 것이다. 현무암으로 만등어진 공연장은 이곳 말고 제주시에 있는 제주도 문예회관이다. 이 건물은 1985년 11월 5일에 건립하여 1985년 7월 19일에 착공 하였다. 1988년 8월 25일에 개관하였다.

이 건물을 지었던 김홍식(전,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님을 서울에서 만나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제주도 문예회관의 벽체가 제주도 현무암으로 건축이 되어서 음향이 전반적으로 좋다’라는 평을 받고 있다 라고 말했다. 제주도에 있는 음악을 감상하는 장소로서 제주더 현무암으로 건축이 된 건물은 제주도 문예회관과 서귀포 관광극장이 아닐까?


 이곳에는 현재 바로 이웃하여 이중섭 미술관과 이중섭 거리, 솔동산, 문화의 거리, 공방, 1km안으로 소암 현중화 기념관, 구 서귀포 시가가 있으며, 오늘도 유명한 예술인들이 활보하며 걷는 거리이기도 하다. 작가의 산책길도 운영을 하고 있고 특색 있는 문화의 거리로 변모하기 위하여 시도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이 서귀포의 문화 예술이 피어나는 곳으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필자는 행정당국에 요청을 드리고자 한다. 제일 시급한 것은 하루 속히 관광극장을 서귀포시에서 매입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곳에 200~300석 규모의 실내, 야외 공연장을 만들고, 공연장 이름을 안익태 공연장으로 명명하자는 것이다.

이중섭 미술관과 연계하여 공연장과 미술관이 함께 어우러지는 相生의 문화의 가치를 높이자는 것이다. 현재는 폐가처럼 되어 버린 장소이지만, 언젠가는 서귀포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공연장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기대하고 학수고대(鶴首苦待)를 하는 마음이다.


 이곳 서귀포 관광극장에서 <애국가> 작곡가이신 안익태 선생께서 서귀포 시민들에게 직접 <애국가>를 가르치시고, 탐라합창단을 직접 지휘를 하신 흔적들을 약 50여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밝히고, 이러한 역사가 제주도민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지기를 바란다.

 

 

(이 기사 계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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