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소령, 열성적으로 교악대 활동 지원.. '관악운동의 메카'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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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소령, 열성적으로 교악대 활동 지원.. '관악운동의 메카' 계기
  • 강문칠
  • 승인 2020.11.1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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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문화칼럼(연재5))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본지 명예문화대기자인 강문칠 선생(작곡가, 음악평론가)이 최근 한라산 속의 음악은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까? 라는 음악으로 본 제주의 역사서로 볼 수 있는 연구서를 내놓았다. 이 연구서는 그동안 제주에는 전무하다 시피한 음악의 역사를 살피고 숨어있는 얘깃거리를 발굴함으로써 제주도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굴한 내용 중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제주도에 직접 내려와 제주시에서는 제일극장에서 서귀포시에서는 서귀포관광극장에서 제주시민과 서귀포시민들을 대상으로 직접 애국가를 가르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전까지는 올드랭사인 곡에 애국가를 맞춰 불렀는데 이후 현재의 애국가로 바꿔 부르게 됐다는 얘기도 새로운 내용이다. 제주도의 작곡가이자 퍙론가인 음악가가 조사한 제주도 음악사를 통해 제주도 역사를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편집자주)

 

(앞에서 계속)

 

 

한라산과 제주도 음악사회의 관계

 

작곡가 강문칠

 

제주도의 음악사는 제주시의 음악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 얘기는 그만큼 제주시가 제주에서 차지하는 음악활동만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전부라고 말할 정도이다. 이것은 비단 음악분야 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제주시의 중요성이 그만큼 대단하다고 보아진다.

1950년대부터 바라보는 제주시의 음악은 제주의 모든 지역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제주의 모든 지역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변화의 속도와 규모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재정적 뒷받침 또한 발전과 성장을 하고 있다.

 

1)1950년대~1960년대의 제주음악

이 시기는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해 있던 시기이다. 군·관·민이 4·3 사건과 6·25 전쟁으로 도민들의 분열에 따른 화합을 강조하면서 일본 군가 일색으로 행사가 추진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國歌로 사용한 음악도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랜 사인’가락에 맞추어 불렀으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새 나라의 노래’ 공부와 ‘새 나라의 노래 집’ 등 부종휴, 고봉식에 의해 엮어져 나왔으며, 이러한 곡들도 외국 노래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서 사용했을 정도이다.

1946년 본도 최초의 제주중학교 15인조 교악대가 김국배에 의해 발대를 하게 되었는데, 이 악대는 제주음악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948년 3월경 제주북초등학교 교정에서 음악회가 열렸는데, 그것이 광복 이후 제주에서는 첫 번째로 열린 음악회이다. 1949년 1월 4·3 폭동 진압을 위한 民心純化라는 목적으로 선무공작대가 발족이 된다. 음악계에서는 김국배, 고봉식, 드이 주축을 이뤘으며, 제주역도 합창단에는 이기형, 김종철이 작곡한 先務歌가 보급이 되어서 대중화의 계기를 열어 주었다.

1960년대 제주도의 음악문화는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으로 인해 피난민들이 본도에 입도한 도외 음악인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계정식, 이성재, 이성삼, 변훈, 박제훈, 김금환, 고희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음악활동은 제주의 음악을 한단계 끌어 올리는 계기가 된다.

1952년 5월 제1훈련소(모슬포)가 주최한 전도학생 음악 경연대회가 남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교회에서는 피난민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성삼(후에 경희대 음대 교수로 재직)이 합창단을 조직하는데 이것이 제주의 합창을 연주하게 된 시초가 된다.

1954년에는 본도의 최초의 예술제가 오현고등학교 주최로 열렸는데 여기에서는 음악경연 대회도 포함이 되어 도내의 음악 학도들에게 희망과 도전의 기회를 갖게 하였다. 1956년 문총(문예총연합회) 제주도지부가 결성이 되고, 문총이 주최하는 제주문화제에 음악경연대회가 포함되어 도내의 음악활동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연합뉴스에 보도된 길버트소령 송년음악회(사진=오현고등학교 홈페이지)

 

한편으로 20인조로 구성이 된 제주경찰악대가 결성이 되었으며, 이미 40인조로 활동을 하고 있었던 한국보육원 악대(지휘 한경화)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음악대학 교수인 길버트(Chares E. Gilbert) 소령이 제주도의 C·A·C사령관으로 부임해 옴에 따라서 제주중학교, 오현고등학교에 신호나팔 3대를 기증하면서 도내의 각 고등학교의 교악대 창설을 촉진 시키는 결과를 갖게 되었다.

길버트 소령은 열성적으로 교악대의 활동을 지원하였고, 지휘법, 교악대 지도법을 강의 하면서 후에(제주국제관악제와 같은) 실질적인 관악운동의 메카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오현고의 악대는 1951년 고봉식 지도로 40인조 악대를 창설하고, 2년 뒤인 1953년 11월에 진주에서 열린 개천 예술제에 참가하여 최고상을 받았다. 이 일은 제주도 역사상 도외의 음악 경연대회에서 처음으로 입상했다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그 후에도 해마다 개천예술제에 참가하여 진주와 제주 간의 음악으로 결연하는 사업을 수행하게 된다.

진주의 예총에서는 오현단(현재는 오현고 음악관 정원에)에, 진주에는 촉석루가 있는 진주공원 내에 예술 기념비를 세웠다. 이러한 교악대 활동은 후에는 제주시 뿐만 아니라 전도에 걸쳐서 교악대 창설 보게 된다. 제주농업고(현재는 제주고), 제주여고, 서귀중, 세화고, 표선중, 중문중, 함덕중, 제주일고, 제주상고(제주중앙고), 대정고, 서귀농고(서귀산과고), 제주여상, 남녕고, 한림공고, 제주사대부고, 제주해양고 등이 창설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제주도내의 각급학교에 교악대가 창설이 되고 교악대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짐에 따라서 도내의 음악사회는 자연스럽게 관악인이 많아지고, 현재관악 분야만큼은 전국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있다.

제주시의 음악사는 서두에서도 거론한 것처럼 제주도 음악의 역사라 보아도 지나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음악협회활동이나 학교 활동들이 전도가 하나로 수행을 하고 있었으며,화동 무대, 인적, 물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기에 당연히 제주도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던 시절인 것을 이해를 해야 한다.

한편, 합창활동 분야를 거론하면, 1950년대 후반에 김국배가 지도하는 제주여자중,고와 정남혁이 지휘하는 신성여고 합창단은 도내의 합창 활성화에 기여한다. 1962년 한국음악협회 제주도지부가 결성이 도면서(지부장 김국배), 성인으로 구성이 된 탐라합창단이 조직이 된다.

그 후 1963년과 1964년도 두 차례에 걸쳐서 안익태를 초청하여 애국가와 가창법 지도를 받고 합창연주를 안익태의 지휘로 공연을 하게 된다. 제주시내 칠성로 제일극장과 서귀포 관광극장에서 합창공연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당시 참가했던 단원들은 그때의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안익태의 음악적 사랑과 열정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많 배웠어야 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1964년도에 김국배는 제주민요 <오돌또기>를 채보하여 전국에 알린 공로로 제주3회 제주도 문화상을 받게 된다. 1967년에는 서울 중앙여자고등학교와의 교환 연주회가 제주시민회관에서 있었다. 1968년도에는 제주여고와 서울 보성여자고등학교 간 교환 연주회가 있었는데, 보성여고는 관현악단으로, 제주여고는 관악 합주단으로 구성이 되어 연주회를 가졌다. 이때의 보성여고의 관현악 연주는 제주도에서 최초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제주도의 음악사회는 초보자의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으로서 음악예술의 입장에서 제주도 내의 음악사회의 수준은 아직도 미개척자의 상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1970년대의 제주 음악사회

1969년 제주출신 성악가(바리톤) 변성엽 독창회가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오현고 교악대가 진주 개천예술제에서 연 15회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그 단이 국내의 음악사회 분위기는 건전가요 부르기로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이다. 마땅히 부를 노래라고는 대중가요 일색이었는데, 전국적으로 전석환이 주도하여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건전가요 부르기는 청소년과 젊은 세대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끄면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 왔다.

제주에서는 고경화와 임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고운 노래 부르기’ 운동이 제주 YMCA 강당에서 매주 토요일에 개최가 되어 도민들의 정서함양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이윤행, 임정부에 의하여 진행이 되는 금요 음악 감상회가 로터리 음악 감상실에서 매주 열렸다. 초청 가곡 발표회와 제주여자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이 된 비바체 중창단이 결성이 되어 학생들의 성악이나 중창활동을 착실하게 진행하면서 제주의 음악활동은 이전과는 다르게 수준면에서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운동들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예그린 악단(한국 최초의 뮤지컬 악단)의 제주공연(1969년), 제주민속 예술단과과 서울 시민회관에서의 합동 공연(1971년 8월), 문공부 주최 전국 건전가요 대회에서의 제주 YMCA 중창단의 장려상 및 하모니 중창단의 2위 입상 등이 이어지면서 제주의 음악은 관악 중심에서 서서히 합창이나 성악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기 시작을 한다.

1970년대의 제주음악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각 분야의 의욕적인 운동들이 일어나게 된다. 일부 뜻을 갖는 단체나 기관들이 후원을 하는 현상들이 일어나면서 음악단체의 창단과 다양한 연주회를 통하여 그야말로 제주 음악사회는 음악의 약동과 발전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1972년 2월, 제주 YWCA 어머니 합창단, 제주YMCA GLEE 클럽, 돌체 칸토 합창단(서귀포), 꽃그네 소녀 합창단(서귀포) 등이 창단 되었고, 1973년에는 한국관악대 지도자협회 제주도지부(지부장 고봉식)가 결성 되었다. 이후 제주시를 비롯하여 전도에 하나 둘씩 교악대가 창설되었으며, 각 학교에서는 해마다 정기 연주회를 통하여 관악을 하는 학생들의 기량이 날로 향상이 되어졌다.

제주도 음악의 장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관악활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합창활동이다. 반면에 현악과 성악, 작곡, 피아노 분야는 아직은 절대적 열세를 면치 못한다. 독주나 독창 분야 보다는 합창, 합주 분야가 활성화가 이루어졌다. 1968년 신성여자고등학교 3학년인 고은자가 이화여대 전국학생 음악경연대회에서 피아노 부문 2위에 입산을 하는 쾌거를 이룬다.

1970년 오현고 강문칠은 호남 예술제에서 최고상에 입상함으로 해서 제주출신들이 개인 기량 면에서도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1973년 6월 군악대 근무 중에 휴가를 나온 사이를 이용하여, 제남신문사(서사로 근처)에서 클라리넷 독주회를 열었다.

그것은 제주 출신 최초의 리사이틀이었다.1970년대 부터 제주출신들이 육지부의 음악대학으로 진학을 하면서 제주의 음악이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까지만 해도 제주도 내의 음악회장 사정은 초등학교 학예회 발표의 장소와 같은 수준이었다.

 

3)1980년대의 제주음악사회

제주의 음악사회는 1980년대에 들어서서 많은 발전을 하게 된다. 가장 의미있는 것은 제주대학교 사범대학에 음악교육과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음악교육과이지만 제주도 음악사회가 이 학교에 대한 기대는 음악전문 교수들과 학생들이 제주도내의 음악분야를 충분히 발전시킬 것이라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교육과에서 가장 먼저 효과적인 결과는 현악에 대한 것이었다.

바이올린 전공 교수인 김인규는 제주실내악단 창단과 아울러서 제주의 교향악단과 실내악에 활동에 필요한 현 파트를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재 제주시립교향악단의 현 파트 단원들은 그의 제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제주대학교에 음악과 싱설이 되면서 그동안 제주의 예술활동이 문학과 미술에 치우친 감이 있었던 것이 이제는 제대로 된 음악활동들, 즉 음악예술에의 가치를 지니는 음악회가 순ㅅ구 제주도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로 발전과 성장을 가져 오게 된다. 아울러서 앙상블과 관현악 합주, 피아노 트리오와 함께 실내악 운동이 일어나면서 제주는 작곡분야를 제외하고 음악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실현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제주시립 예술단(교향악단과 합창단)이 1985년도에 창립하면서 전문 연주 단체가 제주의 음악계를 이끌게 되었다. 제주시립교향악단은 이미 1982년도에 탐라관현악단이라는 단체로 활동을 하다가, 1985년 3월 22일 제주시립 합주단(지휘자 이선문), 후에 교향악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어서 4월 29일 제주시립 합창단 (지휘자 이춘기)이 창단하게 되는데, 양 단체는 제주음악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제주음악예술의 확산과 장려의 의미를 함께 이끌어 나가야 하는 사명과 책임 그리고 도민들의 기대를 안고 출발을 한다. 제주시가 시립 예술단을 창단하기 까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당시의 창단은 지휘자와 함께한 단원들의 노고와 피와 땀에 의해서 가능했다고 본다.

현악을 전제로 하는 교향악단은 이미 제주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현악담당 교수이신 김인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 봐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합창단 역시 전공자들 없이 애호가들과 음악교육과 재학생들로 이루어졌으며, 비상근 단원으로서 열악한 예산으로 연습실 없이 전전하는 경우가 했다.

일주일에 2회 정도 그것도 저녁 시간을 이용해야 하는 이름만 전문단체일 뿐 이에 상응하는 절대적인 조건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연습과 활동 그리고 많은 행사에 임하기는 여간 힘이든게 아니다. 정기연주회나 기타 공연들도 연 3회에서 5회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오늘날 30여회 연주회를 갖는 단체로 성장하기 까지 초창기의 지휘자와 단원들의 노고가 참으로 컸다고 한다.

이제 제주도의 음악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부족하고 요원한 것이 사실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반드시 그렇지마은 않았다. 1986년 6우러 KBS 제주방송총국이 전도 학생을 대상으로 피아노 경연대회를 시작한 이래 점차로 음악 전 장르로 넓혀 경연대회를 시도하였다. 해마다 실시하는 이 경연대회는 제주의 학생들에게 기능을 향상 시키는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이 대회는 2,000년 초 까지 계속이 되다가 끊겼지만 이 대회는 실로 제주음악학도들에게 기량을 향상 시키는 좋은 대회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제주문화방송이 주최한 ‘가곡의 밤’이 1980년 대에 들어서서 봄과 가을을 맞이하여 계속이 되었는데 이 행사도 제주의 성악 발전과 가곡 사랑이라는 측면에 혁혁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작곡 분야에서는 제주출신으로서는 최초로 대학생 신분으로 1980년 1월(당시 계명대 재학 중) 조영배(후에 제주교육대 재직)가 작곡 발표회를 가졌으며, 1987년 2월 강문칠(후에 제주관광대 재직) 작곡 발표회와 7회의 가곡 발표회를 가졌다. 제주출신 작곡발표회를 갖는 것은 제주 음악계로서는 대단한 의미를 둘 수 있으며 창작분야의 활발한 운동과 노력들이 점차 제주의 문화와 정신을 담아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988년 제주도 문예회관이 완공을 보게 되면서 제주음악활동과 수준 향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800여석으로 꾸며진 이 회관은 그동안 시민회관과 학생회관에서의 공연에 비해서 음악회를 감상하는 분위기를 대폭 끌여 올렸다. 이전에는 시민회관과 학생회관은 음악회장으로 요구가 되는 것들에 합당하게 충족이 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무대에서 음악회를 진행하는 입장에서도 감상자들에게 합당하게 요구를 충족 시켜드리지 못하는 음악회가 상당수가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문예회관 건립이 제주음악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2,005년도 통계를 보면, 문예회관 활용도는 연간 300회를 대관할 정도로 이용도가 많다. 그만큼 제주의 음악사회가 날로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그 후에 학생문화원과 한라아트홀, 등 2곳의 공연장이 생겨나서 공연문화가 급성장하고 있음을 증대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1980년대 말 까지 제주음악계의 활동은 연간 50여 차례의 공연 횟수를 보여 주었으며, 순수 제주출신이거나 제주지역 거주자들에 의한 공연은 30여 차례 정도였다. 음악의 수준은 아직도 음악예술이라는 관점에서의 평가보다는 음악의 정상화와 고급화를 위한 정립과 활발한 발표 무대를 위한 노력들이 지속이 되는 시기였다. 음악의 각 장르들이 활발한 모임과 문예회관 완공으로서 제주음악의 미래를 훨씬 밝게 해 주고 있다.

 

(이 기사 계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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