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윤 전 국회의원, ‘열린시학’한국예술작가상 수상 등단..‘수국’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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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 전 국회의원, ‘열린시학’한국예술작가상 수상 등단..‘수국’외 9편
  • 김태홍
  • 승인 2021.01.12 1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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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 (전 국회의원)시인
김재윤 (전 국회의원)시인

김재윤 전 국회의원이 ‘열린시학’ 2020 겨울호에서 제10회 한국예술작가상을 수상하며 ‘수국’ 외 9편이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눈 내리는 방

“어머니는 새로 산 시계를 형님 팔목에 채웠다

마당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형님이 읽었던 책을 태웠다

등에 업힌 눈이 하염없이 훌쩍였다

아무 말 없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형님이 입었던 옷을 태웠다

등에 눈물로 끌 수 없는 불이 번졌다

날도 추운데 왜 나오셨어요

날이 춥다 어서 방으로 가자

형님 제사가 끝난 뒤

촛농 묻은 촛대를 몇 번이고 닦았다

남아 있는 책들

어머니는 탁상시계 태엽을 감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눈 내리는 방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의 밀도는 ‘방’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시인 스스로 생각을 만들기까지의 과정, 곧 형의 부재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눈 내리는 방’은 형님이 떠나간 방에 남겨진 동생인 시적 화자와 어머니의 모습이 아주 정갈하게 묘사되고 있다.

김재윤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나이가 든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를 쓴다고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시인은 얻는 것이 잃는 것이고 잃는 것이 얻는 것이라는 걸아는 사람입니다. 욕망이 나를 갉아먹어 나 ‘없음’과 사랑이 나로부터 샘솟아 나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살려고 시를 쓰고, 죽어라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지엽ㆍ유성호 심사위원은 심사평에서 그의 시를 사물의 내면과 치유의 존재로서의 시로 평했다.

심사위원들은 “섬세함과 동시에 따사함이 묻어나는 시 정신에 사물의 본질에 다가 앉으려는 진지한 노력과 궁구窮究의 정신을 볼 수 있다”며 “김재윤의 시는 서정시가 개인적 경험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생의 이치를 노래하는 양식임을 선명하게 알려준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시인의 시 쓰기는 느끼는 정서의 순간 포착이 단순한 창조 행위가 아니라 치유와 성찰의 과정을 거쳐 존재론적인 구경에 닿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처럼만에 좋은 시인을 발굴해 냈다고 생각한다”며 시인을 격려했다.

한편 김재윤 시인은 제주도 서귀포시 출생. 탐라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제17,18,19대 국회의원. 현재 세한대학교 석좌교수다.

수국水菊

수도원 담장의 안과 밖은 함께 있습니다

수도승의 기도는 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기도하는지 기도하지 않는지

기도인지 기도가 아닌지

기도마저 잊어버린 기도는

온종일 그대에게 가 있습니다

왼쪽 뺨을 맞고 오른쪽 뺨을 내밀고

목숨마저 내어놓은 기도는 기도를 떠나 침묵합니다

오늘도 나의 기도는

기도로 버티는 그대 곁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시詩

하얀 목련꽃 핀 날

그대 위해 집자한 문장을

봄볕에 말립니다

오래된 문장에 쌓인 먼지를 털며

시간을 놓습니다

수도원 묘비처럼

가지런히 줄 서 있는 문장 사이를

아무리 톺아봐도

그대 사랑

보이지 않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핀셋을 들고

몇 번을 집어도

그대 숨결

잡히지 않습니다

여러 해, 여러 달, 여러 날, 여러 시간을

한 문장이 울고 있습니다

 

형님이 다녔던 대학에서

형님에게 보낸 우편물이 도착했다

의문사로 세상을 떠난 형님의

대학원 등록금을 찾아가라는

통지문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등록금이라도 대학에 두고 있어야

형이 공부를 할 수 있다며

찾아오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셨다

서울에서 재수하던 나는

어머니 옷장 깊숙이 놓여 있는 통지서를 꺼내

서울로 왔다

대학 정문 앞에 도착하자

발이 자꾸 머뭇거렸다

학교 정문 앞 건물 지하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늘 우유를 주문했던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탁자 위에 놓이는 순간

조안 바에즈의 “The River In The Pines”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에 따라

사물들이 하나하나 멈춰섰다

한 장면씩 한 장면씩 정지됐다

모든 게 멈췄다

그 노래를 켠 커피숍 주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계산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나도 정지되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 계좌로 등록금을 입금한 뒤

공중전화로 어머니께 전화했다

벽에 걸린 형님 사진이 담긴 액자와

어머니 사이로 강이 흘렀다

 

분꽃

허깨비가 만든 방에 갇혔습니다

허깨비 시간을 허깨비들과 함께 걷습니다

허깨비가 주관한 연극에 출연합니다

주연입니다

나는 허깨비가 되고 허깨비는 실재합니다

허깨비가 짠 일과표에 따라

헛둘헛둘 구령에 맞춰 출근합니다

마법이 공기에 녹아듭니다

가뭄에 시드는 분꽃에 물을 주기 위해

마당으로 나가다 문턱에 걸려

마른 땅에 물을 쏟았습니다

물을 쓸어 담는 손이 눈물을 흘립니다

허공을 휘젓는 나의 손은 허망하고

태양은 나의 몸을 칭칭 묶습니다

정신을 잃은 마법의 책이 불이 번집니다

오후 4시, 의식을 회복한 나는

화장을 하고 외출을 합니다

바다로 갑니다, 어머니 몸에 사는 바다로 갑니다

날마다 탄생하는 바다로 갑니다

어제는 어제, 오늘은 오늘, 내일은 내일이지만

그날 바다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피였습니다

지난 생의 허물

이 생에서 갚느라, 이 생이 힘겨워도

저 생에선 행복할 수 있다기에

견딜 수 있다지만

견딜 수 있을까요

나에게 마음껏 화를 내요

다른 사람에게는 화를 내지 마요

그대가 떠난 후

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을 걷습니다, 그냥 걷습니다

낙타도 사람도 밤을 기다립니다

새까맣게 타버린 가슴에 마법처럼 분꽃이 피었습니다

이불을 덮어 줘요

자장가를 불러 줘요

분꽃이 힘을 내어 지구를 낳습니다

 

어느 멧돼지의 외침

밥 한 끼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어요

사람들이 난리 쳤어요

한 사람은 쟁반 들고, 한 사람은 의자 들고

어떤 사람은 식칼까지 들이댔어요

그것도 모자라

112에, 119에 신고했어요

경찰이 오고, 소방차가 오고

뒤늦게 시청에도 전화했어요

급히 바리케이드 치고, 시가전을 전개했어요

탕! 탕!

나는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었어요

그저 밥 한 끼 먹으로 갔을 뿐인데

머리에서 발끝까지 먹어 치우는 그들의

버르장머리 고치러 간 것도

우리 곳간 턴 그들에게

생존권 보장하라 시위하러 간 것도

아닌데

 

각하의 코미디 1

어이, 김 실장

혁명은 말야 성공해도 불안, 실패해도 불안해

골머리 아픈 일이 한둘이 아니야

어이, 웃기는 일 없어

각하, 뽀빠이 어떨까요

군인 정신이 투철한 코미디

좋아 아주 좋아

뽀빠이 위치 추적해

방송 출연 중이랍니다

데려와

방송국에 들이닥친 밤, 선글라스 낀 총

어이, 뽀빠이 님 잠깐 같이 가시죠

시금치 없어 이빨 닥닥거리는 뽀빠이

짚차 타고 도착한 근무 중 이상무인 건물

지하 벙커 회의실 문을 열자

일제히 쳐다보는 부동자세의 눈

각하의 한마디

어이, 뽀빠이

웃겨 봐!

 

내 인생의 방

조증과 울증 사이의 방

새끼고양이가 방으로 들어오면

웃음이 나고

새끼고양이가 방을 떠나면

눈물이 나네

애틋할수록 점은 선이 되고 태양을 잉태하고

우울할수록 달은 선이 되고 점이 되고 사라지네

분에 넘친 상처는

분별없는 분별로 빈방을 안아주고

가난한 사귐은

하루 종일 세상을 찬방에 가두네

무서워하지 마, 영혼

놀라지 마, 사랑

조증과 울증 사이, 검붉은 방

 

어머니의 손

초등학교 입학식 날 어머니는 내 손을 꼬옥 잡아 주셨죠

키가 크고 또 클수록 어머니 손을 잡는 게 어색했어요

한동안 어머니 손을 잡지 못했죠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의 손을 잡았어요

여든 여섯 살이 된 어머니의 손

어머니 손을 펴보니

어머니 손바닥에 별이 가득했어요

수많은 세월이 별이 되었어요

무정한 세월과 다투지 않고

이 언덕 저 언덕을 쌓았어요

세상과 싸우지 않고

세상을 그저 살았어요

빛도 어둠도 함께 살았어요

별이 되어도 여전히 아픈 손

여전히 슬퍼도

한결같이 빛나는 손

 

아버지의 등

사는 게 고생이지

먹고 사는 게 다 고생이지

고생 안하고 사는 인생 어디 있을까

고생보다 명이 길어 여기까지 왔네

다 지나갈 건데 붙들 건 뭐 있나

다 지나갈 일인데 싸울 게 뭐 있나

팔은 새처럼 가볍고 다리는 후들거리네

같이 산 고생도 이제 정들어

차마 보낼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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