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묻지 말라 갑자생'들 혹사당한 현장..해안동 어승생오름갱도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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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묻지 말라 갑자생'들 혹사당한 현장..해안동 어승생오름갱도진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1.18 0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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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조금만 늦게 끝나게 됐더라도 어승생 일대는 제주 사람들의 처절한 죽음터로 변할 뻔..

해안동 어승생오름갱도진지

•위치 ; 제주시 해안동 어승생오름 8부 능선
•유형 ; 전쟁 유적
•시대 ; 일본강점기

노형동_어승생오름교통호2

 

노형동_어승생오름갱도진지입구

 


결7호 작전에 따른 일본군 토치카 설치 공사에는 징병된 제주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임씨는 가파도 출신으로 1944년 21세 때 동향의 청년들과 함께 대정읍에 있는 ‘조선청년특별연성소’에 강제 입소됐다가 징병당하여 이 곳 공사에 동원되었다. 임씨의 기억으로는 당시 공사 현장의 천막이 여러 개였던 것으로 보아 노무자만도 4-5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시멘트와 모래, 자갈 등을 지금 어리목 산장이 있는 곳에서부터 산 정상까지 등짐으로 져 날랐습니다. 한 끼 식사는 두 숟갈의 밥과 단무지 두 쪽이 전부였습니다. 밤에 배가 고프면 도망갈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 사는 게 아니라십주.”


일본군은 어승생에 나선형 터널을 파고 정상의 토치카에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임씨는 이 공사가 터널을 판 게 아니라 산을 깎아 교통호를 만들고 갱목을 얹어 그 위에 흙을 덮어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단 뽑은 나무도 공사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다시 심었다고 한다. 임씨는 갱목 위에 흙을 덮고 나무를 심는 작업을 하던 중 광복을 맞아 중단했다고 한다.


어승생오름 갱도진지는 조선인 징병 1기생인 '묻지 말라 갑자생'들이 혹사당한 현장이다. 봉오리 정상과 관통하는 수직동굴이 트이는 순간, 천황폐하 만세, 도리대부대 만세라며 충성심이 들끓은 환호성으로 오름은 놀랬다. 축제급식으로 나온 고기국과 팥밥으로 허기를 달래니 이내 부모형제가 그리워지더라(허경화옹)는 증언이 있다.(제민일보 2005년 2월 1일)


어승생 8부능선 부근에는 미로의 지하요새가 일본군의 당시 결전의도를 증언해 주고 있다. 임씨는 지하요새 공사에는 주로 전남 등 육지부 노무자들이 끌려와 동원되었다고 한다. 비밀 유지를 위해 터널을 파는 장소도 서로 모르게 했고, 내부의 주요 시설은 조선인에게는 시키지 않아 임씨도 요새 전체의 생김새는 모른다고 한다.(제민일보, 4328년 8월 15일, “濟州의 日軍 진지”)


어리목산장 채 못 가서 길 왼쪽에 물이 흐르는 어승생악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일본군이 식수로 사용했던 샘물이 나온다. 흙모래가 퇴적되어 거의 메워졌지만 조그맣게 담을 쌓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높이 1.5m 길이 70m의 교통호가 골짜기를 둘러싼 형태로 남아 있다.

교통호는 두 사람이 걷기엔 좁은 듯한 폭이고, 잔돌을 이용한 석축으로 군데군데 무너져 있으나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지하요새는 교통호의 양쪽에 입구를 두고 있다. 동쪽의 지하진지는 높이와 너비가 2m 규모이고 굴을 따라 30m쯤 가다 보면 내부가 4-5m로 넓어진다.

교통호 서쪽의 지하요새 입구는 빗물 등에 의하여 흘러든 흙으로 쌓여 거의 막혀 있다. 진입 갱도를 따라 30m쯤 내려가면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지하미로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여러 갈래의 굴들은 7개의 원형굴을 서로 돌아갈 수 있게 설계됐다.

굴 속에서는 갱목으로 쓰였을 썩은 목재와 그것에 박혀 있는 꺽쇠가 발견되기도 하고(sbs 『그것이 알고 싶다』“1945년 결7호 작전의 비밀”. 1993년 방송), 군수용품으로 보이는 철재들이 수집되고 있어 이 굴이 군수품 보관 창고로 쓰였을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일본군의 옥쇄작전


어승생의 거대한 지하요새는 미군 상륙시 일본군의 지휘본부가 들어가 최후의 결전을 벌일 장소였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세운 ‘일본본토방어작전’을 “결□호 작전”이라고 하는데 이는 연합군의 예상 진격로를 7곳으로 설정하고 그 진격로를 막는 작전이다.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한 제주도에서의 작전이 ‘결7호작전’이라는 것인데, 종전 직후 일본군 장교 두 사람이 작성한 『조선에서의 전쟁 준비』라는 책에 보면 “……濟州島に對する作戰準備の促進は最大の急務とな……”라는 귀절이 보인다.

1945년 4월초, 일본대본영 회의에서는 미군이 제주도를 거점으로 큐슈 북부를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고 미군의 제주도 상륙 시기를 8월 이후로 예상하여, 2-3개 사단을 제주도에 증강하여 제주도를 사수할 사령부를 신설하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독력으로 제주를 사수할 것을 명령한다.(sbs 『그것이 알고 싶다』“1945년 제주 결7호 작전의 비밀”. 1993년 방송) 이 작전에 의하여 일본군 최후의 지휘 본부를 이 곳에 설치한 것이다.


특히 일본군은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게 되면 주민들을 산중으로 데리고 들어가 군과 행동을 같이 하도록 계획을 세웠었다. 이 같이 주민을 옥쇄 작전에 동원한 예는 유황도나 오끼나와 등에서 이미 현실로 나타나 있다.

1945년 4월에 오끼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3개월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오끼나와를 점령했는데 이 때 사망자 20만명 중에서 민간인이 12만2천명이었다.(sbs 『그것이 알고 싶다』“1945년 결7호 작전의 비밀”. 1993년 방송)


미군의 조선에 대한 비밀 정보 문서인 G-2 보고서에는 종전 당시 제주도내 일본군이 5만8천320명이라 기록되어 있고, 『조선군개요사』에는 서기1945년 1월에 1천명이던 제주도 주둔 일본군이 8월에는 7만5천명으로 증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20만명 정도였음을 생각해 보면 제주도에는 그야말로 일본군인들로 가득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연합군이 상륙했다면 제주인 20만과 일본정규군 7만 그리고 미군2-3개 사단이 뒤섞여 엄청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조금만 늦게 끝나게 됐더라도 어승생 일대는 제주 사람들의 처절한 죽음터로 변할 뻔했었다. 지금은 무심한 박쥐들만 낯선 방문객을 맞아 놀란듯이 휘돌아다녀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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