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잃어버린 마을 -어우눌-..오라2동 어우눌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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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잃어버린 마을 -어우눌-..오라2동 어우눌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1.20 0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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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마을의 윗지경(민오름 북쪽 일대) 서쪽에는 어우눌, 동쪽에는 해산이 마을이 나란히 있었다

오라2동 어우눌마을터

 

위치 ; 제주시 오라2동 3199번지 일대 연북로 ‘어우눌’식당 주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없어져 버린 마을 터

 

오라동_어우늘표석

 

오라동_어우늘마을터

 

연미마을회관 앞에서 남쪽으로 난 길로 500m쯤 가다보면 조설대가 보인다. 그 곳에서 남쪽으로 50m쯤 가면 표석을 볼 수 있다.

150여 년의 설촌역사를 지닌 ‘어우눌’은 연미마을과 이웃한 작은 마을이었다. 이(李)씨가 먼저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한때는 문음서당(文陰書堂)이 있어 유학자들에 의해 교육이 행해지기도 했다. 김병효 구장을 비롯 이규섭, 이순방, 이순일 등 25여호에 130여명의 주민이 살았던 마을이다.


그러나 1949년 1월초 군경의 초토화작전을 만나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주민들은 일부 해변마을로 피난갔으나 대부분의 주민들은 인근 야산에 임시 몸을 숨겨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가는 고단한 피난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더러는 토벌대에 발각되어 희생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1949년 봄, 귀순공작에 따라 귀순하게 된다.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귀순권고삐라를 보고 귀순한 주민들중 젊은이는 무자비한 고문취조를 당하고 육지형무소로 이송되는 등 숱한 고초를 겼었다.

4․3의 과정을 통해 이곳 주민 13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잿더미로 변한 연미마을은 뒤늦게 재건이 됐지만 연미에 딸린 작은 마을이던 ‘어우눌’은 끝내 복구되지 못했다.


< 어우눌과 해산이> 4․3 당시 초토화작전에 따라 불타 없어진 마을 ‘어우눌’과 ‘해산이’는 오라리 연미마을에 속했던 자연마을이다.

연미마을의 윗지경(민오름 북쪽 일대) 서쪽에는 어우눌, 동쪽에는 해산이 마을이 나란히 있었으나 1949년 1월 초순, 죽성에 주둔했던 국군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 3대대(대대장 정준철 소령)군인들에 의해 한 날 한 시에 방화소각되었다.


어우눌과 해산이 옛터에는 지금도 당시 주민들이 살았던 집터가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채 남아있다. 하지만 제주시 제2우회도로가 개설되면서 넓은 도로가 어우눌마을을 관통했다.

옛 마을의 흔적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대부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집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올래와 마을길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마을 출신인 한 가구가 들어와 살고 있다. 어우눌에는 2001년 4월에잃어버린 마을표석이 세워졌으나 비 주위에 폐 타이어가 쌓여 있어 눈에 띄기 어렵고 을씨년스럽다.

‘해산이’에는 초토화 작전 당시 깨어진 그릇 조각들이 지금도 널려 있으며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연못도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 표석 전문>


잃어버린 마을 -어우눌-


여기는 1948년 초겨울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제주시 오라동의 한 자연마을, 어우눌마을터이다. 약 4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어우눌은 제주시 외각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1904년 문음서당(文陰書堂)이 개설되자 도내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향학열을 불태웠다.

마을 아랫녘에는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오라리의 이응호, 김좌겸 등 제주도 각 지역 유림 대표 12인이 모여 일제에의 결사항쟁을 맹약하며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고 조선의 치욕을 설원(雪怨)한다"는 의지를 바위에 새겨 넣은 조설대(朝雪臺)가 있어 마을의 기개를 지금까지도 드높여주고 있다.


4․3사건은 이 마을을 피해가지 않았다. 폐촌 후 일부 주민들은 오라리 등지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눈 덮인 벌판을 헤매야했다. 이 마을에서는 당시 주민 100여 명(호수 23호) 중 약 13명이 희생되었다. 4․3을 거치면서 오라동에서 잃어버린 마을은 어우눌 이외에도 고지레(13호), 선달뱅디(6호), 해산이(15호)가 있다.


다시는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http://www.jeju43.org/ 제주4․3연구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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