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주택 재건.. 삼도2동 후생주택
상태바
[향토문화]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주택 재건.. 삼도2동 후생주택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2.09 14: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체적으로 254평방미터에서 275평방미터 당 1가구 건설.. 9평과 18평 두 종류 만들어

삼도2동 후생주택
 

소재지 : 삼도2동 1239-5번지
유형 ; 건축
시대 ; 대한민국

 

1953년 경부터 정부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주택을 재건하고 월남한 피난민들의 월남에 따른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택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유엔한국재건기구의 원조로 경인 지역 및 각 도에 후생주택을 건설하였다.

대체적으로 254평방미터에서 275평방미터 당 1가구가 건설되도록 했으며 9평과 18평 두 종류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국어사전에는 후생주택을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일반 서민들이 어렵지 아니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지은 주택’이라고 했지만, 건축자재 배급에 있어서 당시 돈 2만원의 보증금과 지방유지의 보증을 요구하는 등 일반 서민들로서는 지키기 어려운 조건을 걸어서 대부분 유지들이 입주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후생주택에 거주하는 강상언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이 주변에 집단적으로 후생주택이 건설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2동 가량만 남아있고 강상언씨 주택 말고 다른 후생주택은 이미 변형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현재 강상언씨의 주택도 지붕개수가 이루어져 당초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1955년 11월 대한뉴스 제71호 동대문 후생주택 입주식 기사, 제98호(1956년 12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부에 있는 후생주택을 시찰하는 기사, 1957년 후생주택 사진(국가기록원), 대한뉴스 제104호(1957년 2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시내 신설동의 후생주택 시찰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와 같은 후생주택은 전국적으로 중점을 두고 시행된 정책사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1년 제19회 국무회의록(독지가가 정부에 후생주택 1000호를 건축헌납하겠다는데 관하여) 1963년 제97회 국무회의록(함백지구에 후생주택 500호의 건립이 준공하였음을 보고) 등의 기록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1960년대 중반까지도 이 사업은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