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잊혀져가는 그 때의 역사 전승해야..토평동(영천동) 육군중령홍서훈순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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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잊혀져가는 그 때의 역사 전승해야..토평동(영천동) 육군중령홍서훈순직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2.13 2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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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서훈 중령의 군번은 10743번이며 평북 출신 홍석희의 아들로 거주지는 강원도

토평동(영천동) 육군중령홍서훈순직비

 

위치 ; 서귀포시 토평동 3069-1번지.
유형 ; 비석(순직비)
시대 ; 대한민국

 

토평동_육군중령홍서훈순직비



찾아가는 길 ; 토평공업단지 가는 길(도로변 건너편에 제주감협유통센터와 신호등이 있음)로 들어서서 서쪽으로 난 500m 가면 서귀포시장애인복지회관 가는 길로 들어선다.

서쪽으로 700여m 가다가 북서쪽으로 길이 휘어진 다음 ‘청재설헌농장’ 간판이 세워진 인정오름로102번지 과수원 안에 작업로로 약 50m쯤 가서 오른(東)쪽으로 보면 공동묘지가 있고 돌담에서 동쪽 30m 정도 되는 곳 소나무숲 사이에 있다.

옆에 윤구동선정비, 송두옥선정비, 경위변시윤순직비, 경위허행민순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비문 ;〈앞〉故陸軍中領洪瑞勳殉職之碑(큰글씨) 陸軍二中李仁鎬 陸軍下士尹德烈(작은 글씨)
〈뒤〉檀紀四二八五年五月二十二日 故洪瑞勳 中領이 陸一訓第五宿營地區隊長으로서 强兵育成과 國軍이 母胎第一訓練所 發展을 爲하여 獻身努力하다가 初志를 一貫치 못하고 哀惜이도 殉職하였음으로 故人의 英靈을 追慕하고 業績을 받드러 陸軍 第一訓練所 全將兵이 이곳예 故人을 哀悼하는 뜻으로 建立한 것임. 檀紀四二八七年三月十六日 陸軍第一訓練所 將兵 一同

홍서훈중령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고 2011년 2월 15일 국가보훈처에 전화(02-2020-5097)로 알아보니 홍서훈 중령에 관한 자료가 없다고 한다.

2011년 2월 16일 국방부(02-748-1111)에 문의한 결과 홍서훈 중령의 군번은 10743번이며 평북 출신 홍석희의 아들로 거주지는 강원도였다고 한다.

1953년 5월 22일 08:15에 서귀면 서귀리 관사에서 출근하던 중 폭우로 갑자기 불어난 물에 의해 운전원으로 추정되는 이인호 이등중사(현계급 병장)와 윤덕렬 하사(직책 미상, 현계급 상병)와 함께 순직하였고, 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송장환님의 자료에 따르면 이인호 병장은 1959년 4월 13일, 홍서훈 중령은 1959년 11월 25일, 윤덕열 상병은 1960년 5월 20일 국립묘지로 옮겨졌다.

그런데 윤상병은 순직으로 되어 있지만, 홍중령과 이병장은 일반사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같은 시각에 같은 사고로 사망했는데 순직과 일반사망으로 나뉘다니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해 둔 분이 있어 사고의 전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2011년 현재 서귀포문화원 부원장이신 정수현 선생님의 개인문집인 『노을지는 언덕』에 소개된 글이다.(양성희님 덕에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 당시 육군 제1훈련소 제5숙영지구대장 홍서훈은 소령이었고 이인호는 하사로 운전병이었다. 그리고 윤덕열은 일등병으로 연락병을 맡고 있었다. 순직해서는 모두 1계급씩 추서되었다.


-중략-
제5숙영지의 책임자는 소령으로 지구대장이라고 불렀다. 나는 한 때 서상효에 살면서 서귀중학교에 통학을 했다. 학교로 가다 보면 오전 8시쯤에 분홍색 호마가 제5숙영지를 향하여 달려오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말을 달리는 군인의 철모에는 태극기와 흡사한 소령 표시가 동그랗게 그려져 있었다. 그가 마상에 높직이 앉아 힘차게 말을 달려올 때면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많은 병사들 중에서 소위만 보아도 하늘처럼 쳐다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말을 달리던 분이 소령이었으니 얼마나 높은 계급이었던가! 그럴 때 우리 중학생들은 길 옆에 비켜서서 그 소령의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누군가는 아는 척을 한다 저 분은 제5숙영지구대장이다 라고 말을 하니 다른 학생들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다가 해가 바뀌고 1953년이 되었다. 5월 21일부터 서귀포 일원에 비가 쏟아졌다. 때아닌 봄비가 점점 거세게 내려 저녁에는 아예 폭우로 변했다. 그래서 자연의 철칙대로 메말랐던 하천에도 물이 넘쳤다.

이런 자연유하는 발우너지가 한라산 정상에 가까울수록 많은 물을 모아 빠르게 넘치니 이를 보통 큰 내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산간 목장지대에서 시작되고 크게 폭우가 쏟아져야만 일시적으로 물이 흐르는 계곡도 있다.

속칭 흙통내도 이런 범주에 든다. 토평동 인정오름 북쪽은 원래가 토평공동목장으로 지금처럼 과수원이나 공업단지가 아니고 야초지였다. 큰비가 내리면 물은 인정오름 서쪽으로 흘러서 한 가닥 두 가닥 모이면서 하류로 내려간다.

평상시에는 말라버린 조그만 계곡이나 큰비가 올 때에는 흙탕물이 범람하며 내려온다. 이 조그만 내가 5․16도로를 가로지르는데 그 건널목에는 깬 돌을 잘 쌓아서 그 위로 인마가 통행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백화가 만발한 5월 21일 날 내린 비로 물은 계곡마다 고이기 시작했다. 밤을 새고 익일인 5월 22일이 밝아도 비는 쉬지 않고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혹시 하늘이 뚫려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누구나 투덜거릴 정도였다.

이 때 제5숙영지구대장 홍서훈 소령은 서귀포에 있었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므로 부대가 안전한가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사실 육지부에서는 이 정도 강우량이면 홍수가 져서 배를 띄워야 간신히 돌아다닐 상황이었다.

그래서 귀대를 서둘렀고 오전 8시경에 서귀포를 출발하여 상효동(법호촌)에 있는 제5숙영지로 가고 있었다. 차는 전쟁발발후 미국에서 원조해 준 GMC트럭으로 이인호 하사가 운전을 했다.

비는 차창을 맹렬히 때리고 있었다. 판초우의를 입은 홍서훈 소령, 보급관 배 중위는 운전석에 타고, 뒤에는 연락병인 윤덕렬 일등병이 탔다. 그 때 도로에는 자동차 구경이 어려워서 무진장으로 달릴 때이니 서귀포서 출발하면 10분이면 제5숙영지에 도착한다.

그러니 비를 조금 맞아도 한 순간이라서 참아내기로 하고 흙통 가까이 접어들고 있었다. 그 때 가다 보니 그 차 뒤에는 토평동 출신으로 제5숙영지 생산대에서 운전을 하는 부용해 하사도 차를 몰고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흙통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는 짙누런 홍수가 굽이쳐 내려오는 것이 역력하게 보였다.

아~ 위기일발이었다. 앞 차는 제주 사람들이 아니니 이 내(川)가 위험한 줄 모를 것이다. 그는 즉시 ‘빠~아앙’ 하고 자동차의 경적을 연거푸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홍 소령이 탄 차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큰 물길이 왈칵 덮쳐와 차의 뒷부분을 휩쓸어 내려갔다. 그 때 차의 문이 어떻게 해서인지 열려졌다. 그 순간 보급관 배 중위는 하천 동측으로 튀어넘었다. 그러나 홍 소령과 이 하사, 김 일병은 떠내려갔다.

이래서 부용해 하사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다시 일주도로를 경유하여 토평에 들어섰다. 즉시 자초지종을 헌병대에 소상히 알렸다. 배 중위도 다리가 골절되어 절뚝거리며 토평헌병대에 이르러 이 사실을 알렸다. 이 통보를 접한 제5숙영지에는 비상이 걸렸다. 지구대장이 냇물에 휩쓸려갔다는 급보에 군인들이 총출동하여 하천을 뒤졌다.

급류는 이제 어느 정도 그치고 물은 웅덩이마다 가득 고여 있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자동차는 지금의 삼성여자고등학교로 가는 길 옆쪽 암반에 걸려 있엇다. 그 무거운 군용트럭을 끌고내려갔으니 엄청난 위력을 가진 급류임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현재는 하상을 깊이 파서 물이 유유하게 많이 흐르도록 되었지만 그 때는 하상에 돌들이 삐죽삐죽 튀어나 울퉁불퉁할 때이고 그런 낮은 곳에 냇물은 고여 있었다.

그 내는 일주도로 세월 위를 흘러 보목동으로 흘러드는데 그 날은 일주도로 맡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의류 몇 점을 건져냈을 뿐이고 비가 내리고 물도 많이 고여 시신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침 그 날이 제삿날이라 오후 5시경 비가 그치자 일주도로를 따라 신례리로 가고 있었다. 흙통내가 흐르는 일주도로에 이르렀을 때였다. 군인들이 철모를 쓰고 비옷을 입은 채 물통을 밟아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물에 젖은 의류 몇 점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은 하천 부근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무슨 일이 있구나’ 짐작을 하면서도 그러나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앗다. 괜히 물었다가는 ‘이 자식’ 하고 뺨이나 한 대 갈길는지 몰라서였다. 그래서 나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 동쪽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수색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훈련소 본부에서도 참모장교가 나오고 장교들이 대책회의를 열었다. 내일부터는 현지 실정을 잘 아는 토평 주민들의 협력을 얻기로 했다. 그래서 토평동 마을회관이 있는 공터(당시는 창고만 있었음)에 천막을 치고 수색대책본부를 만들었다.

5월 23일엔 군민합동으로 수색조를 짜고 하상을 다시 훑었다. 그러는 중에 정오경 물이 많이 빠져나갔다. 그 때 자동차가 걸어진 부근 물웅덩이에 팔 한 쪽이 밖으로 솟아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시체였다. 그래서 토평동 김모씨가 물통에 용감하게 들어가서 운전병인 이인호 하사를 건져올렸다.

그 다음날인 5월 24일 아침이 밝아왔따. 당시 서귀면 하효리 출신인 강모씨는 서귀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걸어서 하효와 서귀포 간을 왕래했다. 그 때 간혹 잘 사는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나 그것 역시 도로 상에는 온통 돌멩이투성이라 터덜터덜거렸다.

그래서 대부분 걸어서 다녀야 했다. 튼튼한 다리가 없으면 못 사는 세상이었다. 강모씨는 언제나와 다름없이 서귀포쪽으로 걸어가다가 흙통내 세월에 이르렀다. 우연히 도로 서북쪽 편을 보니 자갈과 흙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것은 엊그제 내린 빗물로 상류의 토사를 끌어온 것이었다.

그 위에 하얀 손가락 같은 게 밖으로 삐죽하게 나와 있었다. 저게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에 흙을 한 줌 파내었다. 그랬더니 팔목이 나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엊그제 냇물에 휩쓸린 군인이 아닐까 하여 겁은 나면서도 흙을 조금씩 걷어내다 보니 시체였다.

그는 부근에 누구 없느냐고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 놀랜 음성을 듣고 마침 부근에서 수색을 하던 군인과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즉시 시신을 꺼내고 보니 홍서훈 소령이었다.

그런데 허리에 차고 다니는 권총이 없어졌다. 군인은 무기가 생명과 같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권총을 찾아야 한다. 그 때 계급이 높은 군인이 입을 열더니 그 부근을 샅샅이 뒤지도록 명령을 했다. 이곳저곳을 찔러 보고 물 있는 곳까지 휘저어 보았지만 권총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그 군인이 강모씨에게 ‘니가 권총을 어데 숨겼지?’라고 추궁을 했다. 그러나 강모씨는 펄쩍 뛰며 모른다고 대답을 하자 그것으로 그쳤다. 신고한 사람에게 감사는 못 드릴 망정 무턱대고 의심을 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있을까?

이제는 연락병 윤덕렬의 시체를 찾아야 한다. 그 때 보목동 어느 주민이 바닷가에 시체가 떠올랐다고 신고를 했다. 그래서 바닷가로 부지런히 뛰어가서 보니 그것은 찾는 윤 일병이 아니었다. 어느 불쌍한 행려자가 길거리에서 죽자 동네 사람들이 냇가에 허술하게 매장을 했는데 그게 이번 물결에 끌려내려간 것이다.

그러지 군인들은 신경이 예민했던지 신고한 사람을 무턱대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이게 또 무슨 짓들인가? 애써 신고한 사람을 그렇게 대하다니, 그래도 말 한 마디 못하던 세상이니 주민들이 얼마나 억눌려 살았을까?

그 다음날에 시체 1구가 또 보목동 해변에 떠올랐다. 그 시신은 군복 입은 그대로여서 확연히 판별이 가능했다. 그래서 신고를 하니 군측에서 와보고 윤덕렬 일병이 맞는다고 했다. 이렇게 냇물에 희생된 시신 3구는 모두 찾았다.

시간이 흘러간 후 1954년 3월 16일 순직비를 세우게 되었다. 홍서훈 소령 시신이 발견된 곳은 일주우회도로 북쪽인데 그곳에 마땅한 공간이 없었던지 도로 남쪽으로 건너서 하천 동쪽에 세웠다. 그 밭은 경작지가 아니고 띠와 잔디가 자라는 땅이었다.

북쪽을 향해서 한 변이 1.5m나 되고 높이도 그 만큼 된 정방형의 기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길이 1m에 폭은 50cm나 되고 두께는 20cm의 비석을 올려놓았다.

이 순직비는 1971년 경 일주우회도로를 확장할 때에 토평동 3069-1번지 옛 토평공동묘지 자리로 이설을 했다. 지금은 그 옛날 비석거리에 있었던 목사 윤구동선정비와 읍후송두옥선정비 등과 함께 무성한 수풀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주변이 가려져 아무도 보는 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회상을 해 보니 과거 속에 오늘이 있고 이 토대 위에서 내일을 맞는다. 그런 관점에서 그 반세기 전에 조국을 지키려는 함성이 울렸던 상효동(법호촌) 땅에 제5숙영지임을 알리는 표석을 세우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홍서훈 중령의 순직비도 상효동 제5숙영지 자리나 아니면 연관이 있는 대로변으로 옮기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서 만인에게 잊혀져가는 그 때의 역사를 전승토록 하자.


끝으로 순직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이 글을 씀에 있어 도움을 주신 서귀포시 동홍동 1382 오용집 선생님, 서귀포시 토평동 1615 김석찬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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