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마을 사람들에게 밭을 무료로 갈아먹게 해.. 연동 죽오거사 조숙영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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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마을 사람들에게 밭을 무료로 갈아먹게 해.. 연동 죽오거사 조숙영 묘
  • 고영철(제주문회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3.0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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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조광헌이 남문통에 조약국을 열어 연동 사람들 병든 삶 구완 어려운 사람들 도와

연동 죽오거사조숙영묘

 

위치 ; 제주시 연동 남조순오름 8부 능선
유형 ; 묘
시대 ; 일제강점기(1935년)

연동_조숙영묘 전경
연동_조숙영묘표석근.

 

남조순오름에 군부대로 가는 길을 따라 8부 능선까지 올라가면 동쪽 경사면에 조숙영의 묘가 있다. 몇 년 전까지는 벌초가 되어 있었다고 하나 2011년 1월에 보았을 때에는 몇 년 동안 벌초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묘는 잘 다듬은 판석으로 사면을 두른 方墓이며, 팔각형 대석 위에 세운 화강암 비석도 매우 크다. 묘의 정면에 세운 돌에는 ‘죽오거사조공지묘’라는 예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성과 재물을 많이 들여 세운 묘임을 알 수 있다. 묘는 고향을 바라보는 방향이라고 한다.


죽오거사는 당시 제주의 여러 인물들과 사귀었는데 그 중 특히 김석익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석익은 조설대 집의계의 한 사람으로 탐라기년의 저자이다.


죽오거사의 비를 세우는데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고 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밭을 주어 무료로 갈아먹게 했는데 나중에는 갈아먹던 사람들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조광헌이 남문통에 조약국(만수당약국 맞은편)을 열어 연동 사람들에게 약도 무료로 지어주고 병든 삶을 구완해 주었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아 도와주었으므로 마을에서 자연석으로 비를 세워주었는데 해군사령부가 들어서게 되어 철거하게 된 것을 김익수 선생께서 사령부와 타협하여 자연사박물관 안에 옮겨 놓았다.

자연사박물관 동쪽 비석 있는 곳에 가면 조숙영의 아들 조광헌을 기리는 비가 있다.

비문 앞면 ; 竹塢居士趙淑永之墓
(왼쪽면)觀古氣義士不平世多海上以爲歸豈風濤渺茫無際可以騁駣蕩胸而與世不相涉歟近故竹塢趙居士世其家箕城繁華一朝翩然入濟州海以沒世時則丙子歲□朝廷許倭來一世有識震懼言國將亡也人則公其豪士抱志槩素慷慨也論者擬諸魯連管寧之流亞噫其悲矣公諱淑永字子安竹塢號也其先自中州東來尙矣仕我朝有大司諫應善直言謫平山以居遂籍焉諱就璧仁極之翰經昌爲高曾祖 祖若考竹山安氏掌令宅女妣也□純祖丁亥六月五日□高宗丙戌六月二十一日其生卒也南朝峰負癸原其墓也 前配光山金氏 唐岳金氏繼配 高氏敬晩女入海後娶 賢而有子 曰匡憲 匡憲(뒷면)生一男壽崗二女心竹性竹也 公生而聰㯋 甫上學文字 記誦無遺 能詩 能書畵 通醫理 聞識聸博無比性耿介不俗三登金剛再入燕都雅誦直在胸中貧亦樂屈於人下富奚爲愛月非關惑貪山不害廉等古人詩居喪哀毁踰禮處變安之若常戒家勿以貧寒累心勉人必以孝悌問學自奉務要險約居處極其潔整懲忿室慾爲壓銘賣藥診病懷廣濟州牧白樂淵善而未嘗一事有求如上舍金亮洙及愼㘽雲吳卿魯金桂斗皆一州名勝莫不爲交唱酬盡其歡其才志也內行也外交也廉介也風流也皆可以觀也嗚呼士遇亂世莫能佐君濟民又不忍受虜汗染是有蹈海之誓適遼之行此類史不絶書而若見幾㝠沒波濤又不知幾多人以公之行觀公之世論者之云未可謂無謂也匡憲介余同門士孫周晟高景洙以安秉宅甫所爲狀求銘碣踰歲勤余又終日而不作傷已及矣公遂銘曰(오른쪽면)西京風土古名疆民物繁樂莫當南海耽羅遠一方危濤接天天沒光驀然趨避乃遑遑此意千秋足可傷
隆熙紀元之癸酉陽月首陽吳震泳撰 高順欽書乙亥九月十二日建之
配高氏墓


부분은 총탄에 의해 훼손되어 글자를 판독할 수 없음.

해석


옛날을 살펴보면, 기개가 있는 의사(義士)는 평안하지 못한 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바다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겼으니, 바람과 파도는 아득하여 끝이 없는데 배를 타고 바라보면 가슴이 호탕하여질 터이니, 어찌 세상에서 건너가려 하지 않겠는가.


가까운 옛적에 죽오거사(竹塢居士)는 대대로 그의 가정이 평양<箕城>에서 번성하였는데도, 하루아침에 너울너울 제주로 들어와 세상에서 사라졌다.

때는 병자(丙子, 1876)년으로 조정에서는 일본에 온 세상이 되도록 허락하니, 식자들은 떨고 두려워하며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다.

사람들은 공(公)이 그런 호탕한 선비로서 뜻과 기개를 품었고 본디 강개하였음을 본받았다. 논자들은 공자의 제자들이라며 관녕(管寧. 주: 삼국시대 魏의 朱虛사람. 漢末 황건적이 일어나자 遼로 피신하여 詩書를 강의하여 덕으로 民化하였다)의 아류로 연관짓기도 하였다.


아, 슬프다. 공(公)의 이름은 숙영(淑永)이니, 자(字)를 자안(子安), 죽오(竹塢)라고 하였다. 그의 선조는 중국에서 동쪽으로 온 지 오래었다.

조선조에 벼슬하기로는 대사간(大司諫) 응선(應善)이 있는데, 직언을 하다가 평산(平山)으로 유배를 가서 살면서 드디어 본적이 되었다. 취벽(就璧), 인극(仁極), 지한(之翰), 경창(經昌)이 고조, 증조, 조부 및 부친이다. 죽산안씨(竹山安氏) 장령(掌令)댁의 딸이 모친이다.

순조(純祖) 정해(丁亥, 1827) 6월 5일과 고종(高宗) 병술(丙戌, 1886) 6월 21일이 그가 태어나고 돌아간 날이다. 남조순 오름을 등진 북쪽이 그 묘터이다.


전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 당악김씨(唐岳金氏)이며, 뒷부인은 고경만(高敬晩)의 딸이다. 바다로 들어온 뒤 현숙한 데 장가들어 아들을 두니 광헌(匡憲)이라 하는데, 匡憲은 외아들 수강(壽岡, 주: 호적에는 壽仁으로 되었음)과 두 딸 심죽(心竹), 성죽(性竹)을 낳았다.


공(公)은 태어나면서 총명하여 막 배우러 가서는 글을 쓰고 외움을 남김없이 하여, 시도 잘하고 글씨와 그림도 잘하며 의술의 이치에도 통달하여, 듣고 아는 것이 많기로는 견줄 이가 없었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속되지 않았다. 금강산에 세 번 올랐으며, 두 번 북경을 드나들었다. 아름다운 풍류가 바로 가슴 속에 있었으므로, 가난 또한 즐기면서 남에게는 굴원(屈原)처럼 하여 부(富)를 무시하였다.


어찌 달을 사랑하며 마음을 열어놓고 산에 유혹되면서 청렴하는 등의 일을 표준으로 하지 않겠는가. 옛사람처럼 시(詩) 속에 마음 아파하며 살아, 예를 벗어난 경우에 처하여도 평상 때처럼 안색을 편안하게 바꾸었다.

집안 사람에게 경계하면서, 가난에 마음을 얽매이지 말라고 하고, 남을 면려하기를 반드시 효도와 공경으로 하여 물어 배우라고 하였다. 스스로 검소함과 절약에 힘써서 사는 곳을 매우 깨끗하게 정돈하였다. 노여움과 욕심을 눌러 자제함을 좌우명으로 삼아, 약을 팔고 병을 진료함에도 널리 구제함을 생각하였다.


제주목사 백낙연(白樂淵)과는 ㅇㅇ 잘 지내면서도 일찍이 한 가지 일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진사 김양수(金亮洙) 및 신재운(愼哉雲), 오경준(吳卿濬), 김계두(金桂斗) 모두가 한 고을에서 ㅇㅇㅇ 않음이 없어, 사귀며 시를 주고받았는데 모두 그들은 그의 재주와 뜻에 기뻐하였다. 집안에서의 행동이며, 바깥에서의 사귐이며, 청렴함이며, 풍류를 즐김을 모두 살필 수 있었다.


아아! 선비가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밑에 처하면서도 임금을 돕고 백성을 구제하지 않음이 없었고, 또한 오랑캐에게 차마 땀으로 물들 수는 없었다. 이것은 바다에 몸을 던질 때의 맹세였었다.


만주로 갔던 일, 이런 것들은 역사에서 글로 사라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몇몇은 하늘로 날아 파도 속으로 사라진 것을 알고, 또한 대부분 사람들은 공(公)이 다니며 관찰한 것으로써 공(公)이 세상을 논한다는 것을 몰랐다 하더라도, 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리라.

광헌(匡憲)은 나의 동문 선비인 손주성(孫周晟), 고경수(高景洙)와 끼어 안병택(安秉宅)에게 글을 짓게 한 바, 명갈(銘碣)을 구한 지 해를 넘겨 나에게 권하니, 나 또한 종일을 해도 짓지 못하고 몸을 다치기까지 하였다.


공(公)을 ㅇㅇ하여, 드디어 명(銘)에 말하되,
서경(西京, 주: 평양 지칭)의 풍토는 옛날 이름난 지역
민물(民物)이 번성한데 즐길만하지 못했던가.


남해의 탐라는 먼 한쪽 끝
사나운 파도 하늘에 닿는데 하늘엔 빛 사라지고
홀연히 빠른 걸음으로 피하며 황급히 떠나
이런 뜻 천추(千秋)에 가슴아파라.


융희 기원의 계유(癸酉, 1933) 음력 10월
오진영(吳震泳) 지음 고순흠(高順欽) 씀 을해(乙亥, 1935) 9월 12일 세움.<金益洙 譯>

오진영(吳震泳) ; 유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 아버지 기선(驥善)과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충청북도 지천(鎭川) 외가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전우(田愚)를 처음 만난 후 수업을 받았으나, 30세에 스승으로 섬기기 시작해 호서 지역의 대표적 전우 문인이 되었으며, 특히, 전우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계승하는 데 가장 활동적인 인물로서 인정되고 있다.


그는 전우의 심즉기설(心卽氣說)에 근거해, 한말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이항로(李恒老)·이진상(李震相)의 입장이 태극과 심(心)을 일치시키고 심(心)을 이(理)라 규정하는 입장을 반박하고, 심은 작용이 있으므로 태극을 갖추고 있지만 기(氣)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기절(氣節)을 도학의 울타리로 규정해 도학(道學)의 핵심적 특징으로 ‘기절’을 중시하는 의리론을 제시하고, 선비 정신을 지조[志] 곧 기절로 확인하였다.

그는 27세 때 동학도(東學徒)에 붙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았고, 일제 말기인 71세 때 형사에게 체포되자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항거할 만큼 자신의 기절을 지켰다.


1905년 그는 일본의 불의(不義)를 규탄하는 〈포고천하문 布告天下文〉을 지었고, 일본이 국가간의 공법(公法)을 어긴 죄를 문책해 각 국 공관(公館)에 호소하는 글을 지었다.


또한 3.1운동을 전후해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와 미국 워싱턴회의에 독립청원의 서한을 보내는 일을 추진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으나, 스승의 허락을 받지 못해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는 〈기분 記憤〉을 지어 3.1운동때 일제(日帝)의 잔인함에 울분을 기록하였다. 또한 조긍섭(曺兢燮)의 〈복변 服辨〉에서 망국(亡國)의 임금인 고종(高宗)을 위한 상복을 거부하자, 그는 조긍섭의 입장을 반박하는 〈변복변 辨服辨〉을 지어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유교를 비난하는 주장에 맞서 유교전통을 수호하는데 힘썼다. 1920년 권덕규(權德奎)가 동아일보에 글을 실어 공자와 함께 유림의 부패된 의식을 비판하자 〈경고세계문 敬告世界文〉을 지어 항의하고, 1931년 이인(李仁)이 공자를 비난하는 글을 싣자 동료 문인들과 함께 적극적인 성토에 나섰다.

스승의 문집인 ≪간재사고 艮齋私稿≫의 간행을 추진하다가 문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전우의 행장(行狀)을 짓는 등, 스승을 높이고 학통을 수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44년 음성(陰城) 망화재(望華齋)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문인들이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하였다.(http://kumyo.co.kr/금요고서방)


문인간의 분열이란 1925년 총독의 허가를 얻어 스승의 문집을 발간했는데 이는 스승의 유지를 어긴 것이라 하여 동문인 김택술로부터 성토를 당하였다.(김택술은 이 때문에 배일당이라 하여 일경에 호출 많은 고문을 당했다.)(http://cafe.daum.net/ck.seo/)

고순흠(高順欽) ; 일제강점기 때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본관은 제주.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岩). 아버지는 성균관 교수였던 능봉(菱峰) 고성겸(高性謙, 1856~1899)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고경흠(高景欽, 1910~?)의 8촌 형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 23-1에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고순흠의 묘가 있다.


고향에서 한문을 익히고 의신학교(義信學校)를 거쳐 1912년 제주공립농업학교(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제1기로 졸업하였고 1914년 3월에 경성전수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를 나왔다.


1909년에 안희제(安熙濟, 1885~1943)·윤세복(尹世復, 1881~1960)·서상일(徐相日, 1887~1962)·김동삼(金東三, 1878~1937)·신백우(申伯雨, 1888~1962)·신팔균(申八均, 1882~1924) 등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청년 항일운동 단체였던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열(金圭烈, 1893~1968), 황종화(黃鍾和, 1878~1950) 등과 함께 임시정부로부터 「일제의 관공리인 동포에게」, 「포고 제1호, 남녀학생에게」, 「포고 제2호,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등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 포고문과 격문을 국내에 배포하였다.


또한 1920년 4월에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해 조선노동공제회의 선언문과 강령 및 헌장의 초안을 양제박(梁濟博)과 함께 담당하였으며, 서무 책임자도 역임하였다.


1924년 3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사상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을 결성하였으며, 1924년 7월에는 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 간사이조선인3·1청년회 및 오사카조선유학생학우회 등 3개 단체와 조선무산자사회연맹 공동으로 ‘조선인문제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조선인여공보호연맹회를 조직해 여공들의 처우 개선과 분쟁해결에 노력하였다.


이와 함께 1928년에는 당시 제주와 오사카 항로를 독점 운영하던 일본 선박업자들이 운임료를 대폭 인상하자 이에 제주도민들이 집회를 열어 운임료 인상의 부당함을 규탄하고, 요금의 인하를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제주도의 상황을 보고 고순흠은 자주운항운동(自主運航運動)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제주항해조합과 기업동맹기선부를 설립하여 일본기선회사의 횡포에 대처하면서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항로에 순길환(順吉丸)을 취항시켰다. 이 당시 기업동맹기선부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제주도민의 소비조합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후 광복 이후인 1946년 10월 3일에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 결성되자 박렬(朴烈, 1902~1974)이 중앙 총본부 단장을 맡았으며, 고순흠은 중앙 총본부 의장을 맡았다. 이후 고순흠은 1947년 10월 1일에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부단장에 피선되어 1949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고순흠은 1963년에 영구 귀국한 이후 서예에 몰두해 제주와 부산 등지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 1894~1936)의 묘표(墓表), 매강 김운배(金沄培, 1899~1934)와 김시성(金時成, 1909~1935) 및 여성 항일운동가 김시숙(金時淑, 1880~1933)의 묘비 등 고향 출신 항일운동가들의 비문은 대부분 고순흠의 글씨이다.


1963년에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허호준)

고순흠(高順欽)


대동(大東)청년당, 조선공제회, 무정부주의의 항일 활동.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岩), 본관은 제주, 조천리 2654번지에서 능봉(菱峰) 고성겸(性謙)의 아들로 태어났다. 능봉은 성균관 교수(敎授)를 역임한 분이다.

특출한 유학자로서 오라리 칠봉(七峰)서당에서 훈학하던 중 석유 등불로 인하여 서당의 화재가 발생하자 문하생을 구하려다가 순직(殉職)한 분이다. 능봉은 오라리에 살던 아버지 고응식(應植)의 25세 때에 타계하면서 아내에게 유복자를 두고 있었으니 능봉이 아버지의 얼굴을 못 본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또 아들 고순흠은 능봉이 41세의 조천 과부 송씨와 야합하여 낳은 아들이다.


이 때 죽암이 태어나자 정통 유가(儒家)의 집안에서 이변이 일어났다고 야단들이었다. 이에 모자(母子)는 당일부터 10여 처로 숨어 다니는 모욕적인 수난을 받기도 하였다. 어머니 송씨는 기필코 외아들을 대성시키겠다고 다짐하며 제주 성안으로 유학가는 아들 죽암에게 「훈언육조(訓言六條)」를 글로 써서 일평생 지켜 줄 것을 당부하였다.


망부(亡夫)인 능봉의 영혼에게 출필고(出必告)하도록 설상하여 고유제(告由祭)를 한 뒤 글을 넘겨주었다. 훈언의 내용은 첫째 집에 금품을 두지 말 것, 둘째 안일하게 지내지 말 것, 셋째 도박을 하지 말 것, 넷째 무당 점쟁이를 멀리할 것, 다섯째 부친이 석유 등불로 인하여 타계했으니 불을 조심할 것 등이었다.


죽암은 평생 이 훈계를 지켰다. 죽암은 조숙하여 이미 7세에 글씨는 신필(神筆)의 지경이라 9살에는 한문으로 글을 지으니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향리에서 한문을 익히고 사립 의신(義信)학교를 거쳐 1912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니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과 동기생이다. 이에 앞서 죽암은 송산(松山) 김명식, 매원(梅園) 홍두표(洪斗杓)와 함께 송매죽(松梅竹) 혈맹결의(血盟結義)로 이미 국권 회복을 다짐하고 있었다.


1914년 3월 경성전수(京城專修)학교(서울법대 전신)를 졸업하면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였다. 이 당은 1909년 남형우(南亨祐), 안희제(安熙濟), 김동삼(金東三), 박중화(朴重華)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단체이다.

회원 중 신백우(申伯雨), 고순흠(順欽), 김명식(金明植), 오상근(吳祥根) 등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와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였는데, 대동청년당의 다른 회원들과 함께 17회에 걸쳐 토의회를 가진 뒤 조선노동공제회(共濟會)의 전신인 조선 노동문제연구회를 1919년 7월에 조직하였다. 대동청년당은 1945년까지 정식 해체됨이 없이 이어졌는데, 회원들은 국내외에서 항일 활동의 중추 세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3ㆍ1 운동이 일어나고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죽암은 김규열(金奎烈), 황종화(黃鍾和), 이영봉(李永鳳), 최익무(崔翼武) 등과 함께 임정(臨政)으로부터 "일제의 관공리(官公吏)인 동포에게", "포고 제1호, 남녀 학생에게", "포고 제2호,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등을 비롯해 다수의 독립 운동 포고문과 격문을 전달받아 국내에 배포하였다.

1920년 조선 노동공제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서무 책임자가 되고 1921년 제3회 정기총회에서 김명식(金明植:조천)이 회장이 되고 그는 간사로 선출되었다. 이 때 발기인으로 홍순녕(洪淳寧:이도), 양제박(梁濟博:대림) 양인도 참가했으니 이 노동공제회의 선언문, 강령, 헌장 초안 작성은 고순흠과 양제박이 담당했다.


1921년 9월 조선 통신중학관을 개설, 학감(學監)에 취임하여 통신 중학강의록을 발행, 독학자로 하여금 실력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 제주 해녀조합 설립 운동에도 참가했다. 조선 노동공제회 내부의 볼세비키파에 반대하여 이들을 폭행하고 회관 간판과 서류를 불태워 버렸다. 이 사건으로 1922년 8월 검거되어 2주간 구금되었다. 1924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절대 자유를 이념으로 하는 무정부주의를 신봉, 오사카(大阪)에서 조선인의 사상 단체 남흥여명사(南興黎明社)에 참여하였다.


또 동년 6월 조선무산자 사회연맹을 결성하고 그의 주창(主唱)으로 천왕사(天王寺) 공회당에서 "조선인 언론 집회 탄압 탄핵대회"를 개최하였다. 1923년 이래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노동 운동 열기가 대두, 각지에서 노동 운동 단체의 창립이 활발해지자 그는 오사카 노동동맹회를 통하여 조선인 여공(女工) 보호연맹을 조직하였다.

여공의 태반은 제주도 출신어어서 고순흠의 운동 세력이 점차 확산되고 1924년 사카이(堺) 조선 자유노동연맹과 오사카 자유노동연맹 등을 창립하여 노동 운동과 사상 계몽을 함에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이후의 노동 운동은 죽암(竹岩)보다 차츰 목우(木牛) 김문준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1928년 말경 죽암은 제주 항해조합과 기업동맹 기선부를 설립, 일본 기선회사의 횡포에 대처하면서 제주와 오사카간의 독립 항로를 개설, 순길환(順吉丸)을 취항시켰으나 일제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공산주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게 되어 무정부주의 운동이 퇴조되면서 그의 항일 활동도 점차 후퇴되어 신진회(新進會)를 조직, 오직 사상 운동에만 전념하였다. 고순흠의 아나키즘 사상의 원류(源流)는 러시아의 크로포토킨에서 찾을 수 있다. 온건론적 무정부주의라고나 할까 음모나 테러, 총파업 등의 과격적인 방법보다 온건한 방법, 즉 선전과 계몽을 통해 목적 달성을 시도했다.


죽암은 1936년 5월 목우가 오사카에서 순국(殉國)하자 그는 이 유해를 제주로 운구 안장하도록 조천의 안요검(安堯儉), 김유환(金 T煥), 김시용(金時容) 등에게 연락을 취하며 이를 지도 안장시켰다.

1937년 3월 조선서도 연구회를 마련, 추사체(秋史體), 창암체(蒼體) 등 민족 서체 보급에 힘썼는데 한시에도 능했으며 서필 수준은 대단하여 김문준의 묘표, 해강(海岡) 김운배(金培)의 묘비, 김시성(金時成)의 묘비, 김시숙(金時淑)의 묘비 등 항일인사의 비문은 모두 그의 글씨다. 조국이 해방되어 이념이 양극화되기 이전인 1946년 2월 재일본 조선인연맹 대표자로서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했다.


조련(朝聯)이 공산주의 외곽 단체로 변신되자 이를 박차고 1946년 9월 25일 재일 한국거류민단 결성에 앞장서 준비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46년 10월 3일 창단 대회를 개최, 단장에 박열(朴烈:문경)을 선출, 또 고순흠은 중앙 총본부 의장에 피선되었다.

또 이 무렵 세기(世紀)신문 사장에 취임, 1947년 10월 1일 민단(民團) 부단장에 피선되고 연임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을 중앙청 앞에서 거행하게 되자 당시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은 민단 단장 박열ㆍ부단장 고순흠은 「건국 축전 참가 경축사절단」을 이끌고 단상에 오르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및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원수(元帥)를 비롯하여 국내외 동포로부터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한편 1950년 여름 박열과 고순흠은 재일교포(在日僑胞)의 동향을 조국의 동포에게 알리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마침 6ㆍ25 동란이 발생하여 박열은 공산군에게 납북(拉北)당하고 죽암은 간신히 한강을 넘어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1963년 영주차 귀국하여 서예 활동에 몰두, 제주ㆍ부산에서 작품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77년 11월 28일 오후 7시 30분 서울 화곡동(禾谷洞)에서 사망하자 그 곳에 묻혔다가 대전(大田)의 국립묘지 순국 선열 묘역으로 이장, 아들 고려한(麗漢)과 고려적(麗迹)은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인이 되어버려 혈육 한 분 없자 만년의 반려자 민혜경(閔惠璟) 여사와 문하생 서예가 김순겸(金順謙)이 비문을 쓰고 세워 그 자리에 참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독립 유공 대통령 표창을 전수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http://culture.je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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