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진실로 하늘이 만들어준 땅..건입동 연무정(演武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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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진실로 하늘이 만들어준 땅..건입동 연무정(演武亭)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3.1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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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정이란 병사들을 훈련하고 군관청과 판관 사후처로서 사용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건입동 연무정(演武亭)터

 

위치 ; 제주시 건입동
유형 ; 관아 건물
시대 ; 조선

연무정건물터

 

제주동초


연무정이란 병사들을 훈련하고 군관청과 판관 사후처로서 사용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인조14년(1636) 왜적의 침입이 잦아서 이를 방비하고자 제주목사 신경호가 남문 밖 5리인 ‘광양’에 창건했다.

그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한 달여 만에 공사를 마쳤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演武亭 ; 在州南三里有軍官廳判官何候廳牧使申景琥建此島皆磊磈惡石之丘陵唯廣壤無…(연무정 ; 제주 남쪽 3리에 있다. 군관청, 판관사후청이 있다.

목사 신경호가 세웠다. 이 섬은 대부분 돌무더기가 높고 험한 돌로 구릉을 이루는데 오직 광양에는 하나도 없고 손바닥 같이 평평하다.

그래서 試閱하고 習操할 수 있다. 진실로 하늘이 만들어준 땅이다.)라고 하여 연무정을 광양에 세운 까닭을 밝혔다.


숙종20년(1694) 이익태 목사가 중수했다. 이익태의 지영록에 연무정 중수에 관한 기사가 있다.


《武를 익힌 것들을 演武亭에서 甲試才를 하기로 정했다. 亭은 남문 밖 광양에 있는데 몇 년 전부터 너무 헐었지만 촌에 모아 놓은 기와가 고쳐 지을 만큼은 못 되어서 곧 썩어서 삭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여러 將士들과 모의를 하여, 도그내의 폐사된 절의 재료를 실어다가 輪番軍을 보충하여 목수가 하는 일을 돕게 하고 명월면의 옛 가마터에서 기와를 굽는데 그 근처의 갑 班 하인들에게 번을 면제하여 일을 시켰다.

동짓달 초에 일을 시작했다. 大廳 3칸, 東西挾室 각 2칸, 사면의 주위담장, 左右門은 서쪽 담 밖에 있고 따로 供需廳 3칸을 세웠다. 또 나머지 자재로 友蓮堂 5칸을 중건하고, 三學廳 6칸, 營外大門과 中門, 東西挾門을 따로 짓고 모두 門板을 달아 여닫도록 했다.

흙을 바르고 지붕을 덮고 단확(丹雘, 문기둥에 붉을 흙을 바름)을 하여 몇 달만에 마쳤다. 을해(乙亥, 1695) 2월 18일 장좌(將佐)를 거느리고 연무정에서 낙성연을 차렸다. 판관, 정의, 교수 모두 참석했다. 다음과 같이 적어 그 전말을 벽 현판에 새겼다.


「성의 남쪽 5리에 정이 있는데 신공경호(申公景琥)가 知州에 있을 때에 지은 것인데 세월이 오래되면서 비바람 맞아 헐어 무너졌다. 그러나 重修를 못한 것이 지금까지 이미 3년이다.


내가 수령으로 와서 가을 7월 16일에 동쪽 교외(東郊)에서 배송하전(倍送賀箋, 궁중의 축일에 축하하는 글을 보냄)하고 이어 三姓壇으로 향했다가 亭址(연무정 터)와의 거리가 아주 가깝기에 이에 둘러보았다.


그리고 여러 장리(將吏)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이 섬은 모두가 돌무더기와 악석의 구릉이지만 오직 광양평만은 돌덩이 없이 손바닥처럼 평평하여 武를 점호하고 병사를 훈련하기에 좋은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땅입니다.

연이어 해마다 흉년을 만나 오랫동안 조습(燥習)을 폐지했습니다. 그러나 간혹 가다 무예를 시험하는 행사가 있게 되면 임시로 집을 짓느라고 백성은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헐어가는 亭의 재목은 거의 죄다 썩고 상하여 바꾸어 새로 해야 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또 힐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말이 참으로 옳다. 나는 앞으로 즉시 이 亭을 짓기 시작하겠다.

그러나 시굴거영(時屈擧嬴, 쇠퇴한 시기에 사치스러운 일을 함)의 형편으로 백성을 동원시키기가 어렵지만 생각건대 營屬들이 수천명에 이를 정도로 많으니 그 番次로 편한 대로 일을 시키면 너희들에게 편파적으로 괴로운 일은 아닐 것이며 민간에게 소요를 일으킬 폐단은 없을 것이다.

너희들의 뜻이 어떠냐?” 하니 모두 승낙한다고 말했다. 드디어 재목을 모아 더 보태고 기와를 구워 보충하고 工匠들은 또한 영속이 아님이 없었다.


비로소 동짓달 초9일 공사를 시작하여 섣달 25일에 손을 뗐다. 먼저 규격보다 넓히지도 않으면서 후에 보더라도 소홀함이 없었다. 무릇 亭을 설치하는 게 본래 陣場을 위한 일이므로 營繕하는 物力은 이에 삼읍에서 공적으로 함께 부담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역은 州民이 간여하지 않았고 兩縣(정의, 대정)에서는 알지도 못했으며 다만 軍吏가 찬성해 준 힘이었다. 어찌 다행이 아니었겠는가!


나라가 태평한 날이 오래고 聲敎가 바다에까지 미치고 있어 비록 演武할 때를 당해도 그러나 文敎하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武備도 있어야 한다. 하물며 바다 가운데 탄알 같은 섬에 날뛰는 이웃이 검은 칠치(漆齒, 해적 왜구, 일본 풍속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이를 검게 칠한 데서 일본을 가리킴)임에랴!


흐리고 비올 때를 위한 준비를 미리 하지 않을 수 없으며, 弓馬의 재주를 연습해 두지 않을 수가 없다.

봄에 사냥하고 가을에 조련하니 비휴(豼貅, 사나운 짐승) 같은 자가 숲처럼 많아 칼 시합을 하고 화살촉을 울리기를 쨍쨍한 날에 번개치고 서리치듯 함으로써, 바다를 진압하고 변방을 안정하게 하며 적개심으로 바다를 제어하도록 하면, 거의 演武를 하는 뜻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아! 세상에 관리 된 자가 정우(亭宇)가 낡은 것을 보고서도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것을 퇴폐된 대로 놔 두다니…. 오늘 나는 비록 백성을 수고스럽게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軍吏를 수고롭게 하였으며, 다만 軍吏만 수고롭게 한 게 아니라 마음 속으로 괴로워하니 이는 내가 관에 있는 사람들에게 벼슬살이를 능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나 將吏를 거느리고 쇠고기와 술을 들고 한가한 날 이 亭에 오르니, 한라산에는 구름 걷히고 瀛海(제주 바다)에는 파도가 잔잔하였다.

정휘(旌麾, 지휘관이 쓰는 깃발)가 바람에 나부끼고 북치고 각 부는 소리가 맑고 웅장하여 마음이 트이고 정신이 즐거워 넋을 잃었다.

신기루에 절을 하고 홍몽(鴻濛, 하늘과 땅이 갈라지지 않은 원시시대)을 초월하는 듯하여 이 몸이 海島 천리 밖에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여 정말로 즐거웠다. 낙성연에 함께 있다가 취한 채로 記를 짓노라.」》(김익수 譯, 知瀛錄 52~53쪽)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제주조점’에 남문 남쪽, 모흥혈 서쪽에 연무정이 표시되어 있다. 그 옆에 社稷이 나란히 있었다. 그러나 영조17년(1741) 7월 태풍으로 다시 허물어졌다.

그 후 영조22년(1746) 한억증 목사가 지금의 제주동초등학교로 이설했다. 연무정의 건물은 정청 3칸, 동․서협 각각 2칸,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좌우에 문을 내었는데 공주(공동식당) 3칸이 서쪽 담장 밖에 있었다.(이도2동誌 187쪽) 그 뒤 정조4년(1780)에 목사 김영수가 중수했고, 헌종13년(1847) 목사 이의식이 중수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4월 한 때 감옥이 설치되었다가 철거되었으며 광복 후에 제주동초등학교가 들어섰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조병창이 있었다.

건입동지에 따르면 ‘감옥터’(건입동 1106번지) 서쪽 ‘감낭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어귀, ‘공덕동산’ 동쪽 입구 도로에서 남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서쪽으로 난 좁고 굽이진 골목 어귀가 옛 연무정 터이며 이 설명대로라면 건입동 1267번지가 된다.(위 사진)

현재의 제주동초등학교 쪽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고 한다.(건입동지 218쪽) 이곳은 도로명이 ‘연무정길’이다. 연무정터 표석은 제주동초등학교 정문 서쪽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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