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827년 12월 향교 상량문 제주향교에 남아..용담1동 심영석 목사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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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827년 12월 향교 상량문 제주향교에 남아..용담1동 심영석 목사 선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4.08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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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에 위치한 향교 터를 정한 것이 심영석임을 표시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용담1동 심영석목사선정비

 

沈使相英錫移建鄕校碑(심사상영석이건향교비)
•위치 ; 제주시 용담1동 298-1
•유형 ; 갈(碣, 송덕비)
•시대 ; 조선
•규격 ; 99.2㎝ × 38.9㎝ × 10.8㎝
•소유자 ; 제주도향교재단

용담1동_제주향교심영석이건향교비

 


앞면 ; 沈使相英錫移建鄕校碑
自卜吉基 移建校宮 扶植本原 永世立功
후면 庚寅 三月 日
(스스로 길한 터를 정하여 교궁(문묘)을 옮겨 세우는데 근본을 확립하였으니 세운 공 영원하리라. 1830년(순조30) 3월 일)

※ 심영석목사는 청송심씨이며, 1826년(순조26)에 도임하고 이듬해 8월에 파직되어 떠났다. 각 집마다 바치던 땔감과 숯 등을 감하여 주고 본전을 설치하여 주사(州司)에 맡겼다.

그는 광양에 있던 향교가 벌판에 있어 지세가 좋지 않아, 서문 밖 용담동으로 터를 정하고 향교를 상량하고 짓는 중에 파직되어 떠났는데, 이행교(李行敎)목사 때에 향교가 완성되자 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1827년 12월 향교를 상량할 때 심영석이 구목사로서 지은 상량문이 제주향교에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27년(1827)6월 15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으로 파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을 내려 경상 좌병사 윤재건(尹載鍵), 좌수사 유홍원(柳弘源), 제주 목사 심영석(沈英錫), 선천 부사(宣川府使) 신서(申緖)의 관직을 삭제하도록 하였는데, 전최(殿最)의 계본(啓本)을 신본(申本)으로 잘못 올렸기 때문이었다.》


※전최(殿最)는 조선시대 경외(京外)의 문무 관리의 공과근만(功過勤慢)을 조사하여 성적을 매기는 고과(考課)


※계본(啓本)은 조선시대 임금에게 제출하던 문서양식의 하나. 태종12년(1412) 장신(狀申)을 개칭한 것이다.

왕에게 올리는 문서로는 상소(上疏)·차자(箚子)·초기(草記)·계본·계목(啓目)·장계(狀啓)·서계(書啓) 등 다양한 양식이 있었다.

외방(外方)의 계본은 그 지방의 관찰사·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등이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는 데 쓰는 문서로서 이두를 섞어 썼다.

태종17년(1417) 입초(入抄)와 일반사무 이외에는 계본을 사용하도록 했으며, 성종20년(1489)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계본을 올리는 폐단을 시정하여 반드시 관원이 검토한 다음에 왕에게 제출하도록 했다.

계본에 대한 회답기한은 10일로 정했으며 헌종1년(1835) 계본의 지폭을 일정한 규정으로 통일했다.

2품아문에서는 왕에게 직접 계를 올리고 관문서로 조회할 수 있었으나, 그외의 아문에서는 모두 소속된 조(曹)를 통해 제출해야 했는데 계본식이라는 일정한 양식에 따라 문서를 작성해야 했다.


※신본(申本)은 왕세자(王世子)가 섭정(攝政)할 때에 판서(判書), 병사(兵使), 감사(監司), 제조(提調) 등이 올리던 문서(文書). 달본(達本)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는 현명원(玄明圓)의 반역 사건으로 파직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비는 지금 용담1동에 위치한 향교 터를 정한 것이 심영석임을 표시하고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일반으로 현재의 향교는 이행교목사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준공을 한 것이다.(자료 제공 김익수)


민속자연사박물관, 신촌리 애향탑 옆에도 심영석의 선정비가 있다.

 

 

 

 



《작성 110702》《수정보완 1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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