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조간대 상층..동복리 펄개(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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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조간대 상층..동복리 펄개(포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4.13 0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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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리는 어장 면적이 좁고 인근 북촌이나 김녕 마을에 비해 해산물도 많지 않다.

동복리 펄개(포구)

 

위치 ; 구좌읍 동복리 서쪽 바닷가
유형 ; 어로시설(포구)
시대 ; 조선

동복리_펄개포구

 

동복리_펄개포구

 

동복리는 16세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설촌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설촌 당시부터 김녕리에 속해 있었다. 옛 이름인 ᄀᆞᆯ막을 한자로는 변막(邊幕)이라 썼다.

邊幕은 ᄀᆞᆯ막이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875년 당시 초대 경민장이었던 신영수씨가 중심이 되어 김녕리에서 독립시키고 마을 이름도 동복리로 바꿨다.

동복리는 어장 면적이 좁고 인근 북촌이나 김녕 마을에 비해 해산물도 많지 않다.

옛 문헌을 보면 동국여지승람(1530년), 남사록(1601년), 탐라지(1653년)까지는 동복리의 포구는 언급되지 않았고, 이증(李增)의 남사일록(南槎日錄, 1680년)에 처음으로 변막포(邊幕浦)가 등장한다.

변막포는 북포(北浦)와 영등포(迎登浦)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703년)에도 북포(北浦)와 김녕포(金寧浦) 사이에 변막포(辺幕浦)가 보인다.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 1750년)에는 변막촌 아래 변막포가 있다고 하였다.

변막포(邊幕浦)는 조선 후기 변막촌(邊幕村)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딴 포구의 이름이다. 지금의 펄개를 두고 이른 말이다.

지금 이 마을 포구로는 동하동의 무근성창(묵은성창), 새성창과 서하동의 펄개라는 두 개의 포구를 거느리고 있다. 새성창은 새로 만든 성창(城艙)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마을의 맨처음 포구는 펄개였던 것이다. 펄개는 고랑머리와 가릿여 사이 후미진 곳에 있다. 어느 정도 뻘이 고이는 곳이라 펄개라고 했을 것이다.

펄개는 거의 너럭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간대(潮間帶) 상층에 걸쳐 있다. 그래서 어지간한 썰물에도 바닥이 말라버린다. 때문에 조금만 썰물이 나도 그 안으로 배를 들여놓거나 출항할 수 없다.

또 배가 커지면서 변막포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새성창을 마련하기에 이른 것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좌승훈의 『포구』, 서재철․강영봉의 『기억 속의 제주 포구』)
《작성 2011-07-04, 보완 20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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