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하동 재건 위해 ‘정착단’ 조직..조수1리 하동(잃어버린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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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하동 재건 위해 ‘정착단’ 조직..조수1리 하동(잃어버린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7.12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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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주지 않아. 거기서 조금 강냉이 받아 먹다가 웃동네(중동) 정착

조수1리 하동(잃어버린마을)터
 

위치 ; 한경면 조수리 1626번지 일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마을 터(잃어버린마을)

조수1리_하동집터 그릇조각.
조수1리_하동집터 흙벽.

 


조수리 하동은 조수국민학교가 있는 조수리의 중심 마을인 중동에 속했는데 4․3 당시 40여 호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당시 희생된 사람은 적은 편이다.

김창심씨(조수초등학교 교사로 근무중 1948년 11월 22일 학살)와 춘생이 동생이라는 분 이렇게 단 2명이 희생되었다.

김소정씨의 증언(111230)에 의하면 김 교사는 등사판을 잃어 버렸다는 이유로 학살되었다고 한다.

1948년 12월 3일 소개했다가 다음해 5월에 중동에 성을 쌓고 귀향한 하동 주민들은 살다 보니 하동을 복구할 필요성이 없었다. 중동에 살면서도 하동에 있는 밭을 경작하는 데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1954년 제주도와 정부는 잃어 버린 마을에 대한 복구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실행하면서 당국에서는 기존 마을 일부를 복구하고 여기에 기존 주민뿐만 아니라 피난민 중 희망자를 모아 복구 대열에 참여시키려 했다.

당국에서는 복구 자재와 구호미를 참여자들에게 제공하기도 해서 일부 마을에서는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대다수 마을은 배급이 끝나자 이주했던 주민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돌아가 버려서 실패했다. 조수리 하동의 경우 주민들은 이 계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1956년인지 1957년인지 하동을 재건하기 위해 ‘정착단’이 조직됐죠. 처음에 열댓 호가 가서 살았어요. 당시 이승만 정권 때인데 나라에서 먹을 걸로 강냉이 같은 것을 배급해 줬어요. 목재를 주지는 않았죠.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어요. 거기서 조금 강냉이를 받아 먹다가 웃동네(중동)에 정착해 버린 거죠.”


현재는 아스팔트 길이 하동 마을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옛 올레와 대나무숲, 팽나무 등이 남아 있다.(제주4․3유적Ⅰ 868~869쪽)
《작성 1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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