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먼저 쌓은 성 밖으로 다시 성 쌓아..명월리 고림동 안성 2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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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먼저 쌓은 성 밖으로 다시 성 쌓아..명월리 고림동 안성 2구역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7.2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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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림동 ‘안성’은 밑폭 3m, 윗폭 2m, 길이 300m 정도가 남아 있다.(제주4․3유적Ⅰ 808~809쪽)

명월리 고림동 안성 2구역
 

위치 ; 한림읍 명월리 352~353번지 일대
유형 ; 방어유적(성)
시대 ; 대한민국

고림동성담2

 


제주도 서부지역의 행정과 교육의 중심지였던 명월리도 4·3의 상처를 피할 수 없었다. ‘고림동’이라고도 부르는 명월상동은 갯거리오름을 배경으로 한다.

상명, 금악과 접하고 있는 상동은 중동이나 하동에 비해 해안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4·3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던 곳이다.

이 마을에 4·3의 회오리가 불기 시작한 것은 1948년 5월이다. 당시 한림지서를 습격하고 돌아가던 무장대가 독립촉성회 간부였던 김창현의 가족 4명을 비롯하여 한림면사무소 직원을 납치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 48년 8월부터 약 3개월간 철도경찰이 향사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무고한 주민들이 납치되어 옹포공장에 수감됐다. 산으로 들어간 자의 아내에게 남편을 찾아내라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1948년 11월 20일에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졌다. 명월 상동과 중동 마을은 하동으로 소개되었다. 주민들은 하동마을이나 인근 옹포리, 강구리 마을 등으로 피난살이를 해야했다. 토벌대는 상동과 중동에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고려시대 명월현이 세워진 이후 제주 서부지역의 중심지였던 명월의 향토유산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이후 무장대가 금릉리와 협재리 관공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토벌대는 무고한 주민들을 한림국민학교로 끌고 가 보복 살해했다.


1949년 봄에 명월 상동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토벌대의 지시에 의해 주민들은 마을에 성을 쌓았고, 그 성내에 명월 상동, 금악, 상명 주민들이 집단 거주했다. 당시 성 안에는 명월 상동, 상명, 금악 마을별로 10세대가 거주할 수 있는 함바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명월 상동을 재건한 지 2년 후인 51년 봄에 상명마을이 복원되어 상명주민들은 마을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난 53년 7월에 금악 마을 재건이 허락되자 금악 주민들도 고향으로 되돌아갔다.(제주의소리 080412 장태욱 글)


명월리 고림동(상동) 성담은 옹포공장에서 몇 달을 보낸 고림동 주민들과 상명․금악 주민들이 1949년 봄에 향사를 중심으로 복귀하면서 쌓은 성이다.

향사를 중심으로 10세대씩 기거할 수 있도록 길게 함바를 잇대어 짓고 동쪽에는 명월상동, 북쪽으로는 금악리, 남쪽으로는 상명리 주민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1951년에는 상명리 주민들이 고향으로 마을을 복구하면서 돌아갔다.


이 즈음 고림동 주민들은 금악리 주민들과 함께 먼저 쌓은 성 밖으로 다시 성을 쌓았다. 그 때까지 살던 함바가 너무 좁아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이름도 ‘안성’ ‘밧성’으로 붙여졌다.

또한 이 시기에 고림동에는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금악 지경까지 밭일을 가려면 경찰만으로는 경비 인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20세 이상 젊은이 20여명이 특공대였다. 그들은 경찰과 같이 밭일 나가는 사람들 경비를 서기도 하고, 성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들을 위해 순찰을 돌기도 했다.

금악리 주민들은 고림동에서 생활한 지 5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림동 ‘안성’은 밑폭 3m, 윗폭 2m, 길이 300m 정도가 남아 있다.(제주4․3유적Ⅰ 808~809쪽)


명월상동에서 농사를 짓고 생활하는 강창두(1946년생)씨는 4·3 당시 3살이었는데 토벌대에 의해 부친을 잃었다.


“마을이 소개되기 얼마 전 일인데, 아버지(강공효, 실종 당시 28세)가 삼촌(강공일, 당시 19세)과 바로 이 앞에서 얘기하며 놀고 있었는데 토벌대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끌고 갔는데 그 후 소식이 없어요.”

그렇게 끌려갔던 아버지와 삼촌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두 분은 모슬포에 있는 수용시설에 수감되었다가 주정공장으로 이감되었다.

그 후 육지에 있는 형무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강창두씨는 과부가 된 어머니 밑에서 피난살이를 해야 했다.


“마을이 소까이(소개, 疏開의 일본식 발음. 마을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해서 전소시키는 작전인데, 주민들은 이 작전이 일본군이 자행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이다)되자 외가가 있는 강구동으로 피신했습니다. 이웃들 중 일부는 옹포리로, 어떤 분들은 한림으로 갔어요.”


명월리 상동의 양용철(1943년생)씨는 여섯 살 때 토벌대가 들이닥쳤는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아버지(양사원)는 마을 훈장 선생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아버지와 집에서 한문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토벌대가 들이닥쳤습니다. 다짜고짜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군홧발로 아버지에게 발길질을 하는 겁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훈장이어서 그랬는지 잡아가지는 않았습니다.”


마을이 소개되자 양용철씨는 부모님과 함께 옹포리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마을이 복구될 무렵 사람들이 모여 성을 쌓던 광경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아무리 난리중이라 해도 토벌대들이 너무 무지했지요. 아무 죄목도 없이 사람을 끌고 가서 죽일 수가 있습니까?”(제주의소리 2008 장태욱 글)


4.3연구소는 군경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마을 자체를 잃어버린 제주시 화북1동 곤홀동과 해안마을소 피신해 있던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와 돌담을 쌓은 선흘리 녹선동성, 애월읍 수산리 예원동성, 어음리 머흘왓성, 저지리 수동성을 비롯하여 토벌대를 피해 숨어있던 마을주민들의 은신처인 세화리 다랑쉬굴과 선흘리 목시물굴, 그리고 희생터인 북촌리 너븐숭이 등과 함께 명월고림동안성에 대해서도 심층조사와 함께 긴급한 보전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건의한 바 있으나(제주의소리 040728) 2012년 1월 현재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고림동안성은 남아 있는 곳이 중간이 없어져서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1구역은 명상로 옆 353-1번지와 354-1번지의 경계로 남북 방향으로 200m 정도가 된다.

동쪽은 바깥이어서 수직벽이고 서쪽은 회곽도가 확인된다. 2구역은 352번지와 353번지 경계인데 동서 방향으로 100m 정도 성담이 남아 있으며 남쪽에 회곽도 흔적 일부가 확인된다.
《작성 1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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