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해녀와 애환 나누었던 장소..평대리 도께동산불턱(돗개동산불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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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해녀와 애환 나누었던 장소..평대리 도께동산불턱(돗개동산불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7.2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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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마을의 경우 해안도로 개설과 포구정비사업으로 불턱이 훼손돼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평대리 도께동산불턱(돗개동산불턱)

 

위치 ; 구좌읍 평대리 515-2번지 바닷가
유형 ; 어로시설(생산기술유적)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평대리_불턱

 


제주에 언제부터 해녀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에 전복 속에서 진주를 캤다는 기록이 나온 이래로 해녀는 각종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제주 해녀의 역사는 제주에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던 역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제주 해녀들은 맨 몸에 물소중이, 물적삼 등을 걸치고 수중에서 해산물을 채취했다.

전복이나 조개류를 채취할 때는 빗창을 사용하고, 해조류를 채취할 때는 호미류를 사용한다. 이들은 태왁이라 부르는 물체의 부력에 의지하여 장시간 바다에서 채취활동에 종사하고, 채취한 해산물은 태왁에 매단 망사리라는 그물주머니에 담아 보관한다.

특별한 잠수기구 없이 물 속에서 장시간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직업의 희귀성으로 인해, 해녀는 세계적으로도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다.(제주의소리 071114)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이르는 말로 제주에서 원래 쓰였던 말은 좀수(潛嫂), 좀녜/좀녀(潛女, '좀'은 아래아 발음) 등이지만 오늘날에는 해녀(海女)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제주의 여성들은 7~8세 정도면 바닷가 야트막한 물에서 수영을 배운다. 수영을 익히면 어린이용 테왁을 들고 물질 견습이 시작되어 13~15세까지 지술을 연마하면 숙련공이 된다. 물질이란 해녀가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잠수작업을 이르는 말이다. 개인차는 있으나 이후 숙련된 정도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누어 부른다.(제주문화17호)


이건은 광해군 복위를 모의했던 부친 인성군의 죄에 연좌되어 인조 6년(1628) 제주에 유배되었는데, 유배 기간 중 제주의 풍물을 자세히 기록해 <제주풍토기>라는 책을 남겼다. 그는 이 책에서 당시 제주해녀들이 겪는 고통의 실상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였다.


"해산물에는 단지 전복, 오징어, 미역, 옥돔 등 수 종이 있고, 이외에도 이름 모를 여러 종의 물고기가 있을 뿐 다른 어물은 없다. 그 중에서도 천한 것은 미역을 캐는 여자로서 잠녀(潛女)라 한다. (중략) 그들은 전복을 잡아서 관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팔아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생활의 간고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더구나 부정한 관리가 있어 탐오지심(貪汚之心)이 생기면 명목을 교묘히 만들어 빼앗기를 수없이 하므로 일년 내내 애써 일을 해도 그 요구를 들어주기에 부족하다." - 이건의 <제주풍토기> 중 일부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무역상 밑에서 일하는 한국인 객주들은 제주도로 몰려와서 전도금을 주면서 해녀들을 모집했다. 이 시기에는 제주를 떠나 한반도 본토는 물론이거니와 동북아시아 일대로 무리지어 물질을 떠나는 해녀들도 생겼다.


객주에게 전도금을 받은 해녀들은 객주들에게 얽매이게 되었다. 일본 무역상과 유착한 객주들은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사들일 때, 저울의 눈금을 속이거나 매입가를 헐값으로 정하는 방식으로 해녀들을 착취했다. 바다 사정이 좋지 않은 경우는 객주에게서 빌린 전도금을 갚지 못해 해녀들이 볼모로 잡히는 경우도 있었다.(제주의소리 071114)


해녀들은 공동으로 자신들의 밭인 바다를 관리하고 감독한다.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가 일하다가 뭍에 올라와서 쉬게 되는데 그 쉼터를 ‘불턱’이라 한다.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는 장소이며, 추운 겨울 물질을 마치고 불을 피워 몸을 덥히는 장소이다.

탈의실과 기능이 비슷하지만 담화의 공간이며, 물질 기술에 대한 전수의 공간이기도 하고, 공동의 의견을 모아내는 회의공간이기도 하다. 불턱에도 예절이 있다. 상군이 앉는 곳을 상군덕(턱)이라 하고 중군, 하군이 앉는 자리가 은연중에 정해져 있다.


소중기를 입던 시대에는 바다에서 장시간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물질을 하다가 중간중간 물밖으로 나와서 불을 쬐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다가 다시 바다에 들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고무옷을 입게 되면서는 물질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상대적으로 불턱에서 쉬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마을마다 현대식 탈의장이 있지만 십수년 전만 하더라도 해녀들은 모두 이곳을 이용했었다. 일부 마을의 경우 해안도로 개설과 포구정비사업으로 불턱이 훼손돼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순조25년 우의정 심상규의 글에 “한겨울에 전복과 미역을 채취하는 데 남녀가 옷을 벗고 바다에 들어가 떨면서 물결에 휩싸여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요행이며, 해안에 불을 피워 놓고 바다에서 나오면 몸을 구워 피부가 터지고 주름져서 귀신처럼 추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렇듯 불턱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해녀와 함께 애환을 나누었던 장소이다.(현장의 안내판, 제주문화17호)


현재 평대리에는 70여명의 해녀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소라 등의 헛무레를 하는 사람은 30~40명이다. 연령대는 50대가 대부분이며 연간 소라 20,000kg, 천초 4,000kg을 생산한다. 중동, 서동, 동동의 동회장 해녀 중 연합회장을 뽑아 해녀들의 물질 작업 가부 및 날자 등을 정한다.


동별로 자체적으로 전복 종패를 했으나 생존확률이 적었다. 해녀들은 돌을 뒤집고 불가사리나 성게 등의 해적생물들 잡아내며 어장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천초를 할 때는 어촌계에 속한 해녀들이 다함께 공동으로 입어를 한다.

동동, 서동, 중동 바다 순서로 입어를 하는데 특히 동동과 중동의 경계인 ‘진진여’, 서동과 중동의 경계인 ‘물안장’ 등에 천초가 많이 난다. 현재도 때때로 불턱을 이용하고 있으며 정비해서 잘 보존하고 있다.(해녀박물관)
《작성 1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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