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칠 문화칼럼)되찾아야 할 수로(水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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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 문화칼럼)되찾아야 할 수로(水路)
  • 강문칠 기자
  • 승인 2012.08.2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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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칠(전 제주예총회장,음악평론가.작곡가)


 

수로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 (서귀포 송산동, 바당이 보이는 집 전경)

‘西歸鎭은 서귀포에 있다’라고 하고, 동성(東城)안에 객사 별창 군기고 사정(활터)이 있다. 자그마한 저수지를 만들고 불을 저장한 다음 서성(西城) 밖으로 흘려보낸다.

정방연은 현<縣,정의현(성읍리)을 말함>의 서쪽 68리에 있다. 폭포가 있다. 상류에서 이 물을 끌어 들여 밭에 물을 많이 댄다. 고 했다.

이 물은 성안에 살고 있던 주민들과 병사들의 식수, 용수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에 따르면 논밭을 만들었는데, 이 水路는 탐라시대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이 물로 논과 밭을 일구었고, 중문의 천제연 폭포나 안덕계곡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있었다. 서신교에서 정방 수원지 쪽으로 20m 떨어진 동홍천(동홍동2,181)의 한 구역으로서 ‘고냉이 소(沼)’가 있다.

주변에는 정방사(정방사) 있어 불자들이 자주 찾곤 한다. 고양이가 빠져 죽은 못이라 해서 불려 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이 주변이 청결하지 못하여 고양이들이 들끓었는데, 고양이들이 죽으면 이 못에 던졌다고 한다.

 

정방천에서 서귀진성 까지 수로 지도

이 못은 용천수이기때문에 깊이는 양수기로 물을 퍼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깊고 물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서귀진성 안에는 남문과 서문이 있었는데, 성 아래로 구멍을 뚫어 물을 끌어다 왔다고 한다.
 

선조22년(1589년)10월부터 선조 25년(1592년) 3월 사이에 성안에 우물이 하난 있는데 성 아래로 구멍을 뚫어 물을 끌어다 왔음을 파악할 수가 있다.

서귀방호소를 선조 22년(1589) 10월부터 선조 25년(1592) 3월 사이에 옮겨 쌓응 9~12년 후에 일기로 작성한 「남사록」의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서귀방호소 안에는 식수로 사용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성 아래로 구멍을 뚫어 물을 끌어다 우물을 만든 것이다.

게다가 52년 후 효종 4년(1653) 서진은 정모소(정방연)의 상류를 동성 안으로 끌어들여 자그마한 나무로 만든못(木池)을 만들어 물을 저장한 다음에 서성(西城) 밖으로 흘려 보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 시대에 서귀진성에 있는 주민과 병사들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했음을 알 수가 있다.

 

정모시 쉼터

 

뿐만 아니라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 의하면, 이원조(이원조) 목사가 동쪽 성에는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다가 우물(정)을 만들었고 나머지 갈래는 속에 둔 구멍으로 흘러나가 성 남쪽의 밭에 물을 대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글의 다음에 ‘당초에 설치할 때에는 의견이 많았으나 농민들은 눈앞의 이익을 탐내어서 다시 수로를 뚫었다. 성안의 우물은 가뭄이 들면 마르므로 한탄스럽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것이 1914년 우면(右面) 서귀리 지적원도(地籍原圖)에 나타난 도랑(溝)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곧 대체로 서귀진성 밖에는 논이 많은데, 정방연의 상류를 끌어다가 물을 대었던 구(溝)의 시설이 가는 방향으로 파악할 수 가 있다.

수로의 길이는 정방천에서 서귀진성 터 까지 직경이 800여m이며 수로의 총 길이는 1.3Km로 되어 있다. 구 서귀포 시가지를 거의 반을 차지하는 길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수로의 넓이는 대략 1m 정도이고, 깊이도 1m로서 때로는 돌로 수로를 만들거나 바닥은 흙으로 된 곳이 있었다. 그러나 시멘트로 되어 있는 곳을 발견이 되는데 아마 그것은 일제 강점기에 손을 본 것으로 추정이 된다.
 

바다가 보이는 집 (수로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서귀포 송산동, 바당이 보이는 집
    서귀포의 수로는 오랜 기간 서귀포 시민들의 생활 속에 뿌리 박혀 왔다. 필자가 어린 시절(초등학교, 중학교) 시내를 흐르는 물과 함께 자랐다.

그러나 언제 수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지를 모르는 채 많은 시간이 흘렀다. 1976년 5월에 매립이 되어 도로를 분양하는 일이 끝나고, 활발한 개발이 이루어졌다. 논밭은 모두 사라졌고, 수로도 모두 덮어 버린 지 이제 4, 50년이 지나고 있다.

수로가 있어서 당시에는 불편한 점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도심에 도랑이라 할지라도 물이 흐르는 마을을 상상해 보면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다.

일부는 식수로, 일부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이 수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옛 서귀포의 동쪽에는 이 수로로 하여 많은 낭만이 있었다.

이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역사의 땀과 얼이 모두 지하에 묻혀 버렸다. 참으로 아쉬운 서귀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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