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이 장한철산책로로 바뀐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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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이 장한철산책로로 바뀐 이유는...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4.03.2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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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포커스)애월문학회 중심 해양문학 산실 추진..주목

아름다운 한담길

제주시 서쪽 곽지과물해변 옆쪽에 아름다운 해변산책길이 방문객을 환영한다.

한담이다.

이곳에 얼마전 장한철산책길이라는 표지석이 생겼다.

전에는 없었던 이같은 표지석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다.


왜 장한철산책길로 명명했을까.

 

장한철은 누구인가.

장한철은 1770년제주에서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5개월을 표류한 끝에 돌아와 1년후인 1771년에 쓴 세계해양문학의 4대 백미로 불리우는 ‘표해록’의 저자라는 것이 애월문학회의 평가다.

따라서 애월리와 애월문학회를 중심으로 그동안 장한철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1700년대에 한담마을에서 태어난 장한철은 생가도 지금 남아 있어 이를 복원하는 작업도 구상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제주시에서 2억7천만원을 들여 부지매입을 끝냈고 한담에서 열리는 청소년백일장도 2년째 운영했다.

 

앞으로 장한철생가가 복원되면 이를 중심으로 해양문학창작실을 개설하고 해양문학시비 건립, 산책길 등이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관광타운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이 사업을 모두 완성하려면 당초 2백억원이 투입돼야 할 것으로 분석돼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것.

하지만 우선 6억7천만원의 예산만 있으면 생가복원과 창작실은 만들 수 있어 이를 먼저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장한철산책로에 대한 도민들의 동의다.

얼마전 비자림로를 정운찬로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도로나 산책로에 이름을 명기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에 대한 우려가 많다.

이에 대해 장한철의 14세손이기도 한 애월문학회 장영주 회장(곽금초 교장)은 “장한철기적비에 적힌 내용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산책로 명명에 대해 비난하는 경우도 듣고 있다”고 말하고 “장한철이 한담산책로를 정말로 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태어나 살던 동네이고 이곳을 당연히 걸었을 것이라고 믿고 장한철산책로라고 정한 것이기 때문에 꼭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장 회장은 “이 구상은 박경리문학관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박경리문학관에 가 보면 박경리산책로도 있고 박경리문학관도 있어 앞으로 장한철생가를 중심으로 종합타운을 만들자는 계획으로 추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고 특히 한담산책로에는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군 동굴진지도 있어 이를 모두 활용한 애월지역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한담의 경우 자연 그대로를 살리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서 더 이상 개발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이곳을 찾아본 많은 사람들의 기대다.

한담을 장한철산책로로 특화시켜 이곳을 개발하기 보다는 한담은 자연 그대로 두고 주변지역을 활용, 지역자원화 하는 방안이 시급해 보인다.

 

이에 대해 애월읍 김문희 주민자치담당은 “장한철 생가복원을 위한 추진위가 지난 2월 발족돼 강용준 전 도문학회장을 중심으로 이경희 애월리장이 위원장을 맡아 현재 용역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며 “애월문학회 등의 요청으로 생가부지는 매입했지만 이후 다른 진척상황은 없다”고 밝혔다.

김 담당은 “당초 장한철산책로로 명명한 배경에 대해 당시 이를 추진한 이용화 국장에게 알아본 결과 애월문학회 등에서 한담공원에 기적비를 세우는 등 이 지역을 관광자원화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추진했으며 애월리나 개발위 등에서 한담마을내에 이 장한철산책로라는 표지석을 세워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수렴,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장한철의 『표해록』

 


장한철(張漢喆ㆍ1744∼?)의 『표해록』은 영조 46년(1770년) 마을 사람들의 권유와 관가의 원조로 서울에 과거 길을 떠났던 장한철이 폭풍을 만나 온갖 고초를 겪고 유구열도(琉球列島)에 표류하면서 겪었던 일을 한문으로 기록한 일기문 형식의 책이다.

영조 46년(1770년)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북제주군 애월읍 애월리 출신 장한철은 마을 부로(父老)의 권유와 관가의 원조로 1770년 12월 25일 김서일 등 일행 29명(장한철 포함)과 함께 과거보러 제주를 떠났다.

장한철 일행을 태운 배는 육지를 눈앞에 두고 갑자기 태풍을 만나 지향 없이 표류하면서 갖가지 고초를 겪고 사경을 헤매다 나흘만에 유구 열도의 어느 무인도에 도착한다.

5일만인 영조 47년 정월 초사흗날 무인도에서 안남(安南)의 상고선(商賈船)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본토 상륙 직전에 태풍으로 선체가 파손되고 21명의 동행자를 잃고 8명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장한철은 그후 서울로 올라가 과거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1771년 5월 8일 고향에 돌아온다.

『표해록』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제주를 떠났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과거시험을 봤으나 낙방하고 고향으로 되돌아 오기까지의 경과를 상세하게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태풍으로 노도근해에서 조난당하고, 유구 열도 호산도에 표착하여 왜구의 습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안남 상고선에 의해 구조됐으나 상선에서 봉변당하고, 청산도 근해에서 또다시 조난 당해 사경을 헤매다 21명은 죽고 8명만이 살아남은 과정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이 책은 당시 표류 상황뿐만 아니라 그가 경과한 경로를 더듬어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등을 담고 있어 해양지리서 역할 뿐 아니라 해양문학으로서의 가치 또한 높다.

장한철은 『표해록』을 쓴 후 4년만인 영조 51년 정월 과거시험에 합격해 대정현감 , 취곡현령 등을 지낸 바 있고, 문집으로 『녹담집(鹿潭集)』을 남겼다. 1979년 정병욱 번역으로 범우사에서 한글판 『표해록』이 출간됐다.
 

(표해록 출처=사이버삼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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