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읍리 금산공원과 연화못,'극과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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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읍리 금산공원과 연화못,'극과 극'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4.07.0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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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포커스)울창한 난대림 장관..연꽃, 진딧물이에 말라죽어..

▲ 금산공원 입구


납읍난대림(금산공원)에는 2백여종의 난대수종이 분포하는 조그만 곶자왈이다.
금산공원으로 불리우는 이곳은 초입부터 그 자태가 예사롭지가 않다.


왼쪽에는 수백년은 돼 보이는 폭낭과 오른쪽에는 후박나무가 탐방객을 압도한다.
산을 오르니 잘 정돈된 탐방로가 난대림을 보호하고 있었고 주요나무마다 표찰을 달고 있었다.

 

 

이어진 길마다 울창한 숲과 함께 산이 정기를 느낄 수 있는 포근한 곳이었다.


올레길과 이어진 이곳을 지나다 보면 마을포제를 올리는 포제당이 보이고 큰 소나무와 담쟁이가 이곳의 역사적 유물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 탐방길이 호젓하기만 하다

   
 

▲ 콩난이 나무줄기에 가득 붙어있다

 

▲ 아름드리 소나무가 잘려나간 흔적
▲ 나무표찰

하지만 이곳도 소나무 재선충으로 인한 피해는 벗어날 수 없었나보다,
이곳저곳 아름드리 나무들이 잘려나간 흔적을 보며 마음을 아프게 한다.


돌위에서 자라는 나무와 콩난이 나무마다 달라붙어 이곳의 식생이 얼마나 건강한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곧 쓰러질듯한 연꽃봉오리 

이곳을 내려와 연화못을 찾았다.
아름답게 피워있어야 할 연꽃은 피다말고 말라죽고 있었다.

지난 5일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씨였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 연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꽃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진딧물이 공격에 맥을 못추는 연꽃

진딧물이가 연꽃마다 달라붙어 꽃봉오리가 피기도 전에 연꽃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연못과 평소 보기 힘든 연잎을 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물위에 피는 수련은 몇송이 아름답게 피어 탐방객을 반기고 있었다.

▲수련은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진딧물이 방재가 시급해 보이는 아쉬움을 주고 있었다.

이곳을 찾은 한 관광객은 "연꽃을 보러 이곳을 찾았지만 연꽃이 봉오리 상태에서 모두 말라 죽어가고 있어 아쉽다"며 "영화못을 관리하는 곳에서 시급히 진딧물을 없애줬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전했다.

실제로 이곳을 빛나게 할  연꽃은 시커먼 짓딧물에 둘러싸여 말라죽고 있었다.

방재가 시급한 현장이다.

▲ 연꽃들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진딧물이 달라붙어있다 

 

 

 

 

납읍리 금산(錦山) 유래

 

한라의 영기 힘차게 뻗어내려 오좌자향(午坐子向)의 지세를 이룬 납읍리 금산공원(錦山公園)은 동북쪽으로는 곱게 단장한 고내봉(高內峯)이 향립하여 있고 남쪽으로는 강개동산이 후병(後屛)을 바쳐주고 있고 서남쪽으로는 검은닭마루 재석동산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하며 서북쪽으로는 관지악(郭支岳) 지반을 바쳐 호위하고 있어 우람하게 사방에 펼쳐있는 수려한 경관 그 정경은 모성애가 넘쳐 흐르는 어머니의 다정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서기 1670년경 외곽지역인 곰팡이 둥댕이 등지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마을중앙지점으로 집거(集居)하여 100여 가구에 달하는 자연마을이 형성될 무렵부터 마을중심 남쪽의 거대한 암석이 노출되어 시각상으로 불미(不美)할 뿐 아니라 동 마을댁거리 동네에서는 한림읍 금악봉이 화체(火 . 쥐)로 보여 금산에 나무를 심어 흉하게 보이는 화체(火體)를 막지 않으면 화(火)의 재해를 면키 어렵겠다고 하는 풍수지사의 결론이 내려져서 조림(造林)하였다.

 포제당을 버티고 서 있는 소나무의 위용

첫째, 재해를 막고, 둘째 미화(美化)하고자는 의견이 모아져 계획을 수립 식수(植樹)하는 한편 일체의 방목벌목(放牧伐木) 등을 엄금하였음으로 산의 이름을 금할 금자 (禁山)이라는 명칭이 부쳐졌다.

이제 금산공원(錦山公園)에는 신나무·가시나무·동백나무·상록수 등으로 난대림을 이루고 있어서 자연석과 더불어 수려한 경관을 이룸과 동시에 학술적 연구 자료로 가치가 인정되어 1966년 천연기념물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이 공원에는 22,078평의 규모에 200여종의 아열대 식물이 자라고 있어서 원시의 경관을 그대로로 보여 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처음에는 금할 금자 '금산(禁山)'이라고 불러 단순히 나무를 보호하는 산에 불과하였는데 몇 십년 동안 철저히 보호한 결과 난대림을 비롯하여 많은 수목이 자라서 그 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에 비단 금자 '금산(錦山)'이라고 글자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지난 1969년에 준공된 민속박물관에 고려사기 등 3백여종의 민속물이 보존되어 있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이 공원에는 제단을 설치하여 1년에 1회에 한하여 온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포제를 봉행하는 곳이며, 또한 선인들께서 글을 읽고 작시(作詩)하여 풍월을 즐기던 곳으로 송석대(松石台)와 인상정(仁庠亭)이 있어 지금도 시우회(詩友會) 등 모임이 있을 때는 즐겨 찾아 오고 있다.

김해(金海) 후인(后人) 김용징(金龍徵) 선생은 1843년 성균관 진사시(進士試)에 갑과문과(甲科文科)에 급제하여 제주 3읍 3향교도강사(都講師)를 평생 재임하시면서 그 유능한 수제자들이 여름에는 필히 이 공원에서 송석대와 인상정에 모여 앉아 선생님의 강의도 듣고 작시(作詩) 풍월 등으로 즐겨 찾던 곳으로 전한다. 
 

 

이리하여 이곳은 여름 한철 강의하여 공부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으며 교수방법과 학습과정을 살펴보면 예문유학(禮文儒學)을 숭상하고 문묘(文廟)를 숭배하며 유학의 정신과 한문학의 연수에 힘썼으므로 유능한 사장이 속출하고 각동(各洞)에 한문서당을 자설(自設)하여 문장독습(文章讀習)과 한시(漢詩) 등을 연마하여 여름이면 이곳 금산에 각 서당 학생들이 모여 학향(學向) 실력을 서로 겨루면서 문학향상을 도모하였으니 한 시대의 학향을 서로 비교평가하였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우리 납읍리가 문촌(文村)이라고 세인의 평을 받는 것은 유명한 문인들이 즐겨 찾는 금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금산은 납읍리 새마을회로 등기되어 있고 1955년경 재향군인회에서 말끔히 축성하였으며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지로서 유서깊은 곳이다.
 

(납읍리 마을소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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