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름비에서 막숙까지, 몽골지배 100년의 역사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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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비에서 막숙까지, 몽골지배 100년의 역사 현장을 가다..
  • 고희범
  • 승인 2010.10.1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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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고희범의 제주포럼C 4회 탐방 후기



몽골의 탐라 지배 100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최영 장군의 "목호의 난" 진압.

그 과정에서 탐라인들의 처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무려 100년을 지배해온 몽골의 잔재와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고려군의 공격은 당시 이곳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여몽연합군에 의해 최후를 맞은 삼별초의 항몽 전투 당시와는 어떻게 달랐을까?



"목호의 난" 그 마지막 흔적을 찾아가는 우리는 몇가지 무거운 질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백여년 전의 역사가 너무 멀리 느껴진 탓이었을까, 쾌청한 날씨 탓이었을까, 발걸음마저 무겁지는 않았다.



매년 음력 대보름이면 바짝 말라붙은 억새에 불을 지르는 "새별오름"은 파란 하늘 아래로 듬성 듬성 억새 군락을 품고 있었다. 해발 500여미터인 오름은 겉모양 만큼이나 부드럽고 포근했다. 정상에 올라서자 "고산지역 외에도 이런 넓은 들이 다시 또 있었구나" 싶게 눈 앞이 확 트인다. 어름비평원이다. 이곳이 바로 목호들과 고려의 대군이 격전을 벌인 현장이었다.
새별오름은 군데군데 억새군락이 가을을 알리고 있었고 경사면은 부드러웠다.





새별오름에서 내려다 보이는 어름비. 목호세력과 고려의 대군이 맞붙은 최대의 격전장이었다.



새별오름에서 내려와 다시 가까이 있는 "이달오름"과 "이달이촛대봉" 등 어름비를 둘러싸고 있는 오름 두개를 마저 올랐다. 어름비의 너른 들판만이 전투지역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 오름 모두가 그때 그 현장이었을 터이나 방목하는 소들이 풀을 뜯는 한적한 모습만 보일 뿐 격전의 흔적은 찾을 길 없다.

이달오름과 촛대봉 사이 목장에 방목중인 소들 가운데 한마리 흑우의 우람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제주포럼C>의 네번째 탐방은 두시간 반에 걸쳐 3개의 작은 오름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몽골은 삼별초 세력을 고려와 연합해 평정한 것을 계기로 탐라를 직할령으로 삼았다. 원종 14년(1273년)의 일이다. 몽골에게 탐라는 남송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이웃 나라 정벌의 전초기지이자 병참기지로 적격이었다. 탐라에 목마장을 마련한 것도 이런 목적에 맞는 일이었다.



이후 원나라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돌아간 뒤 원의 세조가 죽자 탐라는 고려에 환속됐지만 관할권만 달라졌을 뿐 실질적으로는 몽골의 지배가 지속되면서 탐라는 고려와 몽골에 이중으로 수탈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공민왕 대에 이르러서는 목호들이 탐라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은 원이 설치한 탐라 국립목장에 배속돼 말과 소의 사육을 관할하던 몽골인들이다.



공민왕 5년 국가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반원(反元)정책을 펴면서 탐라 관할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목호세력과 고려 사이에 여러차례 충돌이 벌어졌다.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4차례나 목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공민왕은 100척의 군선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목호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고려와 목호의 대결은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선 뒤 본격화한다. 공민왕 23년(1374년) 명은 탐라에 있는 원나라의 말 2천필을 고려에 요구했다. 고려는 이를 집행하기 위해 관리를 제주도에 파견했으나 목호는 "원의 원수인 명에게는 말을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마침내 공민왕은 군선 314척, 정예병 2만5천605명을 최영 장군에게 주어 목호 토벌을 지시했다. 요동정벌군이 3만8천830명이었던 데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 규모였고 당시 탐라 전체 인구보다 많은 병력이었으니 고려의 조정이 목호세력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는지 알 만한 일이다.



거기다 탐라민이 처음에는 몽골인들에게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지만 10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몽골인들은 친숙한 존재가 됐을 법하다. 몽골 이름을 쓰는 탐라인들이 나타나기도 했고, 탐라의 정씨 여인은 목호의 난 와중에 몽골인 남편이 전사한 뒤 그의 미모를 탐낸 고려 진압군 장교의 결혼 강요를 뿌리쳐 열녀로 공식 기록되기도 한 점, 탐라에 주둔한 몽골의 군사는 1400~1700여명에 불과했으나 여러차례 고려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점은 탐라민이 목호세력의 강력한 지지기반임을 말해준다. 고려 관리의 가렴주구가 탐라-몽골 혼혈인들은 물론, 탐라인까지 자연스럽게 목호 편에 가담하게 만든 요인이 된 것이다. 결국 고려군의 진압 대상은 목호 뿐 아니라 탐라민 전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출정 한달여 만에 최영의 군대는 명월포에 도착했다. 목호군은 기병 3천여명에 보병까지 출동해 명월포에 포진했다. 최영은 먼저 전함 11척의 군사를 해안에 상륙시켰으나 이들 모두 살해당했다. 최영의 군사들은 최정예의 대규모 병력으로 구성됐으나 상륙하는 군사들이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자 최영은 하급 장교의 목을 베며 전투를 독려할 정도였다.



본진이 상륙하면서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명월포에서 밀리기 시작한 목호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밝은오름(한림읍 상명리), 검은데기오름(애월읍 유수암리), 어름비(애월읍 어음리), 새별오름(애월읍 봉성리), 연래(서귀포시 예래동), 홍로(서귀포시 서홍동)에 이르기까지 계속 밀려났다.



마침내 목호군의 우두머리인 석질리필사는 가족과 측근 수십명과 함께 서귀포 앞 범섬으로 도주했다. 그가 범섬을 최후의 근거지로 삼기 보다는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할 시급한 피신처로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온통 절벽으로 둘러쌓여 외부의 접근이 어려운 천혜의 요새이기는 하지만 식량 보급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근거지가 될 수는 없는 곳이었다.
고려의 대군과 맞붙은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한 목호군 수뇌부의 최후 피신처였던 범섬



범섬 앞 법환포구에 군막을 친 최영의 군대는 이곳에서 숙영하면서 공격방법을 찾는다. 비록 작은 섬이기는 하지만 해안에서 1.3km나 떨어져 있고, 배를 붙일 곳 하나 없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을 공략하기가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고려군은 전함 40척을 이어 묶어 섬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법환포구 일대는 "막숙"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범섬과 최단 거리로 배를 연이어 묶은 지점은 "배염줄이" 또는 "배연줄이"라고 부른다.





 
범섬 앞에서 바라본 법환포구. 이 일대에 최영의 2만여 고려군이 군막을 쳤다.




출정군이 범섬으로 건너가자 수뇌부의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석필리질사는 처자식과 함께 항복했다. 최영은 항복한 석필리질사와 아들 3명을 목베어 죽이고 자살한 수뇌부의 시신을 찾아내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이로써 100여년간 이어진 몽골의 탐라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최영의 목호 토벌은 당시 탐라인들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 바라보는 탐라인의 시각이 역사기록으로 남아있다. 조선시대 들어 태종 때 제주판관 하담이 40년 전 사건인 목호의 난에 대한 얘기를 목격자로부터 듣고 기록한 것이다. 목격자의 증언은 이렇다.

"우리 동족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가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

고려와 목호 사이에서 당시 탐라민들은 "생각하기만 해도 목이 메일" 만한 피해를 입은 "변"을 겪은 것이다. 탐라민에게 고려군은 구원군이 아니라 또다른 침략자요, 학살자였던 것은 아닐까?



그러면 100여년 동안 고려와 원의 이중 수탈구조 속에 놓였던 탐라가 몽골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 고려에 다시 귀속된 뒤 탐라인들은 해방과 평화를 누렸을까? 최영의 정벌 이후 탐라인들은 더 많은 수탈을 당해야 했다. 명은 대놓고 고려에 탐라산 말의 조공을 요구했고 고려는 그 요구에 충실하게 응했다. 실제로 탐라는 고려 우왕 5년(1379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까지 13년 동안 무려 2만필 이상의 말을 바쳐야 했다.



우리는 몽골지배 100년의 마지막 현장을 찾아 범섬으로 향했다. 낚시배로 범섬을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섬 가까이 배가 다가가자 일행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해설자 한상희(서귀중 교사) 선생의 역사해설을 들으면서 조금 전까지 무거워졌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범섬의 경치에 흠뻑 빠져들고 만 것이다.

잘 발달된 수직 주상절리로 깎아지르게 벼랑을 이룬 섬은 천혜의 요새였다.




섬 위쪽은 평평하고 남쪽 가장자리에서는 용천수가 솟아 50~60년전만 해도 사람이 살면서 가축을 기르고 고구마 농사를 짓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섬 정상부에는 사람이 살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범섬 남쪽에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나무가 없어 바위 투성이지만 북쪽에는 돈나무 구실잣밤나무 해송 등이 울창하다. 특히 난대성식물인 "박달목서"라는 희귀종 1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상록활엽수림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215호인 흑비둘기가 서식하고 있어 섬 자체가 제주도지정 문화재기념물 제46호로 보호되고 있다.

상록활엽수림이 지방문화재로 보호될 만큼 무성한 숲을 자랑하는 바위섬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범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름이 5백미터쯤 되는 크기의 범섬은 주상절리가 수직으로 발달돼 섬을 둘러싸고 있고, 주상절리에 구멍이 뚫린 모양을 하고 있는 타포니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호랑이 콧구멍" 두개의 인접한 해식동굴은 영락없이 콧구멍을 닮았다.

 




섬 주위에는 크고 작은 해식동굴이 있다. 같은 크기로 나란히 생긴 두개의 해식동굴은 "호랑이 콧구멍"으로 불리고 그 반대쪽의 커다란 해식동굴에는 "호랑이 똥구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랑이 콧구멍 반대쪽에 있는 해식동굴. 법환 사람들은 "호랑이 똥구멍"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이 붙어있지 않은 작은 해식동굴도 있다.

 





범섬 주변은 물이 맑은 데다 기복이 심한 암초로 뒤덮여 있어 다이버들과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6월부터 7월까지는 감성돔, 벵에돔, 참돔이 잘 잡히고 겨울철에는 자바리, 참돔, 돌돔 등이 많이 잡힌다고 한다. 법환포구와 강정포구에는 범섬으로 낚시를 가는 낚시꾼들을 태워주는 낚싯배들이 있다. 우리가 탄 배도 이 낚싯배였다.

40여명의 다이버들이 차례로 입수 준비를 하고 있다.


  몸을 움직일 공간조차 없어 보이는 바위에서 낚시꾼들이 낚시에 열중하고 있다.



큰섬에 이웃한 작은 섬은 "새끼섬"으로 불린다. 새끼섬의 북쪽면은 큰섬 처럼 주상절리로 이뤄져있지만 남쪽면의 암석은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법환의 한 주민은 새끼섬에 서 있던 돌기둥이 언젠가 큰 태풍이 온 뒤 부러졌는데 이후 법환리에서는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고 했다.

큰섬 왼쪽의 새끼섬은 그 이름 만큼이나 아담하다.

새끼섬 남쪽면. 바위가 갑옷 모양을 하고 있어 "장군바위"라는 별명이 있다.



새끼섬 북쪽면. 큰섬과 비슷한 모양의 주상절리가 보인다.






역사는 최영 장군이 "목호의 난"을 평정함으로써 몽골지배의 100년 역사를 마무리한 현장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당시를 살던 제주인들에게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살륙과 목이 메일 희생을 거쳐 지배세력이 교체된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비극의 마지막 현장이었다.

그 역사의 현장을 뒤로 하고 우리는 범섬의 아름다움만을 기억에 담은 채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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