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 영원한 화두, 에로스
상태바
[행복한 인문학] 영원한 화두, 에로스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6.12.28 16: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랑의 신비란 아름다움의 고양 과정이다

 

 에로스, 사랑의 응시.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사랑이란 인류의 영원한 화두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랑이 존재하고, 영화와 문학과 예술은 사랑의 의미와 승화를 위한 저마다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원한 미스터리처럼 다가온다.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사랑을 에로스(큐피드)와 아프로디테(비너스)를 통해 의인화 하였다. 에로스도 성애를 나타내는 신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사랑의 모든 과정, 즉 감정과 이성과 육체와 가치를 담고 있는 생산적 원동력을 표현한다면, 아프로디테는 단지 성적인 과정의 육체적 사랑을 주로 의인화 하고 있다. 그녀는 성행위와 육체적 찬미의 교감을 통한 것만이 사랑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프로디테는 성교를 거부하는 모든 가치를 비웃는다. 직접적인 성교 없는 생산과 사랑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랑이 우리를 주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가? 그리스 인들의 프리즘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행복의 조건을 생각해 보자.

 

 아프로디테와 에로스가 있는 알레고리, 어리석음과 시간.  브론치노 1545. 런던 국립미술관

 

에로스의 계보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에로스의 탄생은, 천지창조과정에서 최초의 카오스(혼돈)에서 가이아(대지)가 나오고 타르타로스(지옥)와 함께 태어났다. 에로스로 인해 세상은 비로소 새로운 생성과 창조적 운동의 원동력을 얻었으며, 힘찬 역사의 바퀴를 굴리게 된다. 이것은 신과 사람의 몸에 내재된 생명적 증식의 원천인 성적 생식력을 의인화한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인 ‘새’에서는 오르페우스교에서 설명하는 에로스의 탄생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최초의 창조과정에서 아직 대지도, 대기도, 천공도 없을 때, 밤의 여신 닉스(Nyx)가 가져온 세계의 알에서 태어난 것이 만물의 창조자인 에로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을 빌어 이야기하면, 호두알만한 것에서 빅뱅에 의하여 우주가 탄생했다는 것과 유사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처음에는 에로스는 원초적 신으로서 위대한 힘을 지녔지만, 점차 신이 아닌 사랑의 정령으로 전이되어간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신으로서 숭배된 적이 거의 없으며, 그에 대한 신앙은 남근석 숭배라는 모습으로 일부 전해졌으며, 기원전 4세기경부터 조각상이 등장하면서 의인화되었다. 그렇지만 에로스는 신들과 인간을 모두 지배하는 위대한 정령(다이몬)이며, 혼돈 속에서 질서를 낳는 원동력이고, 남성과 여성을 결합시켜 새로운 세대를 낳게 하는 사랑의 주재자로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술에서의 에로스는 기원전 6세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날개가 없기도 하고, 날개가 있는 청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가 기원전 5세기경부터 날개가 있는 소년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스시대 말기인 헬레니즘 시기가 되면 에로스는 신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화살로 신이나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는 어린 아이나 소년으로서, 문학과 미술의 주제로 변이된다. 거기에 에로스에 대응하는 여성상으로서 나비의 날개를 가진 프시케가 새롭게 등장한다. 에로스와 프시케는 사랑과 혼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의인화 한 것인데, 이러한 이야기는 그리스 말기와 로마시대에 유행하였고, 문학과 미술의 풍부한 소재로 이용되었다.

에로스는 사랑, 또는 성애적인 사랑의 신이며 라틴어로는 ‘아모르’나 ‘큐피드’라고 한다. 장난기 많은 젊은 신이며 시기심과 버릇이 없는 어린 신이다. 동성애의 수호신이기도 하며, 사랑과 낭만의 대변자이다. 화살 통에는 황금 촉과 납촉을 단 화살이 가득한데, 황금 화살촉을 맞으면 처음 만나는 대상에게 신과 인간 모두 사랑의 격정을 누를 수 없게 되었고, 납 화살촉에 맞으면 사랑을 거부한다고 하였다. 사랑이 흔히 맹목적이듯 에로스의 행위도 그래서 맹목적인데, 이러한 묻지마 식의 버릇없는 행동으로 에로스 신화는 다양하고 복잡한 사랑이야기가 종횡무진 전개된다.

 

 

 에로스. 카라바지오

 

에로스의 철학적 고찰

플라톤은 전설상의 인물로서, 아르카디아 남동쪽에 있는 만티네이아의 무녀 디오티마(Diotima)에게서 들었던 에로스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디오티마는 플라톤의 ‘향연’에 등장하여 풍요의 신 포로스와 가난의 여신 페니아 사이에서 에로스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또 플라톤의 ‘향연’에는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철학자들의 토론에서 에로스를 두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옛날에 인간은 팔과 다리가 각각 4개가 달려 있었고, 얼굴도 두 개로 앞뒤로 향해 있으면서 원형이었는데, 그것이 제우스에 의해 절반으로 절단되어 각각의 반쪽을 찾는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우화도 실려 있다.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설화에서는 에로스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다이몬(정령)으로서 사랑의 길이라는 지상의 아름다움과 신적인 아름다움까지 이르는 모습으로 나아간다는 인간성의 협력자로 보고 있다.

즉 에로스는 완전하지 않고, 결여된 상태로서 지고의 선과 아름다움을 향한 상승을 갈구하며, 그 결여된 선과 미를 완성하려는 획득 충동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인간의 문화를 발전시키며, 동시에 혼란과 투쟁도 발생된다는 것이다.

 

 에로스와 프시케. 엘 프랭

 

에로스는 흔히 아가페(agape)와 대비되어 설명된다. 에로스가 충동적이고 성적인 쾌락의 사랑을 말하는데 비해, 아가페는 기독교적인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 인간 상호간의 순수한 정신적 형제애를 의미한다. 이러한 아가페적인 사랑은 에로스적인 사랑을 세속적이며 부차적으로 취급한다.

헤로도토스같은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에로스를 우주의 혼돈에서 질서로 편성하는 원초적인 힘으로 간주하여 ‘생명’이나 ‘삶’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에로스는 ‘타나토스(죽음)’와 대립하는 의미로도 해석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남녀가 열중하는 연애는 ‘종옥의 의지’로서의 성충동 발현에 의한 비희극적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의식적 사고와 무의식 세계의 모순을 설명하면서, 무의식 세계에 지배적인 것은 쾌락원칙에만 충실한 성적 충동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아성욕의 전개과정도 명쾌하게 과학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문화가 성적충동을 절제하고 단념하여 정신적으로 승화함으로써 성립한다고 하였다. 또 에로스의 성적인 본능은 살아있는 모든 생물들의 두 가지 본능인 개체유지를 위한 ‘자아’ 또는 ‘자기보존’ 욕망과, 종족보존을 위한 ‘성적 욕망’으로 해석했다. 그는 그래서 이러한 자아보존 욕구가 성욕에 대한 에너지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뒷날 그 생각에 의심이 들어 에로스적인 성적 욕망이 ‘삶의 욕망’에 포섭되어 ‘죽음’에 대립되는 에너지로 해석했다. 그래서 그는 에로스가 단지 성적인 동인뿐만 아니라 생명 일반이 지니는 성장과 발전의 원리이며 죽음, 파괴, 혼돈을 회복하는 의미로도 설명하고 있다. 즉 죽음의 본능(충동)과 대비하여 각 생명체가 큰 통일체로 정리해 나가는 충동이 에로스이며, 문화도 결국은 에로스에 봉사하는 한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에로스의 사랑의 사냥. 에드워드 번 존스

 

아무튼 에로스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은 가장 그리스다운 관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그의 저작인 ‘향연’에 등장하는 에로스 이야기는 자웅동체에 관련된 부분과 에로스의 탄생에 대한 디오티마의 설명이다. 플라톤은 시인 아가톤(Agaton, 기원전 445~ 400)이 비극경연 대회에서 우승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대한 축하연을 벌였는데, 참석자 사이에서 사랑을 주제로 대화가 시작되자 소크라테스가 만티네이아의 지혜로운 여사제 디오티마로부터 전해들은 에로스의 탄생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의 탄생

 

플라톤은 ‘향연’에서 가상의 인물인 디오티마를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하게 하면서 에로스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위대하다거나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만은 아니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에로스가 위대하다고 하는데, 그는 위대하지도 않고 추하고 나쁜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디오티마는 “아름답지 않다고 추한 것은 아니다. 지혜롭지 못하면 무지한 것인가?, 지혜와 무지사이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역공한다.

디오티마는 “지혜와 무지 사이의 그 무엇이란, 옳은 의견을 갖고 있지만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명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어서 지식도 아니지만 무지도 아닌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아름답지 못하다고 추한 것만은 아니며, 위대하지 않다고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처럼 에로스가 위대한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불멸과 필멸의 중간존재의 신으로서 에로스를 상정하면서 위대한 정령(다이몬)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 정령들은 인간과 신들 사이를 오가며 신들의 명령을 전하고, 인간의 제물을 보답하는 신의 선물을 전하는 사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에로스는 신과 인간의 양자 사이에서 간극을 채워 전체로 묶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디오티마가 말하는 에로스의 탄생은 이렇다.

아프로디테가 탄생했을 때 신들이 축제를 벌였는데, 참석자중에 메티스(제우스의 첫 번째 아내)의 아들 포로스(방편의 신)도 있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날 무렵 페니아(가난의 여신)가 구걸을 하며 문간에 서 있었다. 포로스는 넥타르에 취해서 제우스의 정원에서 잠이 들었는데, 방편이 없던 페니아가 포로스의 아이를 갖고자 작정하고 포로스와 살을 섞어 에로스를 잉태하였다.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의 추종자이자 시종이 된 것은 에로스가 아프로디테의 생일잔치 때에 잉태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로스는 본성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므로, 당연히 아프로디테의 주위를 배회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에로스는 포로스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페니아의 아들이어서 언제나 가난했다. 그리고 아름답고 부드럽기보다는 딱딱하고 더럽고 맨발로 다니며 길거리에서 자고 거적도 집도 없이 살았는데, 그 이유는 어머니의 타고난 본성인 ‘결핍’이 따라다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에로스는 한편 아버지를 닮아서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것들을 얻을 방편을 마련하는 능력이 있고, 영리하고 대담하여 새로운 계략에도 능하였다. 그러면서 지식을 열망하고 재간둥이로서 지혜를 추구하며 마술, 언변, 약초, 사냥에 능했다. 이렇게 불멸과 필멸의 존재가 아닌 신으로 에로스는 방편으로 번창한 삶을 살기도 하고, 때로는 죽어가기도 하다가 다시 방도를 구해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래서 에로스는 부유하지도 않지만, 방편도 존재해서 가난도 이겨낸다.

에로스는 지혜와 무지의 중간에 있는데, 신들은 이미 지혜로워서 지혜를 사랑하거나, 지혜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신은 없다. 즉 지혜로운 자는 이미 지혜를 가졌으므로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무지한 자는 무지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무지란 아름답지도 훌륭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은데 그러한 자기를 만족해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결여된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래서 원하지도 못한다.

그리하여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로운 자와 무지한 자의 중간에 있는 그 무엇이며, 그 이유는 그의 부모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지혜롭고 방편이 있지만, 어머니는 무지하고 방편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에로스의 본성이라고 디오티마는 말한다. 그래서 에로스를 위대하고 아름다운 본성을 지닌 신으로 생각하지만, 잘 살펴보면 에로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에로스.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그러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인간에게 그런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다. 플라톤은 “사랑이란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디오티마는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여 얻는 것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디오티마는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행복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누군가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누구는 아니라고도 하기 때문에 공통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랑을 떼어내 다른 종류의 사랑에도 갖다 붙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디오티마는 “좋은 것과 행복에의 욕구는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것인데, 그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즈니스나 운동, 철학으로 사랑을 지향하는 자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 종류의 사랑만 죽도록 추구하는 자들만이 ‘사랑을 느끼고’, ‘사랑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랑은 자신의 반쪽을 찾는 일이라고 전해오지만, 사랑은 반쪽도 찾지 않고 전체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병이 들면 자신의 손과 발도 잘라내 버리듯이 아무리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이라도 무조건 반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좋은 것이 아니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쪽이라고 모두가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것들만 사랑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좋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 정당한 것일까? 그리고 영원히 놓고 싶지 않은 것일까?

디오티마는 이러한 속성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러한 욕구가 생기는 것은 몸이나 혼이 아름다움 안에 살아 있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임신 중인데, 성인이 되면 본능적으로 출산을 원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추함 속에서의 출산을 기피하려고 하고, 아름다움 안에서만 출산을 원한다. 이 출산은 바로 남녀의 교합을 말한다. 이러한 임신과 출산은 신적인 일로, 필멸의 존재 안에 불사의 요소를 담은 것이다.

그러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안에서, 즉 추한 것 속에서는 신적인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 안에서만 신적인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출산에서는 아름다움이 곧 운명의 여신과 출산의 여신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신한 것이 아름다운 것에 다가가면 너그럽고 부드러워지며 기분이 좋아지게 되며, 이것이 생식과 출산의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임신한 몸이 추한 것에 가까이 가면 움츠러들고 뒤틀리며 생식에 실패하면서 태아를 붙들고 힘들어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임신하여 부풀어 오른 자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크게 들뜨는 까닭은 아름다운 자가 임신한 자를 산고에서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랑은 생식을 동반해야 하는데, 이는 필멸의 존재가 영속적이고 불사의 연계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사랑은 불사를 원하는 것이다. 사랑과 욕망은 이런 것이지만, 동물들은 생식을 원하는 시기가 오면 병적인 애욕으로 짝짓기에 목숨을 걸며, 출산과정에서 잡아먹히기도 하고 새끼를 위해 어미는 굶주림에 시달려 죽기도 한다. 즉 동물들도 새끼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그러한 행위를 하지만, 동물들은 새로운 생명체를 남겨 낡은 것을 대체한다.

 

동물과 인간은 평생 동일한 개체가 아니라 점차 몸 전체를 상실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몸뿐만 아니라 영혼도 같은 과정을 밟는다. 습관이나 성격, 지식이나 쾌락, 고통과 두려움도 혼 안에 머물지 않고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학습은 그래서 낡은 지식이 떠나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학습은 떠나가는 지식을 대체하여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며, 같은 지식으로 보이도록 보존한다. 필멸의 존재는 이런 식으로 불사의 지식을 보존하여 신적인 존재처럼 영원히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늙어서 소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를 닮은 젊고 새로운 것을 뒤에 남김으로서 보존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방책으로 불사에 참여하는 것이 인간이며, 만물은 본성상 불사를 염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불멸의 욕심 때문에 명예를 남기고 싶어 하며, 돈을 쓰고 자식도 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불멸의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불후의 미덕이란 자신이 불사의 명예를 얻으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에로스의 화살. 도소 도시. 1528년

그리고 육체적으로 임신한 자들은 여자에게 끌리는데, 그런 사랑은 아이 낳기를 통해 불사와 기억을 확보하여 행복으로 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임신하는 자들도 있는데, 몸보다 혼 안에서 임신을 하는 자들로 이들은 지혜와 미덕에게서 임신하고 출산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들이 낳는 것은 시이며 장인들의 창작이다. 그리하여 가장 아름다운 지혜는 국가와 가정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으로 그것을 ‘절제의 정의’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몸과 아름다운 혼의 결합은 미덕과 자질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사람의 자식보다도 그런 종류의 자식을 낳기를 바란다. 그런 자식들은 불멸의 존재들이어서 영광과 명성을 안겨주며, 스스로도 불멸이 되는 것이다.

 

디오티마는 이러한 사랑의 비의를 말하며 어떻게 입문하는 것인지 방법론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말하기를, 먼저 젊어서 아름다운 몸들에 초점을 맞추고 한 사람의 몸을 사랑해서 아름다운 자식을 거기서 낳아야 한다. 그리하여 한 몸의 아름다움은 다른 몸의 아름다움과 다르지 않다는 것, 모든 몸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도록 한다. 즉 깨달음이란 한 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착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몸을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육체보다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여, 비록 어떤 이가 육체는 아름답지 않아도 혼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를 사랑하고 보살피며, 젊은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담론을 낳고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활동과 법률, 모든 존재가 다 아름답다는 것에 주목하며, 궁극적으로 이들을 하나로 보게 하여 몸의 아름다움은 상대적으로 사소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지식으로 나아가 특정 몸이나 사물에 매이지 않고 더 이상 그것의 노예와 종노릇을 그만두고 옹졸함과 편협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의 넓은 바다로 나아가 지혜를 향한 무한한 사랑에서, 아름답고 웅장한 담론과 사상을 낳게 하며, 드디어 힘이 커지고 몸집이 불어나면, 항상 있는 것이어서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것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늘지도 줄지도 않고 아름답지만 추한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는 추하지만 누구에게는 아름다운 것들도 경계가 없어지며, 아름다움은 얼굴이나 손이나 몸의 어떤 부위에만 모습을 나타내지 않게 된다. 또 담론이나 지식, 동물이나 대지나 하늘이나 사물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형상도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하기도 하지만 모든 아름다움에 관여하며 조금도 늘거나 줄지 않고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착과 어린 아동이나 청년을 아끼는 일을 뒤로하고 이러한 경지를 받아들이면 목표에 도착한 것이고 아름다움을 식별하게 된 것이다.

 

 에로스와 아프로디테. 로렌조 로또

사랑의 신비로 올라가는 길은 다른 사람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것을 계단으로 이용해 꾸준한 고양을 통해 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한 몸에서 두 몸으로, 거기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퍼지며, 그것은 아름다운 활동과 아름다운 지식, 거기서 또 특별한 지식으로 나아감으로써 아름다움 자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살 만한 곳이란 바로 이러한 사랑이 있는 곳이다. 그 아름다움은 황금이나 고운 옷, 잘생긴 청년들이 아니라 필멸의 허접한 것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움 자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단일 형상의 신적인 아름다움은 실제하며, 이러한 아름다움을 관조하면서 이 아름다움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삶이 아니라 진정한 미덕을 낳게 되어 불멸의 사랑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진정한 미덕을 낳아 기르면 그는 신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인간도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론은 사랑이란 신들의 사랑을 받고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조력자가 바로 에로스이며, 그의 능력이며 사랑의 용기라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