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 실제를 존중한 아웃사이더 ‘왕충’
상태바
[행복한 인문학] 실제를 존중한 아웃사이더 ‘왕충’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1.03 1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황된 도사들과 가짜 복술에 농락당하는 세상을 구하라

인생은 불완전하고, 균형잡기 어렵고 그래서 불안하다. 연이은 시련과 불안정함, 그것이 삶의 과정이고, 무엇하나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나 점술같은 것에 의지하려고 한다.

인간의 생명현상이며 풀 수 없는 정신적 지적 능력에 대해서 당신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인간은 우연한 자연의 산물일까? 아니면 신의 창조물일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만약에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지구와 우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인간의 육체로 화합하지 않았다면 물론 다른 에너지나 빛과 소리, 미세한 파장의 형태로 어딘가에 원자나 분자나 혹은 미립자로 이 우주의 한 요소가 되어 떠돌 수도 있었겠지만, 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개체, 개성, 개아가 자아적 관념을 형성하며 당당히 우주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인류원리에 해당한다. 인류원리란(혹은 인간원리) 인간이 존재하므로 세상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천체물리학적인 설명도구다. 왜 오늘 이 시점에 나는 태어나고 존재하는가? 그것은 내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재 조건 때문에 우주가 존재했고, 그래서 현재가 존재한다는 조건논리이다.

태어난 인간 개체는 인생을 여행하면서 먼저 생존본능을 지니고 식욕을 시작으로 필요한 물질적 조건에 욕심을 내면서 성장한다. 어느정도 자라면 세상에 생존하기 위한 각종 정보와 지식, 기술과 방법들을 습득하고 또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통해 학문과 문화적, 예술적, 사회적 상호연관들을 습득하며 윤택한 생존의 조건들을 주변에 펼쳐놓으려 한다.

암수 쌍으로 존재하는 우주의 대칭적 모든 존재형태로 볼 때 성적 욕구는 당연한 인간의 습성이먀, 그에 따른 질 높은 연애욕구와 가족을 만들고 싶은 욕구, 자신의 종을 보존하려는 번식욕구와 그것을 잘 지키고 연속시키려는 울타리욕구, 명예와 지위와 부귀영화에 대한 욕구를 통해 안정적으로 보존욕구를 강화시키며 자손들도 안전하게 다음 세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배경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일부 현세주의자들은 화살같이 지나가는 유한한 인생이니 맛있는 것 골라 먹고, 즐길 것 다 즐기고 죽겠다는 열락의 욕구도 있겠지만 그러다가 또 어느 정도 세상살이에 염세주의적인 염오감이 들면 번잡한 사회생활과 가족의 구속을 벗어나고픈 욕구에 휘말리고, 보다 고차원적인 영적 욕구가 고개를 들면서 종교적 영성에 고개를 들거나 출가를 고민하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깊이 들어가서 득도의 경건한 경지에 들고 싶은 큰 욕심을 내어 보기도 할 수 있겠다. 그중에 인류애적 유전자가 강한 사람은 보다 뜻있는 이타욕(利他慾)으로 희생과 자비실천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개개인의 욕구대로 인생이 살아진다면 좋겠지만, 뜻대로 안되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인류의 상호 투쟁과 전쟁, 사회내부에서의 불평등과 편견의 역사도 그렇고, 삶의 궤적은 썰물의 갯벌에 달팽이들이 이리저리 지나간 흔적의 그 불규칙성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경로를 지나게 된다. 그 불명확한 미지의 인생은 개인의식의 완성 뒤에 사회생활에 편입된 것이 아니기에, 지난한 인류역사를 거치며 사회적 집단생활 속에서 개체의식을 떠나 집단의식과 집단논리에 붙잡히게 되고 만다. 그러니 그 개인은 더욱 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관습과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 있다. 경도됨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유용한 것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피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키우는 고전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기존의 이미지에 대하여 강도 높은 비판적 거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왕충이 바로 그러한 시대의 이단자였다. 왕충 저서 중에 유일하게 전하는 ‘논형’은 그의 사상을 잘 정리한 고전인데, 국내 판본은 지난 2016년 2월에 동아일보사에서 전편이 완역되어 나왔다. 평론서는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임옥균 교수의 ‘왕충’평론서 외에 별로 눈에 띄는게 없었다. 임옥균 교수는 전통 경학(經學)을 비판적으로 생각한 왕충을 다소 못마땅하게 본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강한 비판의식의 소유자인 왕충에 대하여 중국고전을 전공한 학자로서의 불편함일 것 같고, 철저하리만치 현실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왕충의 태도에서 철학과 사상적 차원에서 동양학을 연구한 저자와의 인식의 간극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논형- 있는 그대로를 논한다 | 왕충 지음 | 성기옥 옮김 | 동아일보사 | 2016

‘논형(論衡)’은 총 8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衡)은 저울에 달아서 공평하게 중량을 잰다는 뜻이다. 그래서 ‘논형’은 세간의 허위 지식 일체를 검토하고 비판하여 공정한 진리를 끌어내는 데 저술의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주요한 철학적 문제인 자연관, 지식론, 인성론, 운명론, 정치사상론 등을 다루면서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논형에 등장하는 자연관은 하늘의 의지를 부정하여 천인감응의 신권설을 부정했다. 그는 자연의 고유한 운동을 승인하였고 사후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여, 사람의 정신 활동도 육체의 생명과 함께 물질상 생멸한다는 무신론을 폈다.

또 모든 경험에 앞서 인식이 태어날 때부터 존재한다는 선행인식론을 부정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여러 가지 설화나 전문(傳聞)의 허망성(虛妄性)을 폭로했다. 그리고 해석학(解釋學)으로 변한 어용적 유학(御用儒學)과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공자나 맹자의 언행도 비판하였으므로 송 대 이후 권력과 유착된 체제중심의 교학(敎學)에서 격렬히 비난받았다. 

후세의 유학자들은 그의 기이한 저서로 인해 비전(秘傳)을 얻은 것처럼 다양한 논리를 펼칠 때 논형을 인용했다고도 한다. 왕충(王充)은 서기 27년에 태어나 97년에 죽었는데, 자가 중임(仲任)이며 회계군 상우현, 지금의 절강성에서 태어났다. 한나라 중간에 왕망이 나라를 찬탈하고 신나라를 일으켜 혼란하던 시기에 증조부인 왕용이 벼슬을 잃고 이주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로 가업이 꾸렸으며, 조부는 원수진 사람 때문에 다시 타지인 전당으로 이주하여 장사로 생계를 꾸렸다. 왕충의 아버지는 또 유력한 정백 집안과 원수가 되어 박해를 받자 상우현으로 이주해 살았는데, 이것은 주로 그의 집안이 협객적인 패기가 있어 지방호족과 대립하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왕충은 다독가로 알려져 있는데, 후한서의 왕충전에는, 그가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낙양의 서점에서 노닐며 한번 보고서는 즉석에서 암기했다고 한다. 왕충의 사상적인 발전의 과정은 결국 그의 독서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는데, 그의 머리엔 수많은 성인의 가르침이 있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깨달아가게 된 것이며, 책을 살 돈이 없어 서점에서 눈치를 보며 익힌 것들이다.

왕충은 자질이 천부적으로 총명했고 부지런히 독서를 했기 때문에 서당에서 공부가 끝나자 군현에서 그를 선발하여 낙양의 태학에 그를 입학시켰고, 거기에서 반표(3~54, 금문경학가이며 사학가)에게 정통 유학사상을 교육받았다. 그러나 후한서의 왕충열전을 보면 그가 널리 다방면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경전의 문장을 깊이 통찰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스스로도 “옛 문장을 읽고 기이한 말들을 즐겨 들었다. 세상의 천박한 이론을 읽고 타당하지 못한 곳이 많으면 깊은 곳에 거처하면서 그 허실을 고찰하고 논증하였다”고 하였다.

대략 32세 이후 왕충은 낙양을 떠나 고향인 상우현의 인사담당관리를 맡았는데, 이후 군 태수 부서의 총괄담당관리까지 올랐다가, 흉년이 들자 귀족들의 사치를 간하다 쫓겨났고, 구강에서도 문서담당 관리를 지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이내 그만 두었다. 그 뒤로 왕충의 친구 거록이 장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천거하였으나 병을 칭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50대에 ‘논형’의 골격을 잡고 저술하였으며, 한나라 화제 영원9년(97)에 병으로 71세의 생을 마감했다.

왕충의 뛰어난 점은 당시 시대사상에 저항한 비판자라는 점이다.

전한(前漢)시대는 황노학(黃老學)의 무위사상을 주요 통치론으로 삼았던 시대였다. 한나라 유방이 건국을 하고 초기에는 국가에 큰 일이 없었고 홍수나 가뭄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의식이 풍족하고 국가의 창고에는 재물이 남아돌았다. 정치적으로는 경제가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했고, 제후왕들의 특권을 박탈하여 중앙집권을 공고히 했다.

한무제(漢武帝) 유철에 이르면 사방의 오랑캐를 평정하여 영토를 넓히고,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전제적인 통일제국의 기틀을 닦았고, 더불어 경제번영과 정치적 안정은 새로운 사상체계, 의식의 대통일이 요구되었는데, 이때 국가를 유지하는 지도사상으로 유학자인 동중서의 천인대책(天人對策,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대책문)을 채택하게 된다. 이는 제자백가를 배척하고 오로지 유교의 학술만을 존숭해야 이단의 사악한 이론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 일종의 사상 대통합이라고 볼 수 있다.

동중서의 이 유학(儒學)은 원시(原始)의 공맹(孔孟)의 것이 아닌 동중서의 개작을 거친 이론으로, 원시유학 속의 인의와 도덕을 음양오행설에 배합시키고 법가의 천지감응론을 집어넣어 하나의 거대한 신학사상체계로 창조한 것이다. 동중서는 하늘을 의지가 있는 신령으로 생각했는데, 그 신이 하늘 위의 신들을 주재하고 인간세계의 제왕도 주재한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지고무상의 존재이며, 인간세계 제왕의 운명은 하늘이 준 것이라고 하여, 동중서는 이렇게 하늘(天)과 천자(天子), 백성이라는 통치 요구적 해석을 자연과 인간세계의 기본 사상으로 정했으며, 인간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으므로 제 본분을 벗어나서 통치질서를 의심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변하지 않으니 도(道)도 변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그래서 하늘이 정해놓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오행 배열순서 질서를 정해 자연과 사회, 인륜과 도덕을 구조화했는데 오행을 세상사에 대입하여, 각각의 분야별 관직도 오행에 대입해 상호 대립하지 말고 효자와 충신의 행동으로 서로 화합하라고 하였다. 또 음양설을 들어 인간세계에서 ‘양’이 귀하고 ‘음’은 비천하다고 했고, 그것을 근거로 삼강오륜을 통해 질서를 매겼는데, 오륜은 익히 알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며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처강(夫爲妻綱) 등인데, 이는 모두 양(陽)인 임금, 아버지, 지아비를 위해 음(陰)인 신하와 가족, 부인이 양에 귀속되어 공적을 모두 귀속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천인감응설은 동중서의 핵심사상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모든 것은 모두 하늘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며 군주의 치란과 화복도 모두 의지가 있는 하늘에 의해 안배된 것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이다. 결국 이러한 천인감응설은 백성이 감히 천명을 어기거나 저항할 수 없다는 사상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계통적인 신학체계는 인간의 사상에 대한 속박과 인간사유 능력에 대한 제한을 가져왔다. 그리고 신학적 해석을 확장하여 다른 의견을 배척함으로서 점점 확고한 교조적 형태로 자리잡아갔다.

 

동중서 묘지 안내석.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년?~기원전 104년)는 중국 전한 중기의 유학자로 오늘날 허베이 성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사람이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가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 독립의 터전을 굳혔다. 무제(武帝)를 섬겨 총애를 받아 유교를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채용했다. 그는 한무제가 즉위하자 의견을 진술하는데, 성인(聖人)은 천명(天命)을 받아서 정치를 행하는 자로 교화(敎化)에 의하여 백성의 본성(本性)을 갖게 하고, 제도에 의하여 백성의 정욕을 절제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화에 있어서는 유학만을 정통적 학문으로 정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 주장으로 한나라는 법가나 종횡가의 말을 물리치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의 정신을 국가 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동중서의 사상에 최대 특징은 재이설(災異說)이다. ‘춘추(春秋)’에 등장하는 ‘재이(災異)’의 기사를 응용하여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고 한다. 한대의 정치는 이렇게 유학을 교묘하게 이용한 시대였다.(글과 사진: 위키피디아)

 

동중서가 시대의 요구에 의한 대일통제국의 사상통일에 기여했다면, 후한(後漢)시대에 와서는 더욱 황당하고 미신적 색채를 띠게 된다. 그것은 참위설의 침투인데, 일종의 예언적 이야기들을 모아서 경전에 붙이는 식이었다. 이때에는 유가철학의 ‘날실’에 ‘예언’이라는 ‘씨실’을 직조한 시, 서, 예, 역, 춘추, 효경, 논어 등의 위서(緯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도’와 ‘낙서’라는 방대한 분량의 위서에서 천문, 지리, 역법, 문자, 신선에 이르기까지 예언과 신화를 근거로 신비성의 형태로 출현하여 일부 책략가들에게 이용되기도 하였다.

왕망(기원전45~기원후23)의 찬탈을 다시 광무제가 진압하자 “고조로부터 228년이 지났을 때 화덕의 한나라가 왕실의 주인이 된다”는 참위설이 세간에 널리 유포되었고, 후한 중원 원년에 결국 광무제 유수(6~57)가 천하에 도참을 선포하여 참위를 국가헌법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이에 왕충의 정신적 스승인 환담(기원전24~56, 걸출한 철학가로 참위미신을 강력반대함)은 광무제에게 목숨을 걸고 상소를 해서 세상을 속이는 ‘참위’를 근절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경학학술의 주류인 고문경학과 금문경학과 대립하였고, 결국 ‘장제’가 주장한 ‘백호관회의’라는 학술토론에서 이단배척과 사상통일에 의한 봉건통치의 공고화작업에 의해 ‘백호통의’로 정리되어 사상의 체계를 통치자의 구색에 맞게 정리하게 되어 버리고 만다.

‘백호통의’는 그 기본 사상이 동중서와 마찬가지로 음양오행을 기본구조로 천인감응을 내세우고 있고, 황당하고 거짓된 참위 미신의 내용이 더 농후하게 강화되었으며, 군주권력의 신성성과 봉건적 종법제도를 더욱 강조했다. 또 참위와 금·고문경학을 종합하여 삼강육기를 명확히 규정했다. 삼강육기란 군신, 부자, 부부의 여섯을 종법적으로 통치계급의 이익에 가장 표준이 되게 조합한 것이다.

‘백호통의’는 조잡한 종교신학의 외피를 쓰고 모순과 결점, 거짓말로 치장된 허위의 통일서로서, 그 후로 통치자의 권력에 의해 교조적인 진리로 선포함으로서 사상을 속박하고 제한하는 작용을 일으켰다.

왕충은 이러한 공허하고 거짓된 지식에 질타를 가한 지식인이었다. 왕충의 입론근거는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이것은 왕충의 핵심사상이며 그의 비판근거는 이것을 근거로 삼았다. 동중서는 하늘이 모든 신들의 군주로서 인(仁)이 하늘의 마음이기 때문에 신령이자 도덕이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므로 하늘은 높은 곳에 거처하면서 아래를 다스리며 사람의 문제를 진압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왕충은 정면 비판을 하며, 천지는 모두 기로 구성되어 있고, 기는 물질로서 결코 목적성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신령도 아니라고 인식하였다. 우주를 창조한 신이 있는지 없는지, 하느님은 존재하고, 그가 인간을 주재하는지 오늘날에도 설명할 길은 없지만, 그것을 자유로운 사상을 통제하거나 백성들의 행동을 통치자의 권위로 이용하게 될 때에는 사태가 매우 심각해진다.

 

기(氣)라는 개념은 동양의 고대사상사에서 매우 일찍 등장한 개념으로 물질의 기를 우주의 본체로 이해한 것이다. 왕충은 하늘이 원기로 구성되어 있어서 목적과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상벌을 주관하거나 선악을 관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양한(兩漢)시대의 신학적 경학은 천지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만들어내고 일정한 목적에 따라 윤리와 도덕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늘이 백성을 만들 때 선한 기질을 부여하더라도 선하게 만들 수는 없어서 그러한 백성들을 위해 왕을 세워서 그들을 선하게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왕충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우주의 기를 합하여 우연히 태어나는 것이지, 하늘의 모종의 목적에 의한 피조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논형’의 ‘물세(物勢)’편에서 “유학자가 천지는 의도적으로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 말은 거짓이다. 하늘과 땅이 기를 합하면 사람은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지는데, 부부가 기를 합하면 자식이 저절로 생기는 것과 같다. 부부가 기를 합하는 것은 그때에 하늘이 감응한 것이 아니라 정욕이 움직인 것으로 부부가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음양의 기는 모순의 두 방면이지 양은 존귀하고 음은 비천하며 목적론적으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주의적 관점은 효(孝)로써 천하를 다스린 양한시대에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효도의 근거를 원천적으로 제거한 이 논리는 인륜적인 자애와 효도의 질서가 단지 부모의 욕정발동에 의한 우연성에 의한 것이고 하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마치 사람 몸에 이가 붙는 것과 같아서 우주의 기 운행가운데 사람은 그저 따라붙는 생명일 뿐이지 우주(하늘)가 그것을 창조할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자녀들은 효도를 다할 의무가 없고, 자연스럽게 천지가 만물의 생성을 품수하여 만물이 생겨나고 성장하며 완성되고 저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소 유교적 효도관념에 젖은 오늘날의 우리에게서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로서, 이것은 종교신학에서 하늘이 의지나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여 사물의 왜곡된 본상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것이라고 보인다. 요괴나 상서로운 징조 같은 것을 왕충도 믿기는 했지만, 그 원인이 태양의 기나 우주의 기가 만든 어떤 현상으로 이해하면서 하늘의 합목적적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귀신같은 존재는 사람이 죽으면 몸이 사라지고 정신만 남기 때문에 정기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그것이 형상은 없는데 형체가 있다고 보는 대부분의 생각들이 인간의 두려움이 낳은 상상의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왕충의 유물주의적 해석은 인간의 부귀와 빈천, 길흉화복이 모두 천명에 의해 안배되어 신분이나 부귀가 하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가 품수한 기가 엷거나 두터운데 있다고 생각했다. 즉 잔악한 사람은 인(仁)의 기를 적게 받은 것이고, 조화로운 기를 적게 받으면 가볍고 어리석다고 본 것이다. 사람의 출생은 그러한 자연적 기의 품수에 영향을 받는 것이지 결코 천명의 결정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현명함과 우둔함은 기의 품수에 있기 때문에 왕충은 태교의 중요성과 후천적인 성향의 발현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천도라는 것이 바로 자연이며 무위(無爲)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자연적 천도관은 도가의 황노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우주의 기본은 고요하고 욕심이 없으며, 인위적으로 작위나 일삼는 억지가 없다는 것으로 보았다. 하늘은 단지 평등하게 기를 베풀 뿐이며, 일체의 모든 사물은 자연의 운행에 따라 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활동을 하니 불욕(不慾)이 바로 하늘일 뿐이다. 하늘에는 욕심이 없는데, 그것은 하늘이 입과 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땅도 입과 눈이 없으므로 무엇을 인위적으로 하겠다는 유욕(有慾)이 있을 수 없고, 만일 하늘이 기라고 한다면 구름이나 연기와 같으니, 그러한 것이 어찌 작위(作爲)가 있을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도가의 이론이 종종 실제에 벗어나는 점도 비판하였는데, “도가에서 자연에 대해 논할 때 사물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말과 행동을 증명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은 신뢰받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바로 왕충이 효험과 징험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공허하고 거짓된 지식에 대한 비판은 왕충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허망을 타파하고 실제를 존숭했다. 통치자들은 예로부터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안다(生而知之)”는 신화적 도구를 활용했는데, 양한시대의 신학 경학가들은 여기에 한술 더 떠서 공자가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알던 성인으로 미화하거나 하늘과 소통하는 교주의 모습으로 치장을 했다. 심지어 200년 후의 일도 예언을 하고 나라의 길흉도 미리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왕충은 모두 허황된 잡설이며, 공자가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알 수 없는 것이, 귀와 눈이 성장해야 사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인데, 어찌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알겠는가 라면서 거짓 논리를 혁파했다.

즉 왕충의 지식론은, 성인(聖人)이라도 결코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성현들도 일반인과 예외가 아니어서 눈과 귀가 있어야 보고 배우고 진위를 판단하면서 구체적인 지식의 습득과 연마과정에 그 성인됨의 척도가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성인은 형상의 조짐에 근거하여 동류의 사물을 탐구하니 치밀하게 사고하여 그 이치를 터득하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성현이 되는 까닭은 분석과 추리 등의 능력이 있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왕충은 마음의 사고를 통해서 일을 논의하고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며, 단서를 헤아려 추론하고 시작을 탐구하여 끝을 파악해야 된다고 제시하였다. 이러한 지식이 바로 실제지식이며, 이러한 지식은 실천을 통해야만 사실과 효과의 측면에서 증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에서 인식으로, 인식에서 실천으로 가는 인식론적 과정은 철저한 과학적 사고의 실제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는 또 일에는 알 수 없는 일도 있는데, 그러한 것은 성인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왕충을 ‘불가지론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철저한 실제를 주시해서 형이상학적 사변에 크게 관심이 없던 것에 기인하는 철학적 태도였을 뿐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로 보면 그의 세계는 사물이 매우 많고 복잡하며, 오묘하고 무궁하기 때문에 사람의 유한한 능력으로 결코 다 알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가 인정한 것은 오로지 사실뿐이며 그러한 사실은 성현이라도 알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과 논의에 증거가 없는 것은 공허하고 헛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전해지는 대부분의 책들이 허무맹랑하고 거짓되며 정확한 사실을 없앴다면서 그래서 자신이 붓을 들어 그 거짓에 대항에 논의하고 따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글(書)·변화와 다름(變異)·느낌(感)·화복·용과 뇌성(龍雷)·도(道) 등의 구허(九虛)에 대해서 오래되고 먼 옛날의 거짓을 믿지 말고 가까운 지금의 실체를 밝혀 거짓을 제거하고 진실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충은 운명결정론적인 관점을 참위신학의 목적의지론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했는데, 명(命)에 의한 그의 결정론적 사고를 오늘의 입장에서 평가할 바는 못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숙명적 운명론은 그의 사고가 당세의 철저한 유물적 관점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세상의 존재방식에서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명(命)이 성(性=성격)의 품수, 즉 기가 두텁고 엷음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이 갈린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삶과 죽음, 장수와 요절, 부귀와 빈천은 명 외에도 시기와 운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명의 필연성에 시수행우(時數幸偶) 등의 우연성이 결합하면서, 비록 명이라는 것이 파악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그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필연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불교적 세계관이 수입되면서 이러한 부분이 새로운 이론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순자가 “천명을 제어하여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관점보다 퇴보한 것이기는 해도, 당시의 유가경학에서 고취한 의지론과 목적론적인 통치질서에 대해 정확히 비판했으니 그의 운명결정론은 객관적인 우주의 운행에 대한 이해정도에서는 역사적 기여를 한 셈이다.

양한시대에는 신선방중술과 세속의 각종 미신이 조정과 민간에 널리 범람했고, 어용철학에서는 이미 참위를 끌어들여 국가헌법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미신이 창궐하고 신선방술이 난무했다. 혼백을 떠난 유체이탈의 신선술법, 불로장생 양생법, 온갖 도사와 방사들이 들끓어 저마다 주장을 하며 황제가 신선이 되어 용을 타고 올라갔다느니, 봉래산신선의 존재와 단사를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술법이 있다느니 하면서 특히 한무제때 황제주위에서 온갖 허황된 이론들을 창조했다.

그러나 왕충은 생자필멸, 시작이 있으면 그 끝이 있다는 변증법적 논리로, 죽음은 곧 생명의 끊어짐으로 흙으로 사라지는 것이며, 신선방술의 장생불사는 거짓임을 주장했다. 또 각종 금기나 징크스도 허망하고 미신적인 것으로 거북껍데기 점이나 시초, 점 등은 하늘에 눈과 귀가 없기 때문에 그 대답이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점복술의 우연한 응답을 믿는 것은 엉터리라고 했다.

 

왕충철학의 최대특색은 ‘실제’이다. 그는 엄밀한 논리추론과 검증이 없이는 아무리 경학의 교조로 굳어져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이나 만지거나 볼 수 없는 것은 류(類)라는 개념을 동원해 같거나 비슷한 종류를 통해 추론하기도 하였다. 그는 군주가 정치로 하늘을 움직여 나라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우주는 너무 커서 정치가 하늘을 움직인다는 것은 젓가락으로 큰 북을 치는 것과 같으며, 반딧불로 가마솥을 데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고사에 억울한 추연이 하늘에 외치자 그에 감응하여 서리가 내렸다거나 남편의 억울함에 아내가 곡을 하자 큰 성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진나라가 조나라의 병졸 40만명을 생매장할 때 그들의 울부짖음에는 왜 하늘이 감응하지 않았는지, 천인감응설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를 가지고 옛날을 검증하며, 사람을 가지고 하늘을 이해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아직도 수천년 전의 옛날이야기를 정통이라면서 오늘날의 이성적 사유나 실증을 가볍게 여기고, 하늘의 요청에 따라 피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극단의 종교적 종파들이 여전히 신도참설에 잠겨있다. 역사란 늘 이긴 자, 승리자의 논리로 윤색이 된다. 유방이 항우를 이겼지만, 그가 성군이라면, 그 숱한 유혈의 낭자와 노천의 시체들, 군대와 무리를 잃어버리고 비겁하게 기면서 겨우겨우 죽을 뻔한 숱한 고비를 넘기고 천하를 얻었는데, 비록 왕충은 한나라사람이지만 한고조 유방의 이야기도 현재를 가지고 옛날을 증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왕충을 오늘날 다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쏟아지는 허망하고 거짓된 논리는 한무제 시대보다 요즘이 더하다. 엉터리 정치가는 그 시대의 경학가들보다도 더 많고, 사상과 철학은 과학의 발전에도 여전히 도참설에 잠겨있다.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가짜논리들이 판을 친다. 왕충은 그때에는 권력에 의해 지탱되었던 신학화된 경학체계를 부수었다. 허망함을 질타하고 실제를 확립하는 이성정신을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관념적인 하늘이 온전히 버티면서 인간을 선택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진리정신, 왕충이 살던 이천년 전보다 과연 더 낳아졌을까 의문이 든다.

왕충의 ‘논형’은 중원지역에 전해지는 것이 없었는데, 채옹(132~192)이 오나라 지역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입수하여 남몰래 음미하면서 학문이 성숙해졌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가 매우 심오한 비서(秘書)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왕랑이라는 자도 허주태수가 되어 이 책을 입수했는데, 그도 기이한 사상을 펴서 학문과 재주가 진보했다는 평을 받았다. 왕충이 당시 오월지역에 피신해 살았기에 ‘논형’은 그 글의 수준이 높지만, 널리 퍼지지 못하고 그 사상의 진실함과 참신함에 매료된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전승되었는데, 현묘하고 고원한 그의 사상은 후한말기에야 조금씩 퍼졌고, 후에 현학으로 발전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인사동에 성업중인 사주카페들. (사진은 특정 기사와 관련이 없슴)

오늘날 인사동이나 홍대앞같은 곳에 사주카페가 성업이다. 3개월짜리로 양산되는 가짜도사들이 곳곳에 상을 차리고 사주와 역술과 주역을 이용해 어려운 경제와 불안한 미래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약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고 있다. 모 역술 단체는 이러한 사술을 이용하여 역술인을 급조 양산하고 있다. 그들은 고액의 수강료를 받고서 집중교육을 받고서 점포를 차리면 떼돈을 벌 것처럼 선전하기도 한다. 그러한 역술인이 무려 30만 명이나 곳곳에서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고려말 대 유학자인 안향은 이러한 세태를 일소하여 조선 건국의 정신적 기틀을 세웠다. 주역의 대가인 한학자 기세춘 선생도 이러한 세태에 한탄을 금치 못한다. 주역은 점쟁이들의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을 닦는 수양의 경서라는 것이다. 지금은 최태민같은 사이비 점성가가 나라의 운명도 어렵게 만들고, 헛된 점술로 멀쩡한 사람들을 갈라놓거나 가정을 파탄내기도 한다. 사이비와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을 왕충은 경멸했다.

왕충의 위대함은 독립적 사고에 의한 연구정신, 폭넓은 연구 태도, 추출된 진리정신에 의해 과감하게 비판하는 실천적 용기에서 비롯된다. 허망을 타파하고 실제를 확립하는 진리에 대한 확신과 용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덕목이 되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