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 스스로가 부처인가? - 혜능과 ‘육조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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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스스로가 부처인가? - 혜능과 ‘육조단경’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1.0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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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잡한 인도불교를 동아시아의 민본적 혁명 사상으로 해석하다
혜능(慧能: 638~713)은 당나라 시대의 선승으로, 선종(禪宗)의 제6조이자 남종선(南宗禪)의 시조다. 신주(광둥성)에서 태어나 세살 때 부친을 잃고 가난하게 자랐다. 어느 날 나무를 짊어지고 팔러 다녔는데 ‘금강경’ 독송을 듣고 출가 결심을 했다. 24세에 기주 황매산의 동선원(東禪院)으로 제5조 홍인(弘忍: 601~674)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그로부터 선법(禪法)을 물려받아 선종의 제6조가 되었다.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 그리고 시대적 조류와 상황적 사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간다. 영원불변이라고 믿어온 가치체계나 진리라는 것도 사실은 역사적 궤적에서는 가변성과 다각도의 시각적 상대성으로 전변하기도 한다. 

붓다의 진리도 중국으로 건너와서 많은 변모를 겪었다. 그중에 달마조사에 의한 선불교의 시작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불교문화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것이 육조 혜능에 와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회적 파장을 주는 일종의 사회변혁적 역할까지 수행하는 일이 발생한다.

무엇이 동양문화의 한 축인 중국사회를 그토록 크게 변모시켰는가? 중국불교권만이 아니라 유교권, 문화권, 예술권 그 모든 것이 혜능 이후에 변했다. 그의 영향력은 신라 땅으로 건너와 결국은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고려왕조를 세우는데 주요한 이념적 역할까지 하는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중국불교 역사상 육조단경 만이 붓다의 가르침에만 붙일 수 있는 ‘경’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러한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된 육조단경은 역사 속에서 그 가치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종교를 넘어서 사회전반에 큰 영향을 준 때문일 것이다.
육조단경은 종종 세계를 움직인 100대 명저에 오르는 힘을 발휘한다. 사실상 중국선불교의 종조(宗祖)이며, 돈오견성론(頓悟見性論)을 주장하여 조사선(祖師禪)을 확립한 6조 혜능의 역사적 위치도 그렇지만, 혜능이 생전에 누누이 강조했던 “스스로의 안에 불성이 있고, 자기의 성품을 보아 몰록 깨달으면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주장은 특정 종교의 경지를 떠나 시공을 초월하여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도. 대만 고궁박물관 소장. 일본화가 시바 코칸 작. 18세기

혜능은 글자를 몰랐다. 도력이 높은 선사와 문맹이라는 이중성에 사람들은 당황하곤 하는데, 선불교의 불립문자, 교외별전, 이심전심의 교지를 이해하면 그 또한 가능한 이야기다.
기록에 의하면 혜능은 당나라 태종기인 서기 638년에 태어나 713년에 76세로 입적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어려서부터 나무를 베고 땔감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시장에서 홍인대사 문하의 탁발승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는 단박에 깨달음이 있어 스승을 찾고자 하여 672년에 기주 황매에 가서 홍인대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방앗간에서 쌀을 찧으면서 8개월을 보낸 끝에 홍인대사의 상좌인 신수를 물리치고 선종의 법맥을 잇는 가사와 발우를 전수받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위협을 피해 남방으로 가서 숨어 지내기를 16년, 세월이 흘러 혜능의 나이 39세가 되자, 이제 홍법할 시기가 왔음을 알고 의발보따리를 지고 정처 없이 떠돌다 광주 땅 법성사에 들르게 되었다.
이 절에서는 마침 도가 높은 인종법사가 수백 명 행자를 거느리고 열반경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혜능은 맨 뒷자리에 앉아 법사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때는 늦은 여름이라 조는 자도 있었고, 작은 소리로 잡담을 하는 자도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절의 깃발이 펄럭거리니 그것을 본 두 행자중 한 행자는 “저것 좀 봐 깃발이 움직인다.” 하였고, 다른 행자는“아니야, 저건 바람이 움직이는 거야” 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 논쟁은 커져 두 패로 갈려 시끄러워 졌다.
인종법사는 강연을 멈추고 그들의 논쟁이 어떻게 끝맺을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혜능이 빙그레 웃으니, 두 행자는 혜능에게 판단을 해달라고 했다. 이에 혜능은“그것은 깃발의 움직임도 아니요, 바람의 움직임도 아닙니다. 단지 두 스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인종법사는 혜능의 대답이 간략하고 이치가 뛰어난데 감동받고 그가 6조 혜능임을 알아 보았다. 크게 놀란 인종법사는 곧 예를 갖추고 절을 올렸고, 혜능의 머리를 깎아 주고 스스로 제자가 되어 그들 스승으로 모셨다.

중국 조계산 보림사 (사진:위키피디아)

이듬해부터 혜능은 남쪽 조계산에 보림사(현 남화사)를 짓고 36년간 전법을 펼쳤다. ‘조계’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마을에 조(曹)씨들이 많이 살고, 동구에 시내가 흐르고 있다 하여붙여진 이름인데 혜능이 오래 주석함으로써 조계는 혜능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조계종’이나 ‘조계사’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온 것이다.
혜능은 당나라 의봉 2년에 이 절의 주지가 되어 이후 30여 년간 이곳에서 법을 펼쳤다. 이 곳은 당·송 시대의 사상적 지주였던 선불교의 사실상 진원지이며, 동아시아 선불교의 실질적인 중심지로서, 한국과 일본의 선 수행자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성지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혜능의 시신을 그대로 모신 진신 육신상이 있다.
혜능이 조계의 보림사에서 선풍을 드날리자 소주자사 위거가 청하여 대범사 강당에서 설법을 하였는데, 이때 강연한 것을 문하생인 법해가 기록하여 편집되어져 오늘날 전해지는 단경이 되었다. 그 이후 30여년간 설법을 통해 명성을 드날렸는데, 측천무후와 당나라 중종은 칙서를 내려 관직을 주려하였으나 혜능은 이를 거부하였고, 혜능 사후 당 헌종은 대감선사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단경’을 통해본 혜능의 사상은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불성론,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수행방법, 자성자도(自性自道)의 세상속의 해탈론 등이다.
진여연기론은 우주생성과 본체에 관한 기본 관점인데, 진여의 뜻은 참다운 실상이며, 상주불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생겨남도 없고 변화도 없는 영원한 진리, 최고의 원리, 세계의 본체를 가리킨다. 이 자성에서 모든 법이 나타난다고 보는데, 혜능은 자성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진실한 체성(體性)을 가리키는 것으로 객관유심론적인 대승불교의 유종(有宗)사상, 즉 피안의 최고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대승에서 일체가 공(空)하다는 사상과는 차별된다.
그러나 혜능사상의 가장 중요한 점은 불성론이다. 혜능은 불성을 누구나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며 보리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성품을 떠난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득도를 하고 성불하는데, 중생이 모두 평등하며, 지위의 높낮이, 빈부귀천, 지역과 민족의 구분이 없다고 말했다. 불성은 모두 평등하다는 이러한 생각은 전생 업력의 승계를 인정하는 남방상좌부불교와는 다른 시각이다.
사람들의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고 불성도 평등하다고 말한 혜능은 더 나아가 즉심즉불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내 마음에 부처가 있으니 스스로 만약 불심이 없다면 그 어디에 진불이 있겠는가?”라면서 성품과 마음이 서로 의존하여 성품은 본래 진여불성이고, 마음은 바로 부처와 둘이 아니며, 반야의 지혜를 짊어진 모든 이들의 평등하고 평범한 본성이라고 말한다. 우주의 실체와 세계의 본원인 진여를 모든 중생의 본성이라고 밝힌 것과 그래서 성불의 주체도 본인 스스로라는 것, 바로 눈앞에 있는 나의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혁명적인 선언인 것인가?
이렇게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기에 중생과 부처의 거리는 매우 친근해졌다. 남방의 상좌부는 아라한이 되려면 예류자, 일래자, 불래자를 넘어 사선(四禪)의 경지가 있어야 하고, 북종의 점수선(漸修禪)은 득도의 문 앞에 도달하는 것만도 일반인의 경지로는 근접하기 어려워 신비화·대속종교화되는 우를 범하기 마련인데, 혜능의 이 선언은 누구나 본래 부처라는 행복한 선언을 하고 있으니, 불성의 인성(人性)화에 대한 근본 전환을 가져와 일련의 종교개혁으로까지 파급효과가 생긴 것이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그 이론이 어렵고, 경전의 자구와 문자로는 해박한 지식인도 붓다의 사상을 체득하거나 그 도를 깨우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대다수가 문맹이고 지위가 낮거나 천한 피지배 계층들은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있는 자들과 가진 자들의 자비와 배려가 없이는 불가능한 멀고먼 이야기였다. 그런데 붓다의 오묘한 득도의 길이 혜능에 의해 누구나에게 활짝 열린 것이다.

혜능의 또 다른 중요사상은 돈오설(頓悟說)이다. 돈오견성과 돈오성불은 혜능 수행의 중요이론으로, 남종 신수의 점수(漸修)론이라는 오랜 기간 수행이 필요한 것에 비해 대중들에게 큰 흡입력이 있었다. 단경에서는 대중이 어리석으면 수만 겁을 수행해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마음의 지혜가 트이면 단 하루만에도 견성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생이 불국의 피안에 도달하는 시간과 거리를 단숨에 줄여놓았다. 수행에 있어 번잡한 이론과 많은 실천론을 배제시켜 사람들이 견심 견불하도록 간단하고 빠르게 성불하는 새로운 길을 연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견해가 과연 진정한 붓다의 수행과 합치하는지는 별외의 이야기이긴 하다.

더 나아가 혜능의 업적은 자성자도(自性自道)를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세간(=世俗)안에 득도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좌선을 통해서 입탈좌망하는 명상의 정신적 전변에서 해탈방식에 비판을 가한 그는 정혜(定慧, 생각을 그치고 상황을 관찰하는 것)의 일체론을 주장했다. 혜능은 “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인데, 어찌 앉음(좌선)에 도가 있겠는가? 만약 여래가 앉고 눕는다면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다. 여래는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으며 생함도 멸함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생함도 멸함도 없는 것이 여래청정선인데, “살아와서는 앉고 눕지 않더니, 죽어가서는 눕고 앉지 않는구나. 한 몸은 냄새나는 뼈다귀인데 무엇을 위해 공과를 세우는가?”라고 일갈했다.
즉 ‘정’ 다음에 ‘혜’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상에서 진여불성을 체득해서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정혜가 하나의 ‘체(體)’가 되어야 하며 이것이 ‘관(觀)’이 된다고 했다. 이것에 의하면 선승들은 좌선에서 벗어나 절 밖으로 나오는 이론적 근거가 되며 재가수행자들도 청정함을 닦으면 곧 서방정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혜능은 “법은 원래 세간에 있으므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것이다. 세간을 벗어나 출세간을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깊은 산속에서 인간세상을 멀리하는 초기선종의 분위기를 크게 변화시킨 이 선언은 불교의 세속화와 인간화를 향해 변하기 시작했다. 득도는 수행방식과 장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동안의 관행은 이로서 불식되었다. 혜능의 주장은 스스로의 몸 안에 있는 자성을 드러내어 스스로 깨닫는 길, 색신(色身)속의 잘못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은 스스로의 지혜와 스스로의 제도를 통해 본래 청정한 해탈로 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생을 계도하는 보살우상화 이론을 뒤집었고, 인간 자신의 가치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스스로의 자연적 감동 속에 득도의 역량이 내재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했다.

그래서 종교적 의식인 타율적 청정계율론보다는 청정자성론을 의지하도록 했고, 중생이 당면한 현실에서의 인심의 지혜를 중히 여겼으며, 재가와 출가, 재세와 출세의 경계를 없앴으며, 누구나 스스로 자성자도하는 해탈을 강조했다. 따라서 세속을 벗어난 장엄한 전통불교는 점차 세속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고, 중국고유의 인생현세중심, 실질적인 인간중심으로 전환되어 선종이 불교의 저변을 넓히는 것은 물론, 다른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게 했던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는 주로 경전의 번역과 해석에 의지한 수행이나 신앙으로 시작한 불교가 혜능을 거치면서 가장 중국화 된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얻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혜능에 이르러 ‘공’에 치우친 반야학설에 치우친 현학가들의 호사스런 논리를 극복하고, 생업을 멀리하고 명상에 빠진 비대중적인 요가행에서 탈출시키며, 중국불교가 생존 발전하는 중요한 징검다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번잡하고 중국과 맞지 않는 종교의식 이론과 교조주의를 없애고 자력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그동안 명상에 빠지고, 죽도록 계율을 지키며, 타력에 의지했던 귀족화 불교, 현란한 요의(遙義)불교를 멀리하여 보통 사람들도 누구나 불교를 배워 성인에 이르는 방법의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수입외래품인 불교가 달마시기에 능가경을 종지로 삼다가 비교적 간단한 금강경을 넘어 혜능의 단경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의 국산화가 완성되었다. 선종의 지위는 그래서 달마의 고요한 좌선점수법에서 혜능의 교외별전, 돈오견성이 되었고, 경전에 의지하던 것이 자력해탈로 변모되고 발전했다. 심지어 우상과 부처를 초월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성인의 해탈에 의지하지 않는 자각자주 비(非)우상숭배적 자력해탈을 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불성이란 천연에서 부여된 것이고, 평상시에 날마다 쓰는 것이며, 불국과 세간의 경계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지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혜능의 선불교는 점차 중국사상계 전반에 스며들었다. 특히 송명이학(宋明理學)은 교외별전인 선종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이전의 유가 인륜철학은 경소의 주석학에 그쳤는데, 육조단경의 출현이후에는 인간의 기본문제인 심성이행지와 우주본체에 대한 이기론이 발전되었다. 주돈이, 정이, 정호, 주희, 육구연, 왕양명 등의 인물로 대표되는 송명의 이학사상은 주돈이-혜명선사의 교류, 주희-대혜종고의 교류, 육구연-덕광선사의 교류와는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유교의 이학은 간판이 유교이지 사실은 선종과 도가의 정신이라고 명나라때 황관이 논평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주돈이(周敦頤: 1017~1073)는 북송시대 유학자로 그에 의해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가 시작되었다.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 시(諡)는 원공(元公)이다. 영도(營道: 현재의 허난성)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외가인 용도각(龍圖閣) 대학사 정향(鄭向)의 집에서 자랐다. 20세에 분녕현(分寧縣)의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이어서 남안(南安)에 사법관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주로 각 현의 지사를 역임하다가 57세에 죽었다. 송나라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주돈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일컬어지는데, 동시대 유학자인 장재(張載: 1020-1077)의 사상과 더불어 주돈이의 저술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통서(通書)’에 보이는 깊은 사색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를 통해 계속 이어져 나가면서 송나라 시대 도학의 방향을 설정하는 단초가 되었다.

  

정이(程頤, 1033~1107)는 중국 송나라 도학자이며 성리학과 양명학 원류의 한 사람이다. 송학(宋學)의 선구자 호안정(胡安定)을 통해 대학(大學)에서 배우고, 서경국자감(西京國子監)의 교수를 지냈다. 후에 숭전전설서(崇政殿說書)에 발탁되었다. 이때 많은 문사들은 정부부내에 있는 소동파를 따르면서 당쟁에 휘말려 축출되었다가 나중에 복관(復官)되었다. 그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적 논리(易的論理)다. 그리고 한 몸의 마음(心)은 곧 천지의 마음이고, 한 사물의 ‘이(理)’가 곧 만물의 ‘이’라고 하였다. 그는 실천을 중시하면서 거경궁리(居敬窮理:마음을 純一하게 하여 오로지 자기의 본래 성에 순응하는 것에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사사물물에 즉하여 그 이를 궁구하여 지(知)를 명확히 한다)를 주장하였다. 이 사상은 남송의 주자가 이어서 전개하였다. 사진 및 설명: 위키피디아

 

정호(程顥, 1032~1085)는 중국 송나라 도학자가. 정이의 형으로 자는 백순(伯淳), 시호(諡號)는 순공(純公). 명도 선생(明道先生)으로 호칭되었다. 대대로 중산(中山)에 거주하였으나 후에 하남(河南)에 이주하였다. 부친 정향(珦)이 지방관으로 있을 때, 주돈이에게 사사를 받게 했다. 진사에 급제한 후 지방관으로 활약하였다. 1070년 경에 여공저(呂公著)의 추천으로 중앙정부에 들어 갔다.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거론되자 의견을 달리하여 직을 떠나 지방관으로 지냈다. 그의 사상(明道思想)은 인설(仁說)·성론(性論)인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역적 논리(易的論理)의 전개로서의 형이상적 사유이다. 정호의 사상은 남송의 육상산을 거쳐서 명의 왕양명으로 계승되었다.

 

주희(朱熹, 1130~1200)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로도 불린다. 송나라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공자, 맹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 정호, 정이등의 유학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참뜻을 밝히고 성리학(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황제에게 요순(堯舜)의 덕치(德治)를 펼 것을 개진하였으나 한탁주 등 관료들의 미움을 받아 만년에는 모함을 당하고 기인으로 몰렸다. 그의 학문을 성리학(性理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이라 하는데, 고대 경전의 주해 외에 유교의 주류인 이기심성(理氣心性),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설을 제창하였다. 그의 사상은 우주만물을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의 기(氣)로서 구성되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이가 발하여 나타나는 것이나 불순한 기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이와 기로 이뤄진 우주와 만물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운동법칙, 원리로서 태극(太極)을 제시했다. 주자는 젊은 시절 탐독했던 불교와 도교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에 착안하여 유학의 사상적 이학적 내용을 풍성하게 하였다.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은,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로 양명학의 창시자이며, 심학(心學)의 대성자이다. 이름은 수인(守仁)이며 양명은 호이고. 자(字)는 백안(伯安)이다. 주자의 격물궁리(格物窮理)를 실천하겠다고 관서에 있는 대나무를 7일 동안 바라보았지만 병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 후로 그는 주자학을 불신하고,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28세에 회시에 합격하여 공부(工部)를 거쳐 형부 운남 청리사주사가 되었다가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해, 양명동에 집을 짓고 도가의 도인술을 수련하였다. 그러나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 본래의 마음인데 도교나 불교는 그 자연스런 정을 무리하게 끊고 정신만 갖고 노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도교와 불교의 허망함을 깨닫고 정신이 안정된 양명은 다음해에 항주의 서호에서 요양하였다. 다시 강서(江西) 여릉(廬陵)의 지현(知縣, 현지사)으로 임명되자 강서, 복건의 각지에서 설치던 무장 도적떼를 토벌하고, 영왕(寧王) 신호(宸濠)의 난을 평정했다. 무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하자 왕수인은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를 겸하게 되었다. 이 때 나이 50세였다. 이듬해에 수인의 아버지가 죽어 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3년상을 마친 뒤에도 복직하지 못하고 56세까지 고향에서 아무 임무도 없이 지냈다. 그 사이에 양명은 양지(良知)의 학설을 수립했고 제자들에게 이를 가르쳤다. 나이 56세가 되던 5월에 광서의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이 내려와 팔색단등협의 이적을 토벌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타지에서 정무를 행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타지에서 타계했다. 그의 사상은 인간 안에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으며 자연의 심정으로 행동하면 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심즉리(心卽理)였다.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은 남송시대 사람으로 자는 자정(子靜), 호는 상산(象山), 시(諡)는 문안(文安)이다. 그의 사상은 심즉리(心卽理)이다. 그는 ‘이(理)’가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그것이라고 조정하는 나의 마음 속에 있다고 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나의 마음이 이 그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 즉 이는 내 마음의 이라고 하여 심즉리(心卽理)를 설파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명대의 진백사(陳白沙)를 거쳐 왕양명(王陽明)에게 영향을 끼쳤다.

 

장재(張載: 1020~1077)는 송나라때 봉상미현의 횡거진(橫渠鎭) 출신이다. 그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기’뿐이며 현상의 개체는 기가 응취한 객감(客感) 또는 객형(客形)이라고 주장했다. 기의 본래의 모양은 태허(太虛)라고 보았으며, 이것은 사람에게 감각되지 않는 지정(至靜: 지극히 고요한)한 상태라고 보았다. 그의 우주론(宇宙論, 형이상학적 사유)을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고 하는 것은 노자의 "유(有)는 무(無)에서 생(生)한다"라고 하는 말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有)가 무(無)에서 생(生)하지 않는다고 하면 유(有)는 유(有)에서 생(生)하는 것인데, 장재는 이와 같은 생각으로 철저한 유(有)의 우주론을 전개하였다.


주돈이의 ‘태극이 무극’사상도 불교의 선학에서 왔고, 이정형제도 주돈이의 태극설을 계승하였는데, 그들의 격물궁리(格物窮理)하는데 차별성이 없다는 사상은 혜능이 말한 ‘사람마다 불성이 있다’는 사상의 영향이다.
남송의 유학자인 주희는, 만물은 태극이지만, 그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물건도 각각의 태극이라고 하여, 이 사상 역시 선학에서 일깨움을 받아서 형성된 이일분수(理一分殊=이치는 하나지만 나뉘어져 각각이다)이론인 것이다. 일찍이 불교를 비판했던 주희가 이론상에서는 선종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선학의 요의에 이학의 꼬리표를 달고 만 것이다.
장재의 유물주의도 마찬가지다. 그가 주장한, “모든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지상의 만물은 나와함께 존재한다”는 ‘민포물여(民胞物與)’이론은 중생은 평등하다는 불교교의를 섞어서 누구나 모두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시대의 경학자인 ‘요제항(姚際恒)’이 주돈이와 정이 정호 형제, 주희와 장재의 학문은 모두 선(禪)에서 나왔다고 정리해 버린 것이다.

송명이학 가운데 육구연과 왕양명의 심학(心學)은 선종의 주관적 유심주의를 강하게 받아들였다. 맹자의 도통을 계승했다고 일컫는 남송의 육구연은 “마음이 바로 이치다”라고 해서 혜능의 ‘즉심즉불’을 그대로 모방했고, “우주가 곧 나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이 곧 우주”라는 관점은, 혜능의 “마음 밖에 어떤 물건도 없다”는 유심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왕양명 또한 치양지(致良知=천명의 성품이요 내 성품의 본체로서 스스로 신령스럽고 밝게 깨닫는 것)나 “마음밖에 이치가 없고,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는 주관주의 유심철학은 선학의 성불이론과 일치한다. 육구연과 왕양명은 평소 ‘단경’을 가까이 두고 마음의 지침으로 삼았다고도 한다.

중앙아시아에서 발굴된 불화. 9세기

혜능으로 인해 이렇듯 유학은 경전의 주해에 머물던 답보상태에서 철학적 이학으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공자의 인륜을 중시한 현실정신은 우주의 이치나 인간본성, 생사문제의 배후에 대한 인식과 사변이 부족했다. 이렇듯 유학의 경학 전통은 현묘함이 부족해 설득력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선문의 출입으로 그것을 메우는 역할을 했으며, 그것을 인생과 사회의 모든 방면으로 확대하여 모든 사유를 포괄하는 신유학으로 질적인 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혜능의 단경은 단지 불교 철학적 발전의 한 모습이지만, 그 속에는 봉건적인 전통문화를 타파하는 정신혁명과 사상혁명의 배아가 들어있었다. 이론과 교조의 속박을 없애고, 우상을 뒤집게 하여 논리사유를 부정하였으며, 혁신과 도전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다.
그래서 결국 그러한 요의는 신라로 건너와 서라벌 귀족불교, 왕족전유물 불교를 타파한다. 신세대, 신흥 지역토착 세력과 상공인 계층 불교로서 선종을 통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전륜성왕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이 만들어져 후삼국 분열과 결국은 고려의 태동이라는 혁명기가 만들어지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단경이 중국의 전통문화 속에서 일으킨 반향은 많은 학자들의 민본적 민주사상 속에 구현된 것들과 문학, 회화, 문인의 풍조 등에서도 영향을 지대하게 미쳤다. 왕유같은 이의 선시는 말 그대로 문자선(文字禪)을 향유했으며, 이후 상건, 교연, 소식, 황정견, 범성대와 청나라시기의 신운파, 왕사정도 심오한 정신세계와 맑고 잔잔하며 담담한 선시를 남겨 사람들의 지혜를 일깨웠으며 창작삼매(創作三昧)의 경지를 넓혔다.
예술분야에서도 파묵산수같은 문인화가 태동하였고, 사람들의 처세관에서도 도가와 함께 인생경지를 차원 높게 관조하는 소위 세속인들의 고졸한 처세에도 기여하였다.
혜능의 우주관과 인성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신적 구원을 얻었을까? 깨달음을 아득한 붓다의 교의와 교조로 생각하고, 유학경전을 공맹의 언설자구해석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던, 그 시대인들에게 혜능의 출현은 진정한 해탈의 견성이 아니고 무엇이었을까? 인도에 붓다의 사성제가 있다면 중국에는 혜능의 나로부터 깨닫는 선종의 인생태도에서 무상한 인생의 진제(眞諦)를 통해 자신의 자심 밖에 있는 것에 집착하는 모든 태도가 그릇되었음을 깨닫게 한 단경성제가 있었다.
혜능은 스스로 찰나에 생멸하는 유한한 작은 나를 영원히 불멸하는 생명의 기류 속으로 녹아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자기와 사회의 여러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고 재조정하여 고난에 찬 인생의 활로를 열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원 (사진:위키피디아)

일본의 불교사상가인 ‘스즈끼 다이세스’는 ‘선(禪)’을 자기 생명의 본질로 찾아 들어간 예술이며,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자유의 길로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선’은 도전정신이 큰 인생태도이다. 선은 자아가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적 작용을 인정하여, 획일적인 아라한과를 설정하고 수행하는 비주체적 객체적 태도와는 차별된다.
필자는 간화선이나 조사선, 화두선을 참구한 적도 없고, 돈오돈수를 이상적으로 생각할 만큼 수행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차라리 교학과 수행의 병진이 옳다고 보는 범속한 쪽이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은 오늘날 보편성보다는 매우 특수한 인연속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크다고 보는 편이기도 하다. 대승적 수행을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불교는 각 종파별로 교의가 매우 상이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입장부터, 부처도 단지 수행의 안내자일 뿐이라는 입장도 있다. 초기불교 부파에서는 최초의 부처의 친설만이 진정한 불교라면서 남방 상좌부 방식의 위파사나 수행과 아비담마에 입각한 분석적 해체를 통한 니르바나(열반)를 목표로 정진한다. 국내에는 기복적 불교와 경전에 신령스러운 가피가 있다고 믿고 사경과 독송, 기도를 통한 구원을 얻겠다는 신앙적 종파도 상당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주체가 되어 도전하고 득도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정지된 적멸이 혜능에 와서 그 경계를 넘었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사람들은 거기서 구원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미쳤다. 혜능은 사람들이 깨달음의 승화를 원하는데 반해, 붓다의 교설에 맹목적 충성이 불교라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주체로서의 자각, 스스로가 부처라는 자각, 바로 육조단경이 당시로서는 기존 불교에서 정신적 해방과 해탈을 불교사상과 수행 역사에 던져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가람에 번지는 저녁노을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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