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마리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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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마리 개였다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1.0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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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이탁오’의 자유를 위한 주체적 인권선언

 

이지의 초상화. 이지(李贄, 1527~1602)는 명나라시기 양명학 좌파적 사상가다. 유학자이면서 이슬람교도였다. 성리학자들로부터 기행을 한다는 루머에 시달렸으며, 독존적인 인품으로 시비를 즐겼다. 기행(奇行)과 반유교적(反儒敎的)이었으며, 말이 매우 파괴적이어서 모순이 많았던 명대 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다. 이 때문에 부패한 관료층의 탄압을 받아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탁오(卓吾) 이지(李贄, 1527~1602)는 중국 명나라때 천주(泉州) 진장(晉江), 지금의 푸젠성(福建省) 출신이다. 윈난성(雲南省) 야오안(姚安)의 지부(知府)를 지냈으나 54세에 관직을 떠났으며, 중년 이후에 양명학(陽明學)과 선학(禪學)의 영향을 받았다. 만년의 저서와 가르침에서 당시의 도학(道學)을 비판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고, 결국 장문달(張問達)의 탄핵으로 옥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왕간(王艮) 이래의 태주학파(泰州學派) 등을 숭배했는데, 스스로 이단으로 자처하면서 유가의 예교를 비판하고, 공자가 세워놓은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에 반대했다. 당시의 도학자들을 향해서는 “겉으로는 도를 말하나 속으로는 부귀를 바라며, 유학자의 고상한 옷을 걸쳤으나 행동은 개·돼지나 다를 바 없다”고 맹렬히 비난했으며, 논어(論語)·맹자(孟子) 등의 유교경전들도 진정한 도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지(1527-1602)는 76년의 생애중 관직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한 쉰네 살부터 수많은 이론을 밝혔다. 이지 스스로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고 격하게 주장하는데, 이는 사상가 이지의 삶이 쉰 넷에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지는 공자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공자만 존중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공자의 이름을 빌려 탄압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가 반대한 실체는 그러므로 보수적 학술이론이요, 오직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있어야 한다는 사상의 전제주의라고 볼 수 있다. 중국사상계가 2천년 넘게 ‘공자’와 ‘공자존중’을 뒤섞어 놓고 억압한 학술의 혼미성을 바로 이탁오가 거부한 것이다.

관직에 있을 때의 속박이 싫으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닌 채 관직에 머물렀지만, 그는 불후의 학문을 추구하기로 뜻을 세우고, 빈천할지언정 꿀릴 것 없이 뜻대로 살자는 자유선언을 한다. 어린 시절 혹독한 가난을 겪었고, 관료사회에서 벼슬도 없이 농·공·상을 영위하지 않는 사람의 삶이란 그야말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금전과 재산이 인생의 슬픔과 즐거움, 성패 및 순풍과 역풍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아는 그였기에 그는 때때로 거리낌 없이 돈을 사랑한다고 말했고 권세 얻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그가 관직을 떠난지 22년, 이지는 주자학의 이름 아래 화석화된 공맹의 가르침을 넘어 새로운 인간학을 펼쳐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제목부터 도발적인 대표작 ‘분서’에서, 그는 공자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풍토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냈다.

“무릇 하늘이 한 사람을 나게 하면 절로 그 사람의 쓰임이 있게 마련이니 공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사람으로서의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반드시 공자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 천고 이전 공자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제대로 된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공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배우라고 가르치지 않았던 까닭에 그 뜻을 얻었으니, 자신을 천하의 교본으로 삼는 태도는 분명 아니었습니다.”(<분서>권1, 「경중승에게 답함」)

 

기존 질서를 비판하다.

이지는, 공자가 자신만 옳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도 맹자와 주자 같은 이들이 공자만 배우라 하고 다른 사상을 배제한 것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공자를 우러르는 도학자(이지가 말하는 도학자는 유학 도덕을 표방하는 사대부들)들을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서 짖는 개’와 다름이 없다고 비웃으면서, ‘한 가지 논리에 집착하여 죽은 책을 세상에 전하려 하는 집일(執一)이야말로 도를 망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실생활의 체험을 통해 고통을 경험한 그는 아픔과 가려움을 모르는 번듯하고 고상한 말들이 싫었다.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억누른다”는 말이 무엇이냐... 입고 먹는 것을 떠나 인륜 물리를 논하는 것은 청담(淸談)이 아니라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도둑질하는 일이라고 보았던 그는, 청빈의 사상을 좆는 이들은 결국은 빈궁으로 기울고, 실지로 유가의 학자들은 모두 벼슬길에 올라 영달을 추종하는 집단일 뿐이라는 것을 비난했다.

이탁오는 정치에 관여하는 유가의 정신과 허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노장의 정신이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평등정신을 주장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누구하나 쓸모없는 사람이 없다고 보고, 오직 군자만 쓰는 유교에 반대하고 소인도 써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군자만 성인이 되고, 벼슬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소인도 무명으로 늙어 죽기를 달가워하란 법이 있겠는가하고 반문했다. 군자만 택하고 소인에게는 심한 분별을 하면 소인은 불평과 원한을 품게 하여 사람을 악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겠냐고 따진다. 군자와 소인, 성자와 범부를 가르는 계급적 불평등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그는 갖고 있었다.

이지는 고집이 세어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고, 학문에 의심이 많았으며, 구속과 단속을 싫어했다. 구속은 무엇이 삶의 흥취인지 모르게 하고 그저 예속의 고통만 인생에 남긴다고 보고 평생을 처량하고 비참하게 남을 따라 부앙한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학문과 구도를 그르칠 것인가 고민했다.
자기의 생명이 유구하여 천지와 끝없이 짝할 수는 없는 일로서 무릇 학문을 한다는 것은 자기 생사의 근본이 되는 원인을 깊이 연구해 보고 자기의 생명이 갈 바를 탐구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만세토록 의지할 업적과 사상을 세우는 일이 바로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삶도 없고 죽음도 없어야만 영원히 고해를 떠나서 천지와 함께 하는 피안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길을 가는데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극단적 이기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강력한 의지로 획일화된 경학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는 개인본위와 행복지상주의를 피력한 것이다.
이 선언은 수천년간 속박당한 영혼이 현존 질서에 항의하는 것이요, 억압당한 생명이 자유를 갈망하는 외침이며, 가짜 병을 치료하는 극약이자,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들이 사람을 속이는 구실에 대한 대담한 도전이었다.
그의 이런 선언은 윤리본위와 사회지향적인 유교국가에서 붓다나 노자 장자보다 훨씬 파괴력을 지닌 반사회적 이단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짜 인의와 속박하는 예교에 갑갑함을 느끼던 많은 지식인들이 이지의 문전으로 몰려들었다.

 

스스로 우러나는 대로 살라

이렇듯 이지는 사회 기득권층이 명교를 빌려와 성인의 모습을 가장하는 것을 엉터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이단이 되어 그들의 허구를 비판한다.
그는 이단서를 읽지 말라는 친구에게, “사람은 각자 마음이 달라 완전히 합쳐지는 것은 불가능”하니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학문이 오묘해지는 까닭”이라고 답했다. 참 학문을 이루기 위해 유학자이면서도 도가와 불가를 수용하고 마테오 리치와 교류하며 서구 사상을 받아들인 데에는 이런 열린 자세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공맹(孔孟) 정주(程朱)의 절대 권위가 우뚝하던 시대에,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는 이지의 주장은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理)’를 근본으로 삼는 주자학의 일원론을 비판하고, ‘정(情)’을 내세워 부부의 중요성과 남녀평등을 역설한 것은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애초에 사람을 낳을 때 오직 음양 두 기운과 남녀 두 생명이 있었을 뿐 ‘일(一)’이니 ‘이’니 하는 것이 없었는데 어떻게 태극이 있었겠는가?… 나는 사물의 시작을 연구하면서 부부가 그 실마리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성색(聲色)을 즐기고 부귀를 좋아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고 삶에 연연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구속과 속박을 싫어하는 것은 자연지성(自然之性)이므로 억누르고 숨길 필요가 없다는 이지의 주장에 대해 도학자들은 터무니없는 모함으로 응했다. “사대부 집안의 여자들을 꼬여 불법을 강론하는데 이불을 들고 와 자고 가는 사람도 있다.”며 그를 음란한 늙은이로 몰아세운 것이다.
그가 남녀 사이에 생리적 차이는 있어도 식견과 능력의 차이는 없다는 주장을 한 것은 당시의 사회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급진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말로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매담연’ 같은 여성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일흔여섯의 나이에 음란방종하고 혹세무민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옥에 갇히는 몸이 된다. 그를 따르던 이들이 나서 무고함을 주장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분서’를 펴낼 때 “지금의 학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자신을 죽이려 들 터”이니 태워 없애야 한다고 예견했던 이지였다. 자신의 사상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옥중에서 담담히 죽음을 준비한다.
3월 15일, 그는 시자에게 머리 깎는 칼을 가져오게 했다. “나는 장차 나를 알아주지 않는 자를 위해 죽음으로써 분노를 토하리라!”고 예언했듯, 그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시대를 향한 분노를 토해냈다. 자결을 한 것이다.

생전의 저술을 통해 이단자임을 스스로 받아들였던 이지. 오늘날을 가리켜 자유정신과 진리정신, 개인주의와 개성이 인류역사상 가장 꽃피웠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아직도 세상에는 예교의 유령이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지는 학문의 즐거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문의 즐거움은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보아 성현의 시비가 덮어 가린 장막을 힘껏 열어젖히고, 천 년을 내려온 포폄의 고정된 기준을 뒤집어 엎어, 옛사람에 대한 울분을 토해내고 후세를 위해 길을 여는 것이다”라고.

중국인들은 지금까지 스스로 대국이며 중화(中華) 라고 자처하여 회하문명이 전부이고 사방 밖은 모두 오랑캐여서 오직 자기들만이 공물을 받을 자격이 있고, 문명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중국에서 중화의 근간인 군자의 나라, 예교의 인의를 무시하고 개인주의를 부르짖은 이지는 특이한 이단이요 광인일 것이었다.
근대의 ‘루쉰’은 이러한 중국을 일러 “군중적 차원의 애국적인 자대(自大, 스스로 위대함) 만 있을뿐, 개인적 자대가 없다”고 애석해 했다.
새로운 사상과 정치, 종교적 도덕적 개혁의 발단은 모두 개인적 자긍심과 잣대가 토대이다. 홀로 우뚝 솟아 천 명의 성인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자대자족(自大自足)의 정신, 그것이 이지의 사상이 아닐까?


허구의 도학을 깨고 여실지견을 따르라

이지의 <허실의 변>을 보면, “도를 배울 때는 허를 귀하게 여기고, 도를 실천할 때는 실을 귀하게 여긴다. 허로써 선을 받아들이고, 실로서 굳게 지킨다. 허하지 않으면 선택한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실하지 않으면 지키는 것이 굳지 못하다. 허하되 실하고, 실하되 허하여 참된 허는 실이요, 참된 삶은 허이다.” 라고 하고 이는 오직 진인만이 지닐 수 있는 자세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여실지견하면 오히려 뇌두고 화내지 않을 수 없다면서,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군자라고 하며, 무엇을 모르기 때문에 화를 낼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오히려 화를 내는 일반인들이 여실지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군자연하는 이들에게 굽히지 않았고 한가지라도 장점이나 잘하는 것이 있으면 노예나 말단에게도 절하여 모시는 않는 일이 없었다. 그는 까다롭고 포용하지 못하는 자기의 성품을 두고, 그가 포용하지 못하는 것은 가진자들, 권세를 추구하고 부귀에 아첨하는 무리를 포용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더 나아간 것은 <초담집>의 관통하는 사상이다. 그는 여기서 성색(聲色)을 즐기고, 부귀를 사랑하고, 현달하고 싶어 하고, 삶에 연연하여 죽음을 두려워하고, 구속과 속박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모두 사람의 자연지성이요 오롯이 정당한 것이어서, 근본적으로 억압하고 숨기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지성에 따라 역사가 움직이고 세상의 동인이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색안경을 벗고 역사를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 개인이 백세토록 향기를 남기든, 만년동안 악취를 남기든, 조건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도덕과 설교의 조건을 걷어내고 가짜 도학에 휩쓸리는 말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이지는 “도학을 강론하는 사람은 단지 말만 잘하려고 할뿐, 자신의 행실이 그에 도달하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을 사실 너무 잘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도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한마디로 의욕적으로 도학에 심취하면서 스스로의 자연지성을 억압하는 이론은 영원히 도달하기 어려운 가짜 도라는 것이다.

이지는 도학을 따지는 풍조가 세상에 만연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명성을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도학을 따진다. 도학이 명성을 쌓기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벼슬에 나서지 못하는 자들이 도학을 따진다. 도학이 등용에 길이 될까 싶어서다. 하늘과 사람을 속이는 자는 도학을 따진다. 도학이 속이기 좋기 때문이다. 도학의 폐단은 오늘날까지 이르러 겉으로는 도학을 한다지만, 속으로는 부귀를 추구하고, 학문이 깊고 우아한 복장을 하였으되 행실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도학의 함정이다. 그래서 도학을 논하는 것을 밑천삼아 재능 없고 학식 없고 장래성 없고 식견이 없는데 부귀를 얻고자 하는 자는 도학을 논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사회현상을 귀납적으로 꼬집었다.
이러한 비판에 학계는 이지가 여자를 밝히고, 재물을 좋아하고, 부귀영화를 좆는 것을 정당화한다며, 시기 협잡하였다. 그리고 이지가 주장하는 ‘자연지성’이라는 것이 마치 강제 약탈과, 명예와 이득을 위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염치없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모함했다.
이에 이지는 나라가 기우는 것이 여색 때문이라는 편견이나 모든 악의 근원이 음행이라는 도학자들의 종법적 예교는 허구라고 받아쳤다.
이지는 사람의 ‘자연지성’이 천기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지기를 세우고 마음의 근원을 청정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천기는 기욕(자연지성)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인격의 독립을 추구하고,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고, 자아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 사람의 ‘자연지성’이라는 매우 보편적 인권사상인 것이다. 물론 ‘성색견마’와 ‘부귀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자연지성’이지만, 더 소중한 자연지성도 있음을 그들은 외면한 것이다.

이지는 그래서 불교승려가 사회적으로 최하층민이던 그때, 불법(佛法)에 대해 여제자들과 흔쾌히 논했고, 노과부와도 학문을 나누었으며, 젊은 여성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情)’에서 피어나 ‘예의’에서 멈추었다. 육체의 형이하학적 욕망이 정신의 형이상학적 승화와 적절히 어울렸고, 세상사람들에게 부끄러울 만한 일들은 없었다. 그러나 종법신분사회였던 그시절, 이지는 음란한 자, 이단자로 몰려 감옥에 끌려간 것이다.

 

굳어진 견문과 도리의 껍질을 타파하라

도산 안창호는 “세상에 참된 지도자가 없음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참된 지도자가 되어라”라고 하였다. 공자는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가 남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라”고 하였다.
이지는 말한다. “지금 사람 중에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모두들 자기가 참된 지도자, 정법의 수호자라고 나선 이 시대에, 여전히 문구에 집착하는 경학주의는 그만해야 되지 않겠는가? 대저 사서오경이라는 것이 당시 사관이 지나치게 높이고 칭찬한 말이거나 극도로 찬미한 말들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세상물정에 어두운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기억으로 더듬어 머리는 있되, 꼬리가 없거나 뒤의 내용은 있는데, 앞을 빠뜨리는 등 그저 편취된 소견따라 기록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니, 후학들은 이를 판별하기 어렵고 그저 성인의 말이라며 경전으로 배우고 있지만, 그중 태반이 성인이 한 말이 아님을 그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그 모두가 성인의 말이라고 하여도 당시에 요컨대 뭔가 목적이 있어서 한 말들이고, 병을 고치려고 의사가 처방하듯이 상황에 처해서 한 말들 일텐데, 오늘날 모든 세상만사에 대입하여 잣대로 삼는다면 그 또한 우스운 일”이라고 갈파하였다.
사서오경을 천천히 정독하다보면 이지의 주장이 곧 드러나는 데도,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경학자들은 지성으로 공맹사당에 조아려 절하고 숭배하기만 했으니 어찌 의심이나 품어보았겠는가? 그래서 육경은 도학의 구실이자, 거짓된 사람을 숨기는 도학림의 무성한 숲이 되어 그 근원을 밝히기 어렵게 한 것이다.
경전공부는 본래의 청정동심을 찾아 지키는 것이지, 대의를 절취하고 성현을 사칭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몇마디 써먹기 위해 성인의 지혜를 주워 담고 장황하게 도덕을 떠벌리고 이름을 팔고 정법의 수호자연한다면 차라리 그런 공부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이지는 사회화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동심, 특히 명교의 주입과 도덕 상벌의 동기가 작용하는 종법질서에 회의적이었다.

견문과 도리라는 것에 대해서, 이지는 자기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고 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그것은 사회화된 언어요, 거짓 사람이 거짓이야기를 하고 거짓 일을 하고 거짓 글을 쓰고 이미 그 사람이 거짓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글은 동심으로부터 나오며, 견문이나 도리라는 껍데기가 설자리가 없어지면 어떤 글이든 새로운 이야기를 써도 좋은 창작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왜 꼭 과거의 좋은 시에서 문장을 찾으며, 수천년 굳어진 가르침에서만 진리가 있다고 하는가? 그저 순구한 동심에서 뛰어나오는 동심의 언어가 선진시대, 선진문물, 박제된 경전보다 더 중요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지의 숭고한 인격과 남을 뛰어넘는 재능에 대한 믿음과 복종, 그리고 일종의 깨달음을 묘사하면서, 인생은 아주 잠깐으로, 오직 천기를 받고 지기를 얻은 뜰 안의 꽃처럼 피어나야 할 때 스스로 깨달아 활짝 피어야만 삶을 그르치지 않고 웃음을 머금고 세상을 떠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결점이 있는 사람을 좋아했는데, 결점이야말로 바로 그만의 개성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서양교육은 천편일률적인 소모품을 찍어내는 공장이 되었는데, 이 우주도 땅(지구)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았던 그는 본래 완벽함은 없다고 보았다.
주희가 “하늘이 공자를 태어나지 않게 했다면 만고의 역사는 기나긴 밤”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이지는 공자의 신격화에 황당함과 가소로움으로 조소했다. 도학가와 모든 공맹의 무리는 옛것을 숭상하여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공자가 없어도 태양은 상고시대부터 떴고, 앞으로도 뜰 것이라는 것이다. 태양이 없으면 인간은 암흑이 지배하는 기나긴 밤에 빠지지만, 중국이나 공자가 없었다고 우리가 사상의 암흑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이탁오의 그 방대한 저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신의 자유에 대한 추구, 당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그의 묘비에 남긴 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노인은 영원히 살리라. 부처인 것 같기도 하고 마귀인 것 같기도 하고, 홍명을 본받아 떠나지 않으면 항룡은 어떤가?
책을 태우라 했지만 다 못 태우고 노년의 괴로움이라 했지만 괴로움 많지 않다.
노수에서 해마다 휘파람 불며, 그대의 호연한 노래 길이길이 남아있다.”

 

이탁오의 주요 저서

《분서》(焚書)
전 6권이며 《속분서》 5권이 부가되었다. 이 책은 이탁오가 관직을 그만두고 50개 후반부터 십여 년 동안 써놓은 서간·수필·시 등을 수집한 문집이다. 이 중에서 대표적 논문은 제3권에 수록되어 있는 〈동심설(童心說)〉인데, 동심이 상실되는 것은 문견(聞見)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안의 주인이 되고 도리(道理)가 들어와서 안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특히 그 도리를 부정적으로 간주하였다. 이 외에 《분서》에는 “사람이 각각 생지(生知)를 소유하고 각인이 다 부처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의복을 입고 밥을 먹는 것. 이것이 인륜의 물리(物理)이다”라고 하는 등 독자적이면서 자유로운 견해가 많이 제시되어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장서》(藏書)
전68권이며, 《속장서》 27권이 부가되어 있다. 《분서》가 그의 문집으로 잡다한 것을 수집한 것에 비해 이 책은 전국 시대에서 원대(元代)까지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의 종합 역사서이다. 이것은 이탁오가 지선원에 체류하고 있었던 시절의 십수년 동안에 저술한 것이다. 시비선악에는 정체(定體)가 없고 전부 상대적·병존적이라고 하여 장자의 사상과 비슷하다. 이 책의 전반적인 논조는 무위(無爲)·무사(無私)에의 반론과 공리의 주장이라든가 전통적 가치관·규범의식에의 반발과 송나라의 유교와 도교에 대한 부정 등 매우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견해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출처:위키피디아)

 

[이 글의 주요 내용은 중국의 평론가인 ‘옌리에산(烈山)’과 ‘주지엔구오(朱健國)’가 함께 쓴 <이탁오 평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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