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최초 호텔과 그 요정은 지금.."
상태바
"제주도 최초 호텔과 그 요정은 지금.."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1.09 22: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문화유산답사기)찾지 않으면 숨는..제주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알고 그 향토문화를 찾아가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누가 안내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길.


더욱이 제주시 시내권은 이미, 개발이 도를 넘어 우리의 문화자산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라 더욱 그렇다.


문화유산이란 우리가 소중하게 바라보아 주면 보물이지만 옛날 것들이라 버려도 될 것들로 치부해 버리면 보이지조차 않는 잃어버린 존재가 돼 버린다.

그런 마음으로 돌아본 제주의 옛길들.
옛날 성이 있던 자리는 대로로 변해버렸고 그곳에 성굽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다는 곳은, 무너져 널브러진 돌 만큼이나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겨우 남은 이들 작은 조각들을 줍듯  하나하나 찾아 문화답사를 나선 지난 8일(일요일)

제주문화유산답사회(회장 고영철)는 이날 제주시 관덕정을 중심으로 성내라고 불리는 골목길을 찾아 옛길을 따라가는 제주문화유산답사에 나섰다.

제276차 정기답사의 제목은 ‘제주성 옛길을 찾아서(1)’였다.

제주시내를 산책하듯 걸었던 이날 참석한 인원은 약 30여명.

새해 첫 답사라 그런지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참가해 시내 골목길을 많이도 돌아 다녔다.

 

 

오전 9시 관덕정 앞에 모여 제주성내 서쪽지역 탐방을 시작했다.

이날 탐방안내를 맡은 탐라곰(신영태) 님은 현재 생태관광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제주문화유산답사회의 전속(?) 카메라맨으로도 활동하는 분이다.

처음 안내를 맡은 책임감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는 잘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답사 해설을 맡은 탐라곰 신영태 선생

제주성 일대는 탐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근현대시기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곳으로 제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집적돼 있는 지역.

일제강점기에 제주성 일대가 차츰 훼손되면서 제주를 상징하는 대표적 축조물이 일부만 남은채 지금은 거의 대부분 사라진 상태다.

 성굽길이 조금 남은 흔적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신작로가 개설된 이후 점차 도시확장 과정 속에서 평화롭고 생기 넘쳤던 서민의 생활문화공간과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적지 않은 옛길이나 옛 골목들이 사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덕정이 중심인 것은 제주목관아를 중심으로 이앗골,객사골, 영뒷골, 옥길 등은 골목길에 관청시설들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또 서문샛길, 남문샛길, 성굽길 등은 제주성의 성곽과 성문으로 가는 골목길에 붙여진 이름들로, 제주성 주변의 옛길의 역사적 가치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하고 역사가 담긴 옛길의 정감까지 느끼게 했다.


영뒷골(영두골)은 영리청 뒷길을 말한다.

이 길은 지금은 관덕정에서 북쪽으로 상아의 서쪽을 따라 가다가 (관덕로3길) 서쪽으로 이어진 무근성7길의 좁은 샛길인 이 골목길과 주변마을을 이른다는 설명.

 

영리청은 안무사영이라고도 불리우며 군사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이었다.


당시 제주목사는 목민관이면서 동시에 전라도관찰사의 군무를 위탁받은 수군, 병마의 군사령관인 절제사(후에 방어사로 바뀜)도 겸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따라간 길은 창뒷골이었다.

사창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 주변골목길을 말하는데 사창이란 조선시대에 각 고을의 환곡을 저장해 두었던 관청이다. 현재 관덕로 9길이다.

사창은 진휼창과 함께 같은 경내에 있었고 그 위치는 관덕정 서쪽 옛 시청 청사 자리라고 한다.

 향교입구로 사용되던 길
   

이어진 길은 서문사거리를 지나 서문시장 입구 한길 건너편 북쪽으로 난 골목길에 있었던 비룡못에서 서쪽으로 목사가 향교에 참배하러 갔던 길이었다.

제주향교는 수차례 옮겨다녔다고 하며 1827년 이행교 목사때 마지막으로 옮겨와 현재의 향교자리에 위치했다고 한다.

골목길 끝에 있는 이 길은 지금 학교운동장으로 인해 향교입구는 돌담으로 쌓아 사라져 버렸지만 향교를 드나들었다는 그 길이 좁지만 참 좋았다.

다시 무근성길로 들어섰다.

무근성은 제주성 밖의 서북방, 탑동과 병문천 하구 제주성 주변의 삼각주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탐라국시대에 있었다는 옛 성터를 말한다.

궁궐자리였다는 제주우체국 전경

 객사터가 있었던 제주북교
     

무근성은 옛성이 있었다는 곳에서 병문내창 위로 난 벌랑길과 탑알로 난 작은 길 사이를 말한다.


증보탐라지 기록에 의하면 고주성(古州城)은 주성 서북쪽에 옛 성터의 유적이 있으니 마을 이름은 묵은성(陳城)이라고 하여 무근성을 진동성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성이 있었다는 자리는 지금 자동차가 다니는 대로로 변해 버렸고 오직 한 군데만.. 어느 초가집 구석에 돌 수십개 정도 만이,  성굽길이라는 그 조그만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성을 만들어 이어졌을 성담은 다 허물어져.. 땅에 그 돌들이 누워있는 모습 또한 처연했다.

 
     

이어진 탑알길.
우리가 어릴 적에는 탑동을 탑바레 또는 탑바리라 불렀다.

그 명칭은 이날 옛날 탑을 쌓았던 곳이라 탑알이라 불렀으나 그 후에 한자표기에 의해 탑동이 되었다는 설명.

무근성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인가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밭이었다고 한다.
탑을 쌓은 아래쪽 마을이라는 뜻에서 탑알, 탑바리라고도 불렀으며 탑알길은 이 마을길을 말한다고 한다.


이곳에 탑을 쌓았던 이유는 이 고을에 청상과부가 많아 이를 막기 위해 탑을 쌓았다는 것.
하기야 옛날 고기잡이를 나갔다고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으랴.

 

 옛날 감옥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옥길이다

무근성 지역에는 또 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죄수들이 오갔다는 옥길이 남았다.


지금의 제주동부경찰서 중앙지구대가 있는 곳이 감옥이었다고 하니 그 때나 지금이나 관청의 위치는 성격상 달라진 게 없는 듯 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이날 답사에서는 제주북초등학교에 제주목 객사인 영주관이 있었다는 사실과 이 길 동쪽주변 마을을 객사골로 불리우는 것도 이 영주관 때문에 붙여졌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다..

 제주도지사 관사로 사용되던 곳

그리고 바로 옆 지금의 노인대학 자리는 일제강점기때 제주도사(관사)였다가 해방후 제주도지사 관사로 이용했었다고 한다

이 바로 앞길 두목골(두뭇골)은 두목, 즉 북두칠성의 눈에 해당하는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칠성골이라는 이름은 탐라국시대부터 제주성내의 일도 아도 삼도동에 흩어져 있던 칠성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칠성대 7곳의 장소중 3곳이 이 도로의 양쪽에 있었던 데서 마을이름을 칠성골로 불렀다고 한다.

 

 

고영철 회장은 답사중 1912년 전남제주자혜의원으로 출발해 해방뒤 1946년 제주도립병원으로 바뀐 제주의료원 즉, 제주대학교병원 자리에서 못내 안타까운 아쉬움을 표했다.

"1935년 개축공사를 시작해 1936년 준공된 자혜의원 건물을 없앤 것이 너무나 아깝다"는 것.

"결국 병원으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아까운 문화유산만 사라져버렸다"는 설명이었다.

특히 "알한짓골에는 100년이 훨씬 넘은 고옥이 남아 있어 이에 대한 보존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밝혔다.

고 양홍기 변화사가 살았던 이 가옥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지만 최근 보존보다 파괴쪽으로 가는 현실에서 더욱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제주도 최초호텔인 동양호텔

제주에서 가장 큰 요정 중앙옥 자리(지금은 일반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날 답사에서는 제주도 최초의 호텔이며 이승만 대통령이 늘 103호실에 묵었다는 동양호텔(일부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과 제주도에서 가장 컸었다는 요정 중앙옥(지금은 일반주택으로 사용) 자리도 가 볼 수 있었다.

이날 제주문화유산 답사를 하는 동안 "문화유산이란 우리가 불러주지 않는한 절대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 시간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우리의 유산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관심을 갖고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의 유산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걱정이 컸다.

 

 

 100년이 넘은 가옥..보존대책이 필요하다

   

아니 그보다..

눈앞에 보고도 알 수 없는 숨바꼭질처럼,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제주문화유산의 문맹이 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이었다.

이날 답사는 제주문화유산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는 물론 이에 대한 연구와 보존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서문시장안 제주흥사단 사무실에서 답사의 마무리시간을 가졌다.

더 늦기전에, 숨어있는 제주의 진짜 문화유산을 찾아 우리 조상들의 훌륭한 유산을 빛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지난 24년간 끊임없이 이 모임을 이어온 제주문화유산답사회는 그런 의미에서도 제주문화의 지킴이로 말없는 행군을 계속 하는 중이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박씨초가

 

 구 남양방송국 건물이 곧 헐린다고 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성담이 있던 자리는 대로로 변했다

 제주도 골목길의 전형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