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만난 짧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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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만난 짧은 행복..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1.3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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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직접 가 본 왕오천축국전 이야기

 

둔황의 막고굴

혜초와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의 원본을 살펴보신 분들은 사실 건조한 내용에 실망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돈황에서 최초로 이 고문서를 약탈해간 서양사람도 처음에는 세계4대 기행문을 발견했다고 흥분했지만, 그 건조한 내용의 축약적 성격에 실망했다고도 한다.

나도 처음에는 몇 천자에 불과한 이 기행문이 그곳의 간단한 경제사정과 이동 거리, 불교신앙유무나 간단한 풍속의 평가와 가끔 자기 감상을 덧붙인 시 몇 수가 고작인 것이 무슨 중요한 책인가 싶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인도여행을 해본 후에는 그 생각이 바뀌었다. 짤막한 그의 기행문 행간에 한 구도자의 담담하지만 진지한 일관성을 본 것이다.

사실 인도를 처음 가는 여행자에게는 이 지구상에 저런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할 말을 오히려 없게 만드는 몽환 속에서 헤매다 온 것 같은 아득함의 땅이기도 하다. 특히 혜초는 바닷길로 신라를 떠나 중국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베트남, 인도네시아를 거쳐 동인도의 해안에 도착해서 인도내륙을 순례하고 카슈미르나 간다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키스탄, 터키, 중앙아시아, 파미르를 지나 실크로드를 거쳐 장안에 들어온다. 4년간에 걸친 스펙터클한 그의 여정은 오직 혼자 걸어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행간의 군데군데 천일야화같은 모험의 흔적들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중국에서 역경사업에 동참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의 인도여행의 목적이 그 일환이었을지도 모르고, 여행경비도 거기서 조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구도자였다. 특히 그의 구법의 원칙인 소승과 대승의 구분은 엄격해서 그 지역의 불전을 중요시했다. 8세기 광활한 동천축, 남천축, 서천축으로 이어지는 그의 여정에는 소승과 대승불교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기행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 얻은 영감은, 내 삶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뭇 삶의 내용이 소승과 대승의 뒤범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도라고 하는 다른 종교의 이야기도 빠짐없이 서술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단정하지 않은 공존이 천축의 세계인 것이다.

대승적 불도 구법승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행간에는 한편, 그의 소승적 편린도 함께 묻어 있음을 느낀다. 그런 그가 드라이하게 적어간 왕오천축국전을 내가 주목하는 것은 중세 일본의 ‘도연초’적인 초연함을 느껴서일 것이다.

도연초에서 저자인 요시다 겐코(1283-1353)는 그 서단에서 “이렇다 할 일도 없이 지루하고 심심하여, 하루종일 벼루를 붙잡고, 마음속에 오가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쓰노라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복받쳐 나도 모르게 미칠 것만 같구나”라는 그 심사가 나에게도 적절하다.

 

  

석가모니 붓다의 탄생지인 룸비니성지

 

룸비니의 베트남 승려

 

룸비니에 머물 때였다. 아침 일찍 룸비니유적을 지나가는데 풀잎에 아침이슬이 영롱한 연못가에서 흰 승복을 입은 앳된 승려가 붓다 탄생지를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니 베트남에서 온 승려란다. 새벽부터 절을 시작했는지 가사의 아랫도리는 이슬에 꽤나 젖어있었고, 눈부신 아침햇살에 실루엣과 함께 한 마리 학의 춤처럼 다소 액션적인 느낌이 들었다. 붓다의 탄생지에다 저리 절을 해대면 득도가 되나? 수행에 좀처럼 입경하지 못하는 나는 치기어린 심보로 그리 무시하고는 지나쳤다.

하루종일 룸비니를 쏘다니다가 해가 뉘였해져서 다시 그곳을 지나치는데, 그 승려는 아직도 절을 하고 있다. 자세도 아침과 별반 다를 바 없이 흐트러짐이 없다. 가까이 지나다보니 만트라인지 경전을 암송하는 것인지 중얼중얼한다. 얼굴을 보니 스물을 갓넘긴 앳됨이 더하다. 그 스님 참 곱기두 하다... 나도 중얼대며 왜 그리 절을 하루종일 하는지 궁금했다.

다음날 아침 새벽에 한국 절의 예경 목탁소리에 잠이 깨서 숙소의 문을 열고 기지개를 펴는데, 새벽 안개 속으로 그 연못에서 어렴풋이 절을 하고 있는 그 승려가 보였다. 아니, 밤새 절을 했나? 붓다도 피골이 상접한 고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했는데, 왜 저리 극성이지...? 물은 마시기나 하고 있나?

아무튼 내 가슴 한군데서는 묘한 치기와 함께 약간의 쿵쾅이는 찌릿함이 일어났다. 그 날도 하루종일 우마차를 타고 근처 마을에 놀러가서 놀고, 한국배낭여행객 서넛과 시장에 가서 장도 보고 가난한 농촌마을을 하릴없이 쏘다녔다.

저녁에 돌아와 보니 그 승려는 여전하다. 그런데,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그의 절은 계속 되고 있었다. 언제 잠깐 쉬는지 승복이 깨끗한 것을 보면 용변과 식음은 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나는 인체의 한계와 몰래 언제쯤 쉬는지 그런 것에 신경이 곤두섰다. 밤 12시에도 나가보고, 새벽 4시에 나가보고, 태양이 너무 뜨거워 한 낱에는 땀이 줄줄 흐르는 낮 1시경에도 일부러 지나가보았다. 어린 스님이 뭘 얼마나 알며, 모든 것은 마음안에 있다면서 원효대사가 굳이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던 고사며, 참 무식하게 저런다고 자기가 붓다가 되겠나 이런저런 궁시럼 거림이 끝없이 생겼다가 스러졌다.

4일째 되는 날 나는 바라나시에서의 약속 때문에 할 수 없이 룸비니를 떠나야 했다. 한밤중에 떠나는 버스를 타야 소나울리 국경을 통과하고 다음 날 아침 바라나시에 8시간이 걸려서 도착해야 되기에 배낭을 매고 연못을 지나다가 여전히 절을 하고 있는 그 스님에게 인기척과 함께 합장을 하고 하는 듯 마는 듯 인사를 했다. 어둠 속이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며칠 유심히 지나다니는 나를 알아보는지 지나쳐간 내게 뒤에서 몸을 숙이고 인사하는 듯이 느껴졌다. 몇 걸음 지나쳐서 돌아보니 자세를 고치며 다시 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열두어 걸음 지나쳐가던 나는 돌아서서 배낭을 내렸다. 그리고는 스님께 삼배를 했다. 눈물이 조금 돌았다. 세속의 상식과 알량한 내 잣대로 그 스님을 재단한 것이 너무 미안했다. 나중에 룸비니에서 온 여행객에게 들으니 그 스님은 그 뒤로도 계속 절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쥐가 발밑으로 드나들고, 악취 나는 50년 된 밤 버스에서도 그 스님을 생각하니, .... 무엇을 득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참 아름다웠다.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하이데라바드의 카이라티베검무슬림사원

 

하이데라바드의 하얀 노인

 

기차를 타고 중인도의 무슬림도시 하이데라바드에 도착한 것은 가장 더운 팔월의 한낮이었다. 40도가 웃도는 중인도의 정오는 작렬하는 태양 빛을 받아 온통 흰색으로 칠해 놓은 회교 도시의 반사되는 그 눈부심으로 눈을 거의 뜰 수가 없다. 혀가 축 늘어진 한 여름의 개처럼 숨쉬기도 힘들게 헐떡거리면서 상점에 들어가 냉장고에 든 생수를 한 병 샀다.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돌아서는데, 눈 앞에 웬 노인이 버티고 서 있다.

“헤이...기브미 워터...” ....물을 달라고?? ....먹다 남은 생수통을 건넸다. 그 물을 남김없이 다 마신 그 노인이 어눌한 영어로 말을 걸었다. “땡큐유어카인드니스... 기브유빅프리젠트...” 뭐 적당히 그런 말이다. 물을 얻어 마셨으니 그 보답으로 선물을 하겠는데, 당신 인생에서 이러한 행운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운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라....

살펴보니 하얀 옷에 하얀 모자에 하얀 천을 두르고 5~60센티는 됨직한 흰 수염에 간디가 쓴 안경을 걸치고 홱 돌아서서 걸어가는데, 신선이 따로 없었다. 얼떨결에 홀리듯이 그 노인의 뒤를 따랐다. 작렬하는 태양빛을 받아 노인의 흰 옷이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더구나 어떤 무슬림 사원의 흰 대리석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도 없었다. 흰 비둘기 수백 마리가 광장을 가로질러 날아올랐다.

사원의 가장자리 탑그늘에 자리를 잡은 노인은 역시나 하얀 천을 섬세하게 깔고는 거기에 앉으라고 하였다. 음.... 앉았다. 잠시후 노인은 품에서 역시 하얀 천으로 여러겹 쌓은 물건을 꺼냈다. 천천히 펼치는데, 맑고 투명한 보석들이었다. “디스이즈푸어다이아몬드.. 디스이즈마이프레즌트...” 그러면서 날 보고 가지란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진짜 다이아몬드라고 하면서 연신 나의 눈에다 비춘다. “프리...프리...” 공짜라고 하면서 드디어 당신의 행운이 이제 시작되었다...그렇게 말을 시작한다... 다시 품에서 다른 것을 꺼내어 펼치는데, 이번에는 빨간 색의 보석들이다... “디스이즈푸어루비...베리베리뷰티풀...” 음....내가 루비의 색깔을 좋아하긴 하지.... 모두 20여개의 보석들을 가지란다... 대신 이 사원에서 당신의 행운이 시작되었으니 3천루피(5만원정도)를 내야만 한다고 한다. 3천루피? 이사람 사기꾼인가? 저건 가짜 유리들 일꺼야... 인도에서 3천루피라면 큰 돈인데, 저런 유리조각을 주고서는 돈을 달라고?

영악한 한국사람인 나에게 사기를 치다니.... 나는 노인에게 길거리의 보석상에 가서 감정을 하자... 그 다음에 그 보석들을 사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더구나 외국인에게 접근하는 인도인의 90퍼센트는 대부분 사기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노인은 계속해서...이것은 파는 것이 아니라 단지(쟈스트를 계속 강조했다..) 선물일 뿐이다. 돈은 주어도 좋고 안주어도 그만이지만, 행복의 시작에 대한 중요한 의식이니 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이다. 주변에는 벌써 수십명의 인도인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주변 인도인들에게 이 보석이 진짜냐고 해도 그저 고개들만 옆으로 갸윳거릴뿐 누구하나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결국 결정을 했다. 당신은 아마도 사기꾼같다. 그러니 그 돌들을 다시 말아서 집어넣으라... 대신 당신의 행운은 고맙게 받겠다. 보석상에 가서 감정을 하지 않을거면 10루피를 줄 터이니 그만 가시는게 좋겠다... 그렇게 대충 설명해줬다.

몇 번을 설득하던 노인도 더 이상 안되겠는지 당신의 행운은 이제 끝났다. 그렇게 말하고는 주섬주섬 흰 천을 다시 잘 털어서 가사처럼 어깨에 걸치고는 대리석광장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너무 더워 숙소를 잡아서 쉬고 저녁에 어슬렁거리면서 살펴보니, 하이데라바드는 단지 무슬림도시만은 아니었다. 전세계 진주거래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었고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모든 보석들이 거래되는 주얼리시티였던 것이다. 광장에는 여기저기 노점들이 대부분 보석들을 팔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여러 종류의 이런저런 보석들을 한 개에 100루피에서 200루피에 샀다. 나중에 보석으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충동이 있어서였다. 그제서야 나는 낮의 그 보석들이 생각났다. 설령 그것이 가짜 다이아몬드면 어떤가... 그 자체로 빛나는 보석인걸... 보석이라고 누가 이름붙이고 감정을 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외연적 그러한 의심은 어쩌면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닐까? 말과 글이 다르고, 직접 만나서 보는 것과 온라인에서의 글이 다르고, 또 함께 일을 해보면 그 느낌이 천양지차의 차이가 있는 것이 사람인데 말이다.

가끔 그 노인의 보석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을 생각한다. 의심과 경계함과 평가함, 그 이기적인 탐심 진심이 언제나 나를 지배하고 있음을, 그래서 진정한 보석을 간직할 틈새조차 없는 나의 굳어있는 심장을. 돈거래로 살 수 있는 보석보다도 더한 거래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평생 대하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보드가야에서 만났던 남스페인 출신의 스텔라아줌마는 인도거지를 만나면 함께 데리고 음식점에 가서 같이 밥을 먹는다. 돈이나 주고 말지 굳이 식당에 함께 가느냐고 하면, 새로 만난 친구일 뿐이란다.

 

 

교토 청수사(기요미즈테라)의 입구

청수사

 

일본 교토에 머물 때의 일이다. 교토에서는 청수사가 유명하다고 하길래 찾아갔다. 그런데, 다른 절을 청수사로 잘못알고 그곳만 보고는 그냥 돌아온 적이 있었다.

북경의 자금성을 처음 갔을 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 궁궐이라면 경복궁만 알다가 난생처음 외국에 가본지라 자금성의 규모가 경복궁만 한줄 알았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당시에 자금성 입구에 있는 소공원을 자금성으로 알고서는 한 시간 남짓 구경하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도연초의 일화 한토막. 닌나지(仁和寺)라는 절에 있는 중이 나이가 들도록 교토의 하치만구신사를 한 번도 참배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 혼자 마음먹고 참배에 나섰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는 산기슭에 있는 고쿠라쿠지(극락사)와 교리진자(고량신사)등 말사들만 참배하고는 그게 다인줄 알고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하고 돌아와서는 동료들에게 오랜 숙원을 이제 풀었는데, 듣던 것보다 더 훌륭하더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위의 산위로 다들 올라가던데, 그곳에 무엇이 있나 궁금했지만, 나는 하치만구를 참배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으므로 산 위로는 안가 보았지요.. 라고 하였다. 그는 정작 하치만구신사 근처도 못가본 것이었다.

어떤 사소한 일에도 안내자는 필요한 법이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찾는 일에는 여행 안내서만으로는 나같이 나쁜 눈을 가진 자에게는 산기슭만 맴돌게 할 뿐이다. 일본여행을 나는 대부분 혼자서 다녔다. 일본인들의 과잉친절이 부담스러워서였는데, 사실 일본인들은 과잉이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이다. 길에서 만난 붓다의 과잉친절이 부담스러워 나는 에둘러 다니는 것은 아닐까... 인도에서 나는 항상 길을 잃거나 정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타곤 했다. 내 인생도 그래서 한참을 돌아왔다. 나는 장님이다. 그것을 알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라즈기르의 날란다 불교대학 유적

 

왕사성에서 만난 김법사

 

라즈기르로 가는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린 후에야 이 버스가 란치로 가는 버스임을 알았다. 란치는 라즈기르와는 정반대방향이다. 중간에 내려서 다시 3시간 만에 가야로 돌아와서는 나에게 이 표를 준 매표소 직원에게 욕을 한바탕 해댔다. 나는 라즈기르 간다고 했는데, 당신은 왜 란치행 버스표를 주었느냐... 그러자 그사람 왈... 자기 귀에는 내 영어가 ‘라즈기르’가 아니라 ‘란치’로 들린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해도 여전히 라즈기르가 란치로 들린단다. 허..참...결국 그날 버스가 끊어져서 다음날 라즈기르로 갔다. 단어하나의 잘못된 의사소통은 그렇게 정반대의 다른 곳으로 사람을 끌고 간다.

라즈기르의 성지를 돌아다니다보니, 지치고, 강도가 횡행하는 등 위험하기도 해서 사람이 많은 시장으로 갔다. 거기서 과일이랑 음료수를 사고 있는데, 한국 비구니스님이 눈에 띈다. 너무 반가와서 달려가 보니 한국사람 대여섯이 함께 장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 사찰에서 온 성지순례단인데, 지프2대를 빌려서 2주일동안 순례중이라고 하였다. 다음 목적지는 왕사성이란다. 나는 좀 뻔뻔스럽게 부탁을 했다. 지금 나는 너무 지쳤다. 그러니 지프의 자리가 남는다면 나를 좀 태워달라고... 그러자 스님과 안내하시는 법사님이 흔쾌히 승낙을 한다. 그렇게 나는 그날 그분들과 매우 편안하게 여행을 했다. 저녁에 도착한 한국 절에서 원래 법사님은 혼자서 방에 묵어야 되는데, 남자라고는 나와 법사님 뿐이니 함께 묵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소상한 개인의 내력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이가삽십대 중반인 김법사님은 늦장가를 들어 6개월 된 딸을 두고 성지순례단을 이끌고 왔는데, 성지순례는 도통 재미가 없고 보살들과 같이 어울리기도 싫고 딸이 너무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밤에는 눈물도 흘렸단다. 특히 화장터에서 간단한 법회를 가졌을 때는 무상함과 고의 종지를 이야기했는데, 나는 딸이 그립고 집착이 더 좋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은 애기였던 라훌라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을까요? 그런다.

위로한답시고 내가 말했다. “중국의 고승 법현삼장법사도 인도에 갔을 때, 고향에서 가져온 부채를 보고는 향수에 젖어 몸져 누워서, 고향의 음식을 먹고 싶다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분이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 어지간히 약한 모습을 보이셨군요?’ 하고 비웃듯이 말을 하자 한 스님이, ‘참 부드럽고 인간미가 있는 스님이셨네...’ 그랬답니다.”

속세를 떠나 인정을 초월한다고 무여열반의 경지겠는가. 유여 여여하게 가도 그만이지. “다음부터는 너무 경전이나 수행이야기만 하지 말고, 그냥 느껴지는 감상이나 솔직하게 그리운 이야기를 하시지요... ” 아무튼 나는 다음 날에는 함께 웃고 떠들고, 김법사님은 딸이 보고 싶어서 밤새 눈이 붓도록 우셨다고 놀렸다. 그러자 비구니 스님이 김법사님의 손을 꼬옥 잡아주고는, 자두 두 알을 쥐어 주었다. 김법사님은 그 날 밤에는 보살님들에게 애기이야기를 하느라고 밤늦도록 잠도 자지 않았다. 행복하자고 부처님 찾아 길을 나섰고, 수행을 하는 것인데, 종종 불교의 2천오백년 쌓인 세계관은 사람들을 참 무겁게 만든다.

  

강가강을 낀 바라나시

 

바라나시에서 생긴 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로 초유의 베스트셀러작가가 된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어떤 강연에서, 글을 쓸 때 자신이 쓰는 것이 아니라 저 들판 끝에서 글이 마구 달려와 자신을 통과해 막 지나가려는 것을 겨우 끝자락을 붙잡아 손끝으로 글만 옮긴다고 한 적이 있다.

바라나시버스터미널에 아침 8시경에 도착해서 강가강의 메인가트를 향해서 걸었다. 그런데 한 릭샤꾼이 줄기차게 따라오면서 타라고 하는 것이다. 4킬로미터 남짓이니 4~50분 걸으면 되겠기에 거절했는데, 정말 끈질기게 한없이 따라오면서 애원하듯이, 때로는 슬픈 눈빛으로 내 앞을 가로막고는 자기 릭샤에 오르란다. 나는 그를 피해서 묵묵히 걸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그 릭샤꾼은 기어이 내 배낭을 나꿔채기에 이르렀다. 어이가 없어하다가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할 수 없이 릭샤에 올랐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게도 한 4~5백미터 정도 가자 목적지라고 내리란다. 구역이 달라서 더는 못들어 간다고 하면서 메인가트까지는 걸어가란다. 화가 난 나는 10루피만 주고 내렸다. 그런데 이 릭샤꾼은 정말 끈질기다. 릭샤를 골목에 세워두고는 나를 따라오면서 50루피는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겨우 4~5백미터 태워주려고 2천미터 가까이 따라와서는 50루피를 내라니... 유어라이어...너는 거짓말쟁이다 마구 욕을 해주고는 그냥 가버렸다. 어글리인디언 어쩌구 하면서. 그러나.... 바라나시는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 인도전역에서 몰려드는 인파 중에 정말 밑바닥 인생이 많아서인지 릭샤꾼이 넘쳐난다. 그에게 나같은 외국인 하나만 태우면 그는 하루 일당을 한 번에 버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집착이 거기까지 그를 오게 하고, 결국은 내내 걷다가 목적지에 다와서 겨우 조금 태우고도 돈을 달라고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열이 오른 상태에서 먼저 메인가트를 찾았다. 거기서부터 잘해야 비좁은 골목도시인 바라나시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고 숙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가에서 한국 여학생 둘을 만났다. 내가 어디에 묵느냐고 묻자, 자기들도 아침에 도착했는데, 인도삐끼들에게 여기저기 휘둘리다가 이상한 호텔에 묵게 되어서 실망하고 있다고, 다른 괜찮은 호텔을 알고 있다면서 그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갠지스강이 잘 보이고 심지어 옥상에 올라가보니 화장터도 보이는 등 정말 전망이 좋은 호텔이었다. 옥상에는 식당이 제법 깔끔하고 분위기 있게 꾸며져 있고, 방의 침대시트도 깨끗했다. 인기가 좋아서인지 남은 방이 투 베드룸이라 두 배의 방값으로 그곳에 숙박을 하기로 했다.

오전에 여독으로 부족한 잠을 자고 오후에는 화장터에서 시신 태우는 것을 구경했다. 그 여학생들을 그 틈에서 발견하고는 함께 이야기하다가 저녁때 시장에서 인도커리를 함께 사먹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12시도 넘은것 같은데 다급하게 내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낮의 그 여학생 둘이다. 얼굴은 사색이 다되어서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신들을 빨리 숨겨달라는 것이었다. 황망히 안으로 들이고는 얼른 문을 잠갔다. 얼마나 덜덜 떠는지 무슨 일이 되었든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도 남았다. 그 여학생들은 제발 부탁이니 이곳에 숨어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한국사람을 보거든 자기들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두 번 세 번 약속을 굳게 하고는 일단 침대가 둘이라서 싱숭생숭 하룻밤을 한 방에서 보냈다.

아침 일찍 상점에서 먹을 것을 사서 호텔안의 두 여학생보고 먹으라고 하고는 불편해 할까봐 그 길로 호텔을 나와 버렸다. 그런데 골목길에서 정말 한국인 하나가 나를 보더니 한국사람 아니냐고 한다. 그렇다고 하자 한국여학생 둘을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어제 강가에서 보았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도 그 여학생과 같은 호텔에 묵었는데, 어젯밤에 호텔을 나가서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고 소식도 없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총격전까지 하면서 싸웠고, 몇 달 전에는 한국남자 하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는데,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 참 큰일이라고 하면서도 나는 함구를 했다. 점심 무렵에 한국인들이 잘 가는 식당에 가자 몇몇 한국인들에게 소문이 퍼졌다. 한국여학생 둘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국제장기조직이 납치했거나 인도인들에게 잡혀서 끌려갔을 거라는 등 흉흉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런데, 나는 그 여학생들의 부탁이 있었던지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오후에 호텔에 돌아와 여학생들에게 일이 커지고 있음을 알렸다. 그래도 그 학생들은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무언가를 피해서 날아든 두 마리 가여운 어린 새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냥 모르는 체 하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내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여학생들을 화장실로 피하게 한 후 문을 조금 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뜻밖에도 류시화 선생이 서있었다. 무... 무슨 일이세요? 그러자 류시화 선생은 한국 여학생 둘이 사라져서 지금 난리가 났는데, 한국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대책반을 구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호텔이 바라나시의 중심이니 이곳 옥상을 대책본부로 정하고 무슨 일이 이으면 이곳에 알리라고 하였다면서, 자신은 지금 경찰서로 가서 신고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얼떨결에 나는 상황실장이 되었다. 류시화 선생의 힌두어 실력은 뛰어나서 바라나시의 경찰서와 심지어 종교분쟁 조정차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까지 가서 한국인의 실종을 알리고 수색을 의뢰하였다.

아... 정말 일이 커지는구나.... 방에 있는 여학생을 들킬까봐 옥상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나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오후 늦게 어쩐 일로 탤런트 김혜자 씨까지 찾아왔다. 아니 김혜자 씨가 또 인도에는 웬일인가? 김혜자 씨는 한국대사관이며 한국의 방송국에까지 연락을 취해놓았다고 한다. 점점... 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나는 완전히 아득한 블랙홀로 빠져들었다. 이제 와서 한국여자애들이 내 방에 있다고 하면 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더구나 그 여자애들은 한국사람들 한테는 절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참으로 단순무식한 나의 외곬수적인 성격은 그렇게 생각의 흐름을 탔다.

어이없는 대책본부는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한국여행객 모두에게 강가부터 강 건너편, 모든 호텔과 으슥한 골목 등 모든 곳을 샅샅이 2인1조로 뒤져보라고 했지만, 저녁에 모인 모두는 그저 허탈한 표정들뿐이다. 그 사이에 나는 류시화 씨와 김혜자 선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밤 10시가 되었다. 김혜자 씨는 숙소로 돌아가고 류시화 씨는 밤 새 무슨 정보가 들어올지 모른다고 더 남아있겠다고 하였다.

단 둘이 남게 되자 기어이 내가 입을 열었다. 사실 그 여학생들이 이 호텔 안에 있노라고... 그런데 무슨 일인지 절대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면 안 된다고 해서 숨기고 있었노라고... 아..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그날밤 내 방에서 그런 청문회가 따로 없었다. 신변안전이 확인된 것이 다행스럽기는 했지만, 나와 그 여학생들은 단두대에 올려졌다. 그 학생들의 이야기인즉, 자신이 묵는 호텔에 30대 한국사람이 함께 묵었는데, 자신이 약사라면서 매우 달변이었고, 그 사람이 자기들 방에 와서는 라시를 권했는데, 맛이 좀 이상했다는 것이다. 머리가 약간 어지럽고 방이 뱅뱅 도는데, 그 사내가 방의 문을 잠그고는 자기 둘의 옷을 벗기려 들었고, 아주 좋은 약이니 더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육탄전 끝에 그녀들은 겨우 문을 따고 도망을 나왔고, 낮에 왔던 나의 호텔방으로 피신을 왔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한국인들이 대책본부로 다들 모였다. 한국인 약사라는 그 청년을 인도에서 퇴거할 것을 결의했다. 여자들은 빨리 바라나시를 떠나고, 나는 약사청년이 인도를 출국하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호송하여 확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수색작업을 했던 경찰서와 군대에는 한국의 톱스타라고 김혜자 씨가 사과를 하러 갔다.

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류시화 씨는 나보고 그 청년보다 더 죄질이 나쁘다고 하였다.

아무튼 나는 그 청년을 바라나시 역으로 끌고 갔다. 분풀이로 이런저런 욕과 교육 아닌 훈계를 주절주절 하고는 내가 한국의 언론계통에 있으니 이상한 소문이 들리면 각오하라는 협박(?)까지 하고서는 꼴까따 행 기차에 올려 보냈다. 그곳에서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인도 전역에 너의 사진과 이름을 공개해서 망신을 주겠다고 재차 협박을 했다.

나는 델리 행 기차에 올랐다. 델리까지 오는 동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류시화가 뭔데, 나더라 이래라 저래라냐... 말만 번지르르하게 현혹하는 글이나 써대는 겉과 속이 다른 작자가... 내가 그 여학생들 보호차원에서 그랬지, 일부러 그랬나... 김혜자는 나를 그렇게 망신을 주나?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런 불만이 가득했다.

몇 년 뒤에 김혜자의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라는 책을 읽을 때까지 나는 류시화가 쓴 책이라면 다 집어던졌다. 당시에 류시화 씨와 김혜자 씨는 함께 전 세계의 구호를 위해 여행 중이었다고 한다. 따스한 감동이 밀려오는 김혜자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때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사태를 재조명해 보았다.

나는 왜 그 심각한 상황에서 단지 한국사람이라면 무조건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말라는 여학생들의 말을 맹신했을까? 왜 나는 대책반이 꾸려졌는데, 바로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나만 두 여학생의 보호자가 되고 싶었던 욕심은 아니었을까? 남을 위한 보시도 사실은 내가 이렇게 너를 도울 수 있다는 유신견이요 소유욕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도 있다. 가부장적 마초근성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일부러 울타리를 친 것은 아닌가? 내 순간의 알아차림 결여로 인한 거짓의 시작으로 당시 한 시공간에 있었던 류시화 씨와 김혜자 씨의 노심초사가 얼마나 심했겠는가? 아마도 나를 정말 패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바라나시에서 추방당한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나는 그들을 욕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을 틈만 나면 비난하고 다녔다.

나중에 델리의 메인바자르에서 그 두 여학생을 다시 만났다. 한 친구는 그 뒤로도 6개월을 파키스탄까지 여행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씩씩하게 복학했고, 홀아버지와 단 둘이 살던 다른 학생은 아버지의 안경테 사업을 이어받아 서울에서 종종 만나고 있다.

어찌되었든 거짓은 그릇된 이기심과 소유욕에서 나와서는 결국 나를 속이게 되고, 그것을 되돌릴 마음이 생길 때는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여서 카르마는 이미 굳어 버린 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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