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깨달음은 인간존재의 부조리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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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깨달음은 인간존재의 부조리에서 출발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7.01.3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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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나가르주나 '중론'의 인간적 행복론
용수(龍樹: 150?-250?)는 중관(中觀, Madhyamaka)을 주창한 인도의 불교 승려이다. 원래 이름은 나가르주나(산스크리트어: Nāgārjuna)이나 뜻을 따라 한역되면서 용수로 알려졌다. 베트남,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는 흔히 용수라 불리며 티베트에서는 Klu Sgrub이라 한다. 3세기 용수는 중관불교의 틀은 유지하는 동시에 상좌부 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의 논리를 창시했기 때문에 제2의 석가모니 또는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석가모니 이래 출가자 위주의 "수행 중심 불교"였는데, 이를 비판하고 대승불교 교단을 새로 만들었다. 용수는 인도 남부의 브라만 가문 출신이며, 출가하여 소승불교를 배우다가 후에 히말라야 산으로 들어가 노비구(老比丘)로부터 대승불교를 배웠다고 한다. 그 후 초기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많은 주석서를 저술하여 독자적인 사상을 세웠다. 그는 《반야경》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공의 교의를 철학적으로 구명하고, 대승불교 교의의 중요한 기초를 닦았다. 용수 이후의 대승불교는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결과 후세의 중국 등 여러 나라의 불교에서 용수는 중관파, 삼론종, 천태종 등 여덟 불교 종파의 시조이거나 최초의 발단을 제공한 조사로 존칭되고 있다.

 

정유년이 밝았다. 한겨울의 추위가 다소 수그러들고 새로운 공기가 감돈다. 자아 성찰이 내면으로부터 고개를 쳐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환절기가 제때이다.

독서란 삼매경에 빠져들 때 세상사에 대한 적멸(寂滅)의 희열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나가르주나(龍樹)의 <중론(中論)>은 그러한 내면의 적멸에 좋은 마음의 이행에 대하여 좋은 징검다리 계찰(啓察)서이다.

그러나 불교적 논서(論書)에 대하여 심도있는 공부가 부족한 나는 불경에 대한 이해도 깊지 못하다. 그러나 모든 철학과 종교 체계중에 최고의 논서가라는 용수가 차지하는 세계철학사의 위치와 그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많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초기불전연구원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대승불교의 이론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용수의 <중론>이 비불설(非佛說)논란의 중심에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본격적으로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비불자(非佛者)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종교적 신앙차원이 아닌 탁월한 인류의 스승 붓다의 가르침에서 삶의 본질과 의미를 찾기 위한 이유에서 불서를 찾는다. 나도 그런 부류중의 한 사람으로서 붓다의 교훈이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이 어디까지가 붓다의 친설(親說)이고 어디까지가 창작비불설인지 가늠할 재량이 없었고, 수많은 불경의 의도와 분파의 원인에 대한 혜량도 갖지 못했다. 그리고 정작 붓다의 진정한 깨달음과 가르침의 의도도 공부를 해 가면 갈수록 비의(秘意)에 쌓여있거나 오리무중의 복잡한 이론들만 난무한 것이 대승불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불교는 이미 오래전에 기복신앙화했고, 불교계의 화석화된 부정적인 모습들, 허무주의적인 태도들, 대중의 행복과 구도의 열정에 대해 자기들만의 리그를 치르는 승려들의 무관심한 2원적 종단 운영과, 세속의 도덕율에도 못미치는 일부 승려들의 일탈이나 밥그릇싸움,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부족도 문제지만, 자비심은 커녕 상식적 포용성도 부족한 모습들에서 실망이 크기도 하였다.

대승불교의 경전이나 논서들도 애매모호하고 복잡다단하고 선사들의 선문답은 심지어 허무맹랑해 보이기도 하였고, 불교의 신앙형태라는 것도 오늘날의 과학화된 사람들의 머리에는 공감되지 못하는 미신적 요소가 너무 많으며, 특히 중국을 거쳐 전래되면서 불교의 원래 모습이 왜곡, 전향된 모습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여, 오늘날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위 불도를 추구한다는 많은 이들이 깨달음과 닙바나(涅槃)를 목적으로 수행을 하고 논쟁하고 주장을 펼치는데, 그들의 모습이 세상에서 밀려난 도피주의자 같고, 그 중에 또 어떤 이들은 이미 열반을 중득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생겨났는데, 정작 행동의 신뢰조차 주변에서 득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유리잔 속의 태풍같은 깨달음이요, 득도의 경지라는 것이 명상가운데 얻어진 일종의 정신적 이변(異變)의 체험 수준이라는 인상마저 들게 한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비불설과 난해함에 대하여 보다 명쾌하고, 붓다의 친설에 가까우며, 붓다의 오리지널 수행법이라는 위빠사나수행이 수십년 전부터 우리사회를 휩쓸었고, 남방불교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미얀마에서 아비담마불교와 테라와다(상좌부)적 전통을 들여와 새로운 불교의 중흥을 꾀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아비담마에 대하여 논할 능력이 없고, 논할 이유와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대승이든 소승이든 불교논서들은 수많은 깨우침의 다양한 모습 중 한 축들이고, 수 많은 작가와 철학가와 저술가들의 주장도 소중한데, 하물며 우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중득의 과정에서 형성된 불교의 경전과 논서들은 인간 삶의 본질을 체찰(諦察)하는데 최정점에 있는 인류정신사의 주옥같은 사상이요 명저들이라고 생각한다.

주희는 대학 서문에서 불도를 닦는 것은 허무한 적멸도로서 사이비 도라고 규정하였다. 학문이 짧아서인지 붓다의 가르침이 허무주의를 주창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붓다의 인생이나 수많은 일화들, 적절한 가르침이 그냥 좋을 뿐이다.

그리고 득도의 경지에서 오가는 적멸이나 열반의 희열, 그리고 육신통(六神通)이나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윤회의 타파, 세상살이의 전변(轉變)을 뛰어넘어 아라한과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 즉 출세간의 일이므로 또 다른 차원으로 생각할 일이다.

나가르주나는 출세간의 열반조차 세간과 다를바 없고, 그것조차도 공이라고 혁파했지만 말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 유무를 떠나 주희의 비판은 당시 중국불교도들의 초월적 성향과 열반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비현실성과 비세속성으로 분리해서 매진하는 이들에 대한 이유 있는 지적이라고 본다.

붓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후에 붓다의 가르침은 수백년이 경과하면서 다양하게 퍼져나갔다. 다양함이란 좋은 것이다. 붓다의 순수한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강의한 말들이 그것인가? 아니면 잘 받아서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했다는 1차결집에서의 아난존자의 말들인가?

붓다 사후 2천5백년동안 사상이란 흘러가고 흘러왔다. 그리고 오래도록 남는 것들이 경전이 되고 논서가 되었다. 그 중에서 나는 나대로 또 가려서 내 인생의 의문들을 해소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내고, 나아가 더불어 세상의 이로움을 실천적으로 추동하는 나름의 힘을 얻으면 좋은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읽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눈으로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또한 선행적 인식이 필요한 책이다.

함께 읽을 필요가 있는 논서로는 상좌부 불교 구사론, 대비바사론, 발지론, 청정도론, 아비담마를 읽으면 좋겠다. 대비바사론은 200권에 달하는 대작이라서 접하기가 쉽지 않다면 그 요약서인 구사론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대승불교 논서로는 금강삼매경론, 대승장엄경론, 대승기신론, 대지도론, 무량수경종요, 삼론(백론, 십이문론, 중론), 섭대승론, 성실론, 성유식론 등과 중관과 유식에 관련된 논서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

선불교 논서로는 간화결의론, 무문관, 벽암록, 신심명, 임제록, 직지심체요절을 살펴보면 좋다. 이러한 논서들은 자칫하면 철학적 사유를 넘어 사변에 빠지는 위험성도 있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모르면 번다한 희론에 시간만 낭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도의 논서를 보지 않고서는 동양의 저 위대한 붓다라는 인물과 불교라는 거대하고 최상승의 지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 거대한 불교의 봉우리를 오르는 원정등반의 도구로서 필히 섭렵해야하는 필수장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만만치 않은 독서량임을 감안할 때 먼저 초기불교의 핵심적인 아비담마로서 청정도론과 소승과 대승, 밀교를 아우르는 총카파의 논서인 <보리도차제론(람림)>정도만 숙독해도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어 폭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란 열심히 간구하고 성찰하는 일이다. 위에 열거한 책들이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데 곡 필요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편 삶의 지혜를 완성하는 일이 이런 불교적 논서들의 문자들에서 존재하는지 그것도 의문일 것이다. 그러나 네 안에 있는 행복의 씨앗들은, 수많은 고민을 집대성한 안내잡이 스승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 경험에서 붓다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그리움을 만난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인도의 네란자나 강가에서 육년고행을 하던 둥게스와리 동굴을 내려와 수자타마을 저쪽에서 휘적휘적 강을 건너던 붓다를 만나러 간 일이 있었다. 피골이 상접하고 서있을 기운조차 대지에 빼앗긴 그를 아침부터 밤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쪽은 보드가야, 깨달음의 보리수다. 그 전에 얼마나 많은 편향의 방황 속을 헤매고 중득을 위해 건너왔던가?

불교의 수많은 분파는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 붓다의 깨달음 이후 그 침묵에서 연원한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언설이 사라진 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과연 그 득도의 내용을 펼쳐야 하는지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붓다는 수많은 가르침 속에서 열반의 구체적인 상황이나 내용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명제들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는데,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의 분파와 오해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오해를 일소하는데, 나가르주나는 깨달음의 본질을 공사상으로 설명하게 된다. 붓다의 침묵이 구체적인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론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그 언어에 집착하면 본 뜻을 알수 없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그러한 네란자나 강을 건너는 일종의 뗏목이다. 그 흐름만 타면 노조차 저을 일 없이 잡변(雜辨), 생각의 잡다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보드가야에서 만났던 한 수행자는 붓다의 가르침은 단 두 마디, 공(空)과 지혜(知慧)로서 끝난다고 했다. 초기불교에서는 사성제와 팔정도, 37조도품으로 설명하는데, 이를 더 축약하면 공과 지혜라는 것이다.

중론은 현존하는 책이 청목(靑目)의 주석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가필하여 409년에 번역한 것이다. 중론은 용수의 초기 작품으로 27장 449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반야경(般若經)>에 기초한 대승 공관(空觀)의 입장에서 원시불교 이래의 연기설(緣起說)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해, 부파불교뿐만 아니라 인도철학사상 일반도 비판하는 것이다.

그 중심사상은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으로 귀결된다. 또한 연기론도 모두 공성이라 설하고 있는데, 그 공성은 상대적인 가설이며 그것이 곧 중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공관은 유·무를 초월한 중도이며, 그것이 불교의 근본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용수의 생각을 표명하는 것이다.

용수의 이러한 이론은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부여한 것으로, 그후 대승불교의 사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도에서는 이 책에 의해 중관학파가 일어났으며, 유가행파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조를 형성하였다. 이후 중관학파와 유가행파가 혼합된 것이 티베트로 전파되어 총카파 교학의 기초가 되었다.

붓다가 핵심적으로 깨달은 내용이 12연기라는 상좌부 남방불교의 이론은 이 공관에 의해서 파해진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했는가. 초기불전연구원 세미나에서 중론을 비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참고로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이 용수의 중론을 비판한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옮겨본다. 불교 논쟁이라는 것이 워낙 복잡한 사유의 체계를 갖춘 거대한 지식과 지혜의 보고라서 어떤 이야기를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초점이 다른 이야기이거나, 본 의도가 전도된 인용으로 오해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용수스님이나 초기 중관학파의 논법을 우리는 쁘라상기까(Prasanggika) 즉 귀류논증이라 합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귀류논증이지만 속된 말로하자면 상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논법입니다. 상대가 뭐라 하면 그것을 모순을 드러내는 논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기의 가르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측면에서는 중론의 직관적인 태도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분석적이고 해체적인 방법은 최종적으로는 무상·고·무아의 직관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법으로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성자가 될 수 있느냐하는 것이겠지요. 해탈열반과 깨달음을 지향하는 초기불교의 틀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보면 이러합니다.
첫째,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존재나 세상이라는 존재 등의 존재일반을 법(dhamma)이라는 기준으로 해체해서 설하십니다. 그것은 초기경의 도처에 나타나며 청정도론에서 정리하고 있는 온처계연 등입니다. 즉 오온, 12처, 18계, 12연기 등입니다.
둘째, 이렇게 존재일반을 법들로 해체해서 보면 드디어 무상이 보이고 괴로움이 보이고 무아가 보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셋째는 이렇게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봄으로 해서 존재일반에 염오하게 되고 존재일반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게 되고 그래서 해탈하게 되고 혹은 소멸로 정의되는 열반을 실현하게 됩니다.
이것이 초기경의 도처에서 설해지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세 가지 교학적인 단계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존재일반을 해체해서 보는 기준이 법인데 이 법을 아비담마에서는 고유성질(自性, sabhaava)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고유성질을 가진 개별적인 법들의 특징을 자상(自相, sabhaava-lakkhan*a)이라고 옮겨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이 왜 다릅니까? 탐욕과 성냄이 왜 다릅니까? 느낌과 인식이 왜 다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각각의 법들 즉 물질, 정신, 탐욕, 성냄, 느낌, 인식 등등의 각각의 법들의 고유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해석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렇게 멋지게 법들의 차이를 설명해냅니다.
그런데 이렇게 법들로 해체해서 보면 드디어 법들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가 보입니다. 개념적 존재로 뭉뚱그려두면 이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아니 진인이니 영혼이니 중생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로 그대로 두고 보면 영원불변하는 자아나 진인 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들을 색수상행식이나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이식 등으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이나 고나 무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떤 법이든 모든 유위법들은 모두 모두 이 무상·고·무아라는 세 가지 공통되는 특징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비담마에서는 보편적 성질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중국에서는 공상(共相)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북방아비달마 반야중관 유식 화엄에서도 그대로 다 채용해서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상·고·무아를 봅니까? 초기경전들에서는 팔정도를 위시한 37보리분법(조도품)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행의 전문적 방법에 따라서 사마타(止)와 위빳사나(觀)로도 나눌 수 있고 <염·정·혜(念定慧, 마음챙김, 삼매, 통찰지)>로도 나눌 수 있고, <계·정·혜> 삼학으로도 나눌 수 있고 더 확장하면 <계·정·혜·해탈·해탈지견>의 5법온으로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초기경전에서 강조하고 강조하는 구체적인 수행법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자상-공상-해탈의 이러한 세 가지 강조점은 이미 초기불전의 중심 교학으로 튼튼히 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빼버리면 불교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초기불교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수행법으로는 37보리분법으로 도처에서 정리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이 불교가 불교인 이유입니다. 후대의 불교들이 강조점에는 차이가 나지만 모두 이런 교학과 수행을 받아들여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불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수의 중론은 공상의 입장을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상을 이야기하면 실유를 이야기하는 것이 되어 외도의 가르침이라는 듯이 극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비달마가 자상을 많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그런데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자상을 실유라고는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중관학파들이 스스로 지어낸 이론일 뿐인 셈이지요.
초기불교부터 아비담마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이나 직계제자들은 법을 실유니 가유니 하는 기준으로는 절대로 살펴보지 않습니다. 법은 찰나생·찰나멸로 보았습니다. 찰나생이기 때문에 단견(단멸론)이 아니고 찰나멸이기 때문에 상견(상주론)이 아닙니다. 찰나생·찰나멸은 이렇게 두 가지를 척파합니다.
그리고 찰나생·찰나멸의 상속을 말하지 않으면 이것은 엄청난 단견이 되고 맙니다. 한 순간에 멸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데 세상은 왜 존재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요? 허망한 것이라고요? 이렇게 이해하는 일부 학자들 때문에 인도에서부터 외도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지요. 부처님은 세상을 법으로 해체해서 보실 것을 강조하셨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법으로 해체된 상태를 두고 가법이니 실법이니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관학자들은 법에다 가법 실법이라는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서 법을 바라보고 이전 불교를 비판합니다. 이것은 중관학파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기준일 뿐입니다. 만일 이런 기준을 가지고 이전불교를 비판한다면 중론은 불교가 아닙니다. 저는 자상-공상-해탈을 평등하게 강조하고 있는 초기불교의 입장이야말로 진정 중도적인 입장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중도라고 불렀지 그 어디에도 잘해봐야 정견밖에 안되는 공·가·중 삼관을 중도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팔정도로써 해탈열반의 실형을 위한 방법론을 중도로 말씀하신 부처님 직설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편협한 태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묵스님의 비판이 타당한 설득력이 있지만, 또 나름대로 대승불교의 존재적 의미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승의 대중을 위한 연민과 자상한 애정이 그런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문장 자체로는 쉬운 책이다. 귀류논증적 원칙이 몇 개 수반되지만 궤변적 사유가 아니다. 그냥 우리의 생각을 혁파하는데, 동원되는 논리로 생각된다. 말그대로 복잡하고 세밀하고 그래서 번쇄해졌다고 비판받은 상좌부의 제 논서들에 대해서 공이란 존재들의 속성이기에 그렇게 복잡한 사유가 아닌 것으로 간결히 파사현정하는 것도 참으로 매력적인 사유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논리로부터 해방되는, 글로 쓰여졌지만, 문장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 그것이 곧 사유의 해탈인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쉬운 것은 이해되어지지 않는다. 그냥 깨우쳐지는 것이다. 사고의 전도에 의해서 문장을 이해하려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제자리 걸음이요, 오리무중이다.

중론 저술의 이유는 붓다 사후 붓다의 가르침이 언어 그 자체의 한계로 왜곡되어 이를 바로잡고자 쓴 책이라 할 수 있다. 즉, 언어로 표현된 진리의 한계와 모순을 논리적으로 밝힌 책이다. 어쨌든 붓다의 말씀을 교조적 이념적으로 신봉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라고 보면 된다.

붓다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라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더니 이것과 저것이 있는 줄 아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연기의 핵심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기대어 사태를 만들어내는 것을 묘사한 것뿐인데, 이것과 저것의 실체가 있는 줄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용수를 이를 비판하였다. 붓다가 왜 그렇게 설했는지 근본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지 그 말 자체를 신봉하라는 것이 아님을 언어가 가진 모순, 즉 논리적 한계를 밝힌 것이다. 이 책은 그러므로 사고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종종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상념의 막연함으로 답답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곧 존재를 존재의 아상(我想)에 사로잡혀서 생각을 출발한다. 그러나 용수는 열반에 대해서 없어지지도 않고 도달되지도 않으며 끊어짐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발생하는 것도 아닌 것이라고 하였다. 열반은 존재 그것자체가 아닌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열반과는 상관이 없다. 존재의 막연한 그리움은 존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존재가 존재가 아닌데,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을까? 우리의 그리움은 그래서 공인 것이다. 그리움이 불멸의 대상화가 되었을 때 점점 오리무중이요, 목마름이다. 존재의 의미는 바로 여기, 그렇게 공이다. 존재에 의존하거나 연하지 않으며, 있거나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존재의 그리움이 끊어진 자리에 오롯이 있는가? 그 그리움....

붓다의 깨달음은 존재의 부조리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인간은 수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는 사실을 진정으로 자각할 경우 모든 악업의 근원이었던 탐욕·분노·교만이 완전히 사라진다. 또 이를 깨달을 경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행동을 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즉, 잘못을 짓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모든 생명체의 삶은 궁극적으로 괴로운 것(苦)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그런 괴로움의 원인(集)인 갖가지 번뇌와 어리석음에 대한 가르침이며, 셋째는 그런 번뇌와 어리석음을 제거할 대 만나게 되는 편안한 열반(滅)의 경지에 대한 가르침이고, 넷째는 그런 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덟가지 올바른 길(道)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를 사성제라고 부른다.

그런데 붓다의 사후 약 500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오해하기 시작하였다. 붓다 열반 후 그 가르침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것을 아비달마(Abhidharma) 라고 부른다. 아비달마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지만, 이를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붓다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라 했지만, 이들은 붓다의 말씀에 갇혀버렸다. 이러한 불교 이해를 아공법유(我空法有:자아는 없지만 교법은 실재한다)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본 니까야 등의 초기경전이나 아비담마 논서 등에서는 그러한 아공법유를 주장한 글을 본적이 없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논쟁을 하였으나 차후에 상좌부의 논서들에서 그러한 내용이 삭제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그 시대의 분위기와 논쟁의 현장에 없으니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오늘날 남방불교권의 논서에는 그러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튼 당시의 소승의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승불교들은 붓다의 교법조차 존재하지 않는다(我空法空)고 주장하며, 이런 가르침이 담긴 경전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편집하여 <반야경>이라는 이름으로 유통시켰다.

초창기의 붓다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나라고 생각될 만한 것들>의 정체를 하나하나 살펴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의지나 마음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나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변치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다섯가지 요소(五蘊) 모두 무상한 것, 변하는 것이기에 나일 수가 없다. 이것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교조적 아비달마 불교도들은 이런 무아의 가르침을 <나는 없지만 다섯 가지 요소는 실재한다>는 가르침이라고 착각하였다고 보았다. 십이연기의 가르침 또한 마찬가지이다. 교조적 아비달마 불교도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집착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들은 모두 열반이라는 깨달음의 피안에 이르게 하기 위해 타고 가는 뗏목과 같은 것일 뿐이다.

용수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중론을 저술했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사상적 중도>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가르침에는 <사상적 중도>와 <실천적 중도>의 두 가지가 있다.

실천적 중도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는 자기를 괴롭히는 고행만 해서도 안 되지만, 세속의 쾌락에 탐닉하거나 삼매의 즐거움만 추구해서도 안 된다’는 수행방법에 대한 가르침으로 고락중도(苦樂中道)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사상적 중도는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고 보는 우리의 사고방식, 또는 무엇과 무엇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보는 등의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이런 비판은 붓다께서 깨달으신 보편법칙, 즉 ‘모든 것이 얽혀서 일어난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지는데, 있다거나 없다는 양극단을 떠난 중간의 그 무엇을 제시하기에 중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 모두를 비판하기에 중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가 훼손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붓다의 <연기>란 ‘생명과 세계가 모두 얽혀 있다’는 진리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이를 생각과 언어와 문자에 의해 표현하기 위해서는 낱낱의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사람들은 낱낱의 단어에 집착하여 실체론적 사고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중론은 이론화된 불교, 언어화된 불교를 공의 논리를 통해 해체하는 책이다. 중론의 총 27장에서 다루는 개념과 이론들은 모두 다르지만, 그런 개념과 이론들이 해체되는 논리는 동일하다. 4구비판의 논리가 그것이다. 4구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네 가지 방향의 판단을 의미한다.

첫째는 긍정이고, 둘째는 부정이며, 셋째는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것이고, 넷째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 <4구비판의 논리>는 우리의 일상적 사고방식을 모두 허물어뜨리기에‘해체의 논리’라고 부를 수 있고‘반야의 논리’, 또는‘공의 논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론>은 다음과 같은 귀경게로 시작한다.

발생하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도 없으며
서로 이어진 것도 아니고 서로 끊어진 것도 아니며
서로 같지도 않고 서로 다르지도 않으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가는 것도 아니며
온갖 망상을 잠재우며 상서로운
연기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부처님
최고의 스승이신 그분께 머리 조아려 예배드립니다.

연기론에 대해서는

결과가 조건 속에 미래 존재했다거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다.
미리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런 조건은 무엇을 위해 있겠으며,
미리 존재했다면 그런 조건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으로 인하여 결과가 발생할 때,
이것은 연(緣)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비연(非緣)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전체적으로 보든, 낱낱이 보든
조건 속에 결과는 없다.
조건 속에 없는 결과가
어떻게 조건이 아닌 것들로부터 발생하겠는가?
그러므로 결과는 조건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조건 아닌 것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조건이나 조건 아닌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속한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무아의 지혜를 얻은 자라고 부른다.
안에서건 밖에서건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취착(取着)이 사라진다.
취착이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일도 없게 된다.

책 <중론>은 불기 2549년 경서원에서 펴낸 책이다. 4세기경 인도의 논사인 청목(靑目)이 소(疎)를 붙이고 주해한 것을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하였는데, 이를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의 김성철 교수 한글로 번역하였다. 필자의 주요한 해설과 해제는 대부분 김성철 교수의 견해를 따왔다.
보조적으로 <정화>의 중론(법공양 간행, 2007)을 읽었는데, 오늘날의 집적된 과학기술의 발전과 유전학, 천체물리학, 기타 과학적 실례를 통해 비교적 친절하고 쉽게 공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설명이 지나치게 친절하면 스스로의 깨달음에 방해되는 기억잔상을 많이 남기게 되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아울러 개념 파악을 위해 나가오 가진의 <중관과 유식>(동국대출판부,2005)을 참고하면 좋을것이다.

 

다음은 <중론>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을 발췌해 보았다.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 능히 이런 인연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희론을 잘 진멸시키시도다.

모든 法은 스스로 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며 그 양자에서 함께 생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원인 없이 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無生임을 알아라.
이것으로 인하여 결과가 생할 때 이것을 연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결과가 아직 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非緣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緣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거나 또는 없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다. 미리 없었다면 무엇을 위해 연이 되며 미리 있었다면 연은 어디에 쓸 것인가? 존재가 아직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소멸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소멸한 존재가 어떻게 연이 되겠느냐?
諸法은 無自性하므로‘있다’는 相이 없다.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다>고 說함은 옳지 않다. 연에 결과가 없어도 연에서 결과가 나온다면 이 결과는 어째서 연이 아닌 것으로부터 나오지 못하는가?

붓다께서는 한계는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바 生死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만일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중간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여기서 先도 後도 同時도 역시 없다. 만일 생이 먼저 존재하고 老死가 나중에 존재한다면 老死 없이도 生이 있는 꼴이 되고, 生 없이도 老死가 있는 꼴이 된다. 만일 老死가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生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無因인 꼴이 되고 生하지 않고 老死가 존재하는 꼴이 된다.
生과 老死는 동시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 함께 존재한다면 生하는 순간에 사망하게 되고 이 生과 死 兩者 모두 無因인 꼴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因과 果, 相과 相을 띤 존재, 感受작용과 感受者 등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은 단지 生死뿐만이 아니라, 그 本際를 얻을 수 없다. 이처럼 일체의 것 역시 모두 그 本際가 없다.

만일 空하지 아니한 존재가 있다면 응당 空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실제 空하지 아니한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空한 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위대한 성인께서는 갖가지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空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空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다면 그런 자는 어떤 부처님도 교화하지 못하신다.

만일 自我가 五陰이라면 자아는 生滅하게 되리라. 만일 자아가 오음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음의 相을 띠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나의 것>이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므로 無我의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無我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은 바로 진실을 보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無我의 지혜를 터득한 者, 그런 사람은 드물다.

안이건 바깥이건 <나>와 <나의 것>이 모두 사라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取가 사라지게 되고 取가 사라지면 몸도 사라진다. 업과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부른다. 업과 번뇌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空에 들어가면 戱論이 소멸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때로는 <自我>를 설하셨고 때로는 <無我>를 설하셨다. 諸法의 實相에서 보면 <自我>도 없고 <無我>도 아니다.

만일 과거의 시간을 因하여 미래와 현재가 존재한다면 미래와 현재는 응당 과거의 시간에 존재해야 하리라. 만일 과거의 시간 속에 미래와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와 현재의 시간이 어떻게 과거의 因이 되겠는가? 과거의 시간을 因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현재의 시간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兩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 두가지 시간대도 안다. 上中下나 一異 등의 法도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머무르는 것은 얻을 수 없고 시간이 흘러 가는 것도 역시 얻을 수 없다. 시간이 만일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시간의 相을 說하겠는가? 사물을 因하여 시간이 존재하니 사물을 떠나서 어떻게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사물도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시간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느냐?

만일 일체가 모두 空하다면 生도 없고 滅도 없다. 그렇다면 四聖諦의 法도 존재하지 않는다. 四聖諦가 존재하지 않기에 苦의 見과 集의 斷과 滅의 證과 道의 修, 이런 것들이 모두 없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지 道果는 존재하지 않는다. 四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向을 얻은 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空이란 법은 인과도 파괴하고 죄와 복도 파괴하고 일체의 세속적인 존재를 모두 훼손하고 파괴한다. 그대는 지금 空과 空인 까닭과 空의 意義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고뇌를 생한다.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二諦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世俗諦로써, 둘째는 第一義諦로써. 만일 사람이 二諦를 분별함을 알 수 없다면 심오한 佛法에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 만일 俗諦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第一義諦를 얻을 수 없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다.

空을 올바로 觀할 수 없어서 이해 못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친다.

잘못된 呪術이나 잘못 잡은 毒蛇와 같이. 세존께서는 이 법이 아주 깊고 미묘한 相이어서 둔근기가 미칠 바 아니라고 아셨다. 그래서 설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空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

만일 공의 이치가 없다면 어떤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모든 존재들이 분명히 自性이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들이 因도 없고 緣도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과와 행위와 행위자와 행위되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일체 만물의 生滅을 다시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인연으로 生한 존재를 나는 無라고 말한다. 또 仮名이라고도 하고 또 中道의 이치라고도 한다.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공 아닌 것이 없다. 만일 일체의 것이 공하지 않다면 生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四聖諦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緣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苦가 존재하겠는가? 無常은 苦의 이치이지만 결정된 自性으로는 無常도 없다. 만일 苦가 확고한 자성을 갖는다면 어떻게 集에서 생하겠는가? 그러므로 공의 이치를 파했기에 集은 존재하지 않는다. 苦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소멸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대는 확고한 자성에 집착하므로 滅諦를 파괴하게 된다.

苦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修道는 존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만일 道가 修習할 수 있다면 확고한 자성은 존재하지 못한다. 만일 苦諦가 존재하지 않고 集諦나 滅諦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苦를 滅할 수 있는 것인 道는 마침내 어떻게 도달되겠는가?

만일 苦가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앞서서 보지 못한 것인데 지금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 자성은 變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苦를 파악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 集을 斷하고 滅을 證하며 道를 修하는 것 및 四果도 역시 모두 옳지 않다. 이 네 가지 도의 과보의 자성은 원래 포착되지 않는 것인데 모든 존재의 자성이 확립되어 있다면 지금 어떻게 그것을 포착하겠는가?

만일 모든 존재가 空하지 않다면 죄나 복을 짓는 자도 없다. 空하지 않은 것은 그 자성이 확고히 있는데 어떻게 지어지겠는가? 그대는 空하다면 죄나 복을 지어도 과보가 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不空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죄나 복을 떠나서 모든 과보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만일 죄나 복에서 과보가 생기는 것이라면 과보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나 복에 의존해서 생기기에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不空이라고 말하느냐?

그대가 일체법의 모든 인연과 空한 이치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곧 세속에 있는 다른 모든 존재를 파괴하는 꼴이다. 만일 空의 이치를 파괴하면 지을 것도 없다. 지은 것도 없는데 지었다고 하고 짓지도 않았는데 지은 놈이라 부르게 된다.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다양한 모습들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常住하여 壞滅되지 않는 것이리라.

만일 空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직 획득되지 않은 것은 획득할 수 없고 번뇌도 끊을 수 없으며 苦가 모두 사라지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연기의 법칙을 본다면 능히 佛을 볼 수 있고 苦, 集, 滅, 道를 본다.”고 설한다.

중생들은 어리석음에 덮여 나중을 위해 세가지 行을 지어낸다. 그런 行을 짓기에 그 行에 따라 六趣에 떨어진다. 諸行을 인연으로 識이 六道의 몸을 받는다. 識의 집착이 있기에 名色을 키운다.

名色이 자라나기에 그것을 因하여 六入이 생긴다. 六情(=六根)과 六塵(六境)과 六識이 화합하여 육촉을 生한다. 육촉을 因하기 때문에 세가지 受가 발생한다.

세가지 受를 因하기 때문에 갈애가 발생한다. 愛로 因하여 네가지 取가 존재한다. 取를 因하여 有가 존재한다. 만일 취하는 자가 취하지 않으면 바로 해탈하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有로부터 生이 존재한다. 生으로부터 老死가 존재한다. 老死로부터 憂와 悲 및 모든 苦惱가 존재한다. 이런 모든 일들은 다 生으로부터 존재한다.

단지 이런 까닭으로 막대한 苦의 蘊이 모인다. 이것을 生死하는 諸行의 근본이라고 한다. 無明한 者가 짓는 것이지만 지혜로운 者가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사라지므로 이것이 생하지 않는다. 오직 苦뿐인 이 陰의 덩어리가 그렇게 하여 제대로 사라진다.

내가 과거에 존재했나, 존재하지 않았나, 世間은 常住하는가 등의 견해는 모두 과거세에 의존한 것이다. 내가 미래세를 짓겠는가, 짓지 않겠는가, 有邊인가 등의 여러 견해는 다 미래세에 의존한 것이다.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과거세에서의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바로 그것이지만 몸은 다른 모습을 띈다고 하겠지만 만일 몸을 떠난다면 어디에 따로 <나>가 존재하겠는가? 만일 몸이 그대로 자아라면 그대에게는 자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결코 자아가 아니다. 몸의 相은 生滅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있지 않았다는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과거세에서의 내가 지금과 다르다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만일 다르다면 그것 없이도 응당 지금이 존재해야 한다. 내가 과거세에 머물러 있지만 지금의 나는 스스로 생한 꼴이 된다. 그렇다면 단멸되어 업과 그 과보가 소실된다. 저 놈이 짓고 이 놈이 받는, 그런 따위의 허물이 있다.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존재한다는 이 말에도 과실이 있다. 자아가 지어진 존재가 되기도 하고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처럼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 없었다, 있으면서 없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았다는 견해, 이것은 모두 옳지 못하다.

어떤 존재가 만일 오는 것이 확실히 있고 가는 것이 확실히 있다면 生死는 시작이 없는 꼴이 되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없다.

이제 만일 상주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상한 것과 상주하면서 무상한 것과 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겠느냐? 만일 세간이 끝이 있다면 어떻게 후세(來生)가 있겠는가? 만일 세간이 끝이 없다면 어떻게 후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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