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생활속 가르침..용담1동 제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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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생활속 가르침..용담1동 제주향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2.0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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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儒)는 예의와 교화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구도자'

 

용담1동 제주향교


 


제주향교 濟州鄕校 (제주도 유형문화재 2호)

위치 ; 제주시 용담1동 298번지

 

 

유교는 공자(孔子)에 의해서 집대성된 가르침이자 철학사상이다. 유가(儒家), 유도(儒道) 또는 유학(儒學)이라고도 하며 공자교(孔子敎)라는 말과도 상통된다.


유교의 유(儒)는 원래 예의를 담당하던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 글자가 지닌 종합적인 의미는 예의와 교화를 행하여 다른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구도자(求道者)라는 뜻이다.

따라서 유교란 〈자신의 내적 수양을 쌓은 유자(孺子)들의 올바른 가르침〉 또는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유교는 다른 대부분의 종교가 현재의 삶보다는 죽은 뒤의 영생(永生)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현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중요한 특징으로 하고 있다.

공자께서도 인간의 죽음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 "인간이 해야 할 올바른 일도 다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하려고 하는냐?"며 사후세계보다도 현실 문제에 대하여 강조하셨다.
 

유교가 본격적으로 성립된 시기는 기원전 5∼6세기이다. 혼란에 빠진 은(殷)나라를 대신하여 백성의 힘을 얻어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이 죽자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뒤를 이었는데, 성왕의 숙부인 주공(周公)이 조카인 왕을 도와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였다.

주공은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의 장점만을 취하여 주나라의 문화를 건설하였는데 이는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것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유교 형성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유교는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안정된 시대라고 알려진 요순(堯舜)시대와 하·은·주시대를 거쳐 노(魯)나라의 공자(孔子)에 의해서 집대성되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진나라 이전의 유교를 선진유교(先秦儒敎) 또는 원시유교(原始儒敎)라고 한다.

공자께서도 "내가 이야기하는 유교는 요순과 주공에 의해 완성된 것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여러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지, 내가 창작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곧 유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온 인간과 함께 한 생활 속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유교의 경전으로는 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의 사서(四書)와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춘추(春秋)·예기(禮記)의 오경(五經)과, 주역(周易)·상서(尙書)·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공반전(春秋公半傳)·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효경(孝經)·논어(論語)·이아(爾雅)·맹자(孟子)의 십삼경(十三經)이 있다.(濟州鄕校誌 47∼65쪽)

 

향교(鄕校)란 유교를 가르치던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이었다.

서울의 사학(四學)과 마찬가지로 향교도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조선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廡)·서무와 동재(東齋)·서재가 있어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類)를 두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았고, 교수관 1명이 정원 7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


향교에는 정부에서 5∼7결(結)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守令)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임진·병자의 양란과 서원(書院)의 발흥으로 부진하여 효종 때에는 지방 유생으로서 향교의 향교안(鄕校案)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자는 과거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등의 부흥책을 쓰기도 하였다.

제주도에는 제주향교, 정의향교, 대정향교 3개의 향교가 있었으며, 향교가 세워짐으로써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의 발달을 보았으나, 조선 중엽부터는 서원이 압력을 받게 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문묘제향을 중심으로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향교의 임원으로는 대표자인 전교(傳校, 1908년에 두었던 直員을 1948년 개명)와 사무를 처리하는 장의(掌議, 50人)가 있다.

제주향교는 제주향교지 등에 따르면 조선 태조1년(1392) 제주성내 교동(지금의 원정로)에 처음 창건하였다고 한다.


1392년에 창건되었다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전라도 제주목 학교(學校)조에

〈향교(鄕校) = 성 안에 있다.

김처례(金處禮)가 지은 비문(碑文)에, “우리 태조(太祖)원년(1392) 임신에 성균관이 이루어지고 세종(世宗)17년(1435) 을묘에 향교가 지어졌다〉라는 기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으로 판단하더라도 1392년에는 성균관을 지은 것이지 제주향교를 지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태조3년3월3일)에는


《도평의사사에서 상언(上言)하였다.


“濟州에는 일찍이 학교를 설치하지 아니하고, 그 子弟들이 나라에 들어와 벼슬하지 아니한 까닭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고 法制도 알지 못하여, 各所의 千戶들이 대개가 모두 어리석고 제멋대로 하여 폐해를 끼치오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敎授官을 두고 土官의 자제 10세 이상을 모두 入學시켜, 그 재간을 양성하여 국가의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또 서울에 와서 侍衛하고 從仕하는 사람은 千戶·百戶가 되게 하여 차부(箚付=관아의 장이 위원을 파견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할 때에 주는 공문서)를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1394년에 처음 향교를 설립했음이 나타난다.

 

향교에는 교수관을 두어 토관자제(土官子弟)를 교육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초기의 교수관은 판관이 겸하거나 의술과 침술에 능한 자를 뽑기도 하였다.(제주향교지 289쪽)


1435년 최해산 목사 때 다시 지었는데 이 때 세종이 서적을 하사하였다.

1466년 이유의 절제사와 이인충 판관이 중건하고, 1536년 심연원 목사는 명륜당을 성균관과 같은 규모로 개축함과 아울러 향학당을 건립하였으며, 1582년 김태정 목사 때 가락천 동쪽 고령전으로 이전하였다가, 목사 이인이 1668년 다시 가락천 서쪽 옛 자리로 옮겼다.

1724년 화재로 소실되자 목사 신유익이 가락천 동쪽으로 다시 옮겼다가,(이 때 세운 향교중수비가 지금 제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옮겨져 있다.

이 비를 권학비라고도 부른다) 1775년 홍태두 목사가 남문 밖 광양에 옮겼으나 1827년 이행교 목사가 서문 밖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계성사·좌우협문·삼문·전사청이 있으며 공자상(孔子像, 1985)이 세워져 있다. 1985년에는 행단(杏壇)을 건립하였다.

대성전(아래 사진 중앙)은 문묘(文廟)이며 그 안에 공자(大成至聖文宣王)의 위패를 중심으로 복성공 안자(顔子, 이름은 回, BC521∼490)·종성공 증자(曾子, 이름은 參, BC505∼436)·술성공 자사(子思, 본래 이름은 孔伋, BC483∼402)·아성공 맹자(孟子, 이름은 軻, BC372∼289) 등의 오성(五聖)과 공문십철(孔門十哲 ; 민손·염경·염옹·재여·단목사·염구·중유·언언·복상·전손사), 신라양현(新羅兩賢 ; 설총·최치원), 송조6현(宋朝六賢 ; 주돈이·정호·정이·소옹·장재·주희), 고려양현(高麗兩賢 ; 안향·정몽주), 조선14현(朝鮮十四賢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을 봉안하고 있다. 최후로 중수한 것은 1918년이다. 2016년 6월 13일 대한민국 보물(제1902호)로 지정되었다.

 

명륜당(아래 사진 왼쪽)은 유학을 강의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강당이며 지금의 학교 교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현판에는 '新安朱熹書'라고 낙관되어 있다.

과거 명륜당은 막돌 기단에 전돌(흙으로 구워 까맣게 그을린 돌)을 이용, 뇌문(雷紋)을 넣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전해진다.(제민일보 2002년 9월 2일)

제주향교의 명륜당(1918년 중수)은 1965년 화재를 당하여 1969년 다시 짓는 과정에서 대성전 동북쪽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이 때 고건축 양식과 맞지 않게 지어졌었던 것(기둥을 콘크리트로 세움)을 2002년 9월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솟을집 양식으로 복원하였다.

1925년 4월 제주도 건축에 대하여 답사하고 논문을 쓴 일본인 후지시마 가이지로(島亥治郞)의 글을 참고하면 〈명륜당의 일곽은 주옥(主屋)이 3칸씩의 익사(翼舍)를 갖추었다.

명륜당은 백목조(白木造)로 주옥(主屋)은 난석쌓기한 기단 위에 서 있고 난석 사이에 전(塼)으로 뇌문(雷紋)을 넣었다〉고 적었다.

따라서 제주향교 명륜당의 외관은 일반 지방향교와 다르게 서울의 성균관 명륜당이나 나주향교 명륜당 같이 장대하고 격식을 갖춘 솟을집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단청은 화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건물의 정면주칸 전체 길이는 21.58m이고 측면은 단칸으로서 그 주간 길이는 7.45m이다. 모두 6칸으로 지어졌는데 중앙의 중당(中堂)이 2칸, 양쪽 익사(翼舍)가 각각 2칸씩이다.

건축 면적은 160.77㎡(48.64평)이다.

중당은 양 익사보다 오가개부 높이가 높은 맞배지붕이고 양 익사는 중당보다 낮게 접속(接續)되었고 외단(外端) 쪽은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익사는 그 구조상 별동(別棟)으로 중당과 약간의 사이를 두고 붙여짓는 것이 보통이나 기둥 및 지붕 높이만 중당과 다를 뿐 평면상 막바로 몸체가 붙여진 모습이다.

1950년 사진 자료에 의하면 중당과 양 익사가 각 3칸씩이었는데 지금 건물은 2칸씩으로 되어 있다.

1969년 건축 당시 외관만 옛모습에 비슷하게 맞추었을 뿐 주칸(主間)의 칸수와 세부 양식에 있어서는 고증 자료가 충분치 못하여 미려하고 장중한 건축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단은 전면 쪽은 높고 후면 쪽은 낮은 이중기단(二重基壇)으로서 기단석 및 초석(礎石)은 현무암을 기공하여 조성하였으며 기단 바닥도 역시 현무암 박석깔기로 되어 있다.


건물의 내부 바닥은 모두 목조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일부 칸막이를 하여 대청(大廳), 사무실, 창고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장연(長緣)과 단연(短緣) 위에 연목개판을 깔아 옥개부(屋蓋部)를 형성하였다. 중당 내부 바닥에서 대들보까지의 높이는 3,450㎜이다.

기중은 모두 원기둥이며 중당은 익공이 없는 민도리집이며 익사는 간소한 초익공을 놓은 모습이다.

 처마는 중당과 양 익사 모두 연모고가 부연으로 구성진 겹처마로서 그 깊이는 주심(柱心)에서 부연 끝으로 1,720㎜가 빠져나와 있다.

건물의 최고 높이는 9,610㎜로 매우 높게 지어졌었고 중당과 익사 처마 높이의 차이는 630㎜이다.

천장은 모두 연등천장으로 연모와 상부 가구가 모두 드러나게 하여 트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측면의 화방벽만 제외하고는 정면과 배면 모두 동일한 형태의 4짝 띠살분합문을 달았으며 중당에는 상부에 고창(高窓)을 첨가하였다. 측면벽은 창방 밑까지 방형(方形)으로 가공한 현무암을 줄맞추어 쌓았다.

계성사(啓聖祠, 위 사진)는 5성(聖)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제향된 위패는 공자(孔子)의 아버지 제국공 공숙량흘(齊國公孔叔樑紇), 안자(顔子)의 아버지인 곡부후 안무유(曲阜侯顔無繇), 증자(曾子)의 아버지 내무후 증점(萊蕪侯曾點), 자사(子思)의 아버지 사수후 공리(泗水侯孔鯉), 맹자(孟子)의 아버지 주국공 맹격(邾國公孟激)이다.


계성사 설립의 유래를 보면 선조7년(1574) 조헌(趙憲)을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보내어 규모와 제도를 조사시킨 다음, 숙종25년(1699) 예조판서 김구(金構)와 대사헌 홍수헌(洪受瀗)을 시켜 성균관의 대성전 서북쪽에 터를 잡고 건축을 시작하여 2년 뒤인 1701년에 완공하였다.

영조15년(1739) 모든 도와 큰 고을의 향교마다 계성사를 세울 것을 명령하였고, 20년 뒤인 1759년에 사액(賜額)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주향교의 계성사는 처음에 김몽신·김영업·신상흠 등이 몇 차례 상소하여 계성사의 건립을 요청하였었는데 1854년 가을에 이르러 또 유생 고사징(高泗澄)이 요청하자 당시 영의정 김좌근이 왕에게 아뢰어 윤허를 얻어 세우게 되었다. 1897년 목사 이병휘가 중수, 1974년 국고보조 및 유림의 성금으로 중수, 1997년 제주시가 해체·복원하였다.


계성사(啓聖祠) 삼문(三門)은 계성사의 전면에 동향(東向)하여 세워졌으며 계성사의 대문역할인데 대성전의 경우와 같이 신삼문(神三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삼문은 향교가 현 위치로 이건된 (1827) 후인 철종(哲宗) 5년(1854)의 계성사 건립 당시의 삼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계성사와 삼문 사이의 전정(前庭)은 그 거리가 그리 길지 않고 삼문의 전면쪽은 급격히 레벨이 떨어지는 경사지형으로 삼문 아래쪽에서 보면 사당(祠堂)인 계성사는 삼문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 삼문 형식으로서 중앙칸의 주칸은 2,230mm, 협칸의 주칸은 1,760mm로 중앙칸이 협칸보다 470mm가량 더 넓다.

현무암을 가공하여 낮은 초석들을 놓고 그 위에 각주(角柱)를 세웠다. 기단은 현무암 초석의 바깥면에 맞추어 설치하였고 기단바닥은 현무암 박석을 불규칙하게 깔았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납도리와 보를 장방형(長方形) 틀이 되게 짰다. 도리 위에는 각연(角椽)형태의 연문(90mm×115mm)을 일정 간격(360mm)으로 걸어 연목개판(椽木蓋板)을 깔고 적심목(積心木)을 얹어 옥개부(屋盖部)를 구성하였다.


주고(柱高)는 도리밑 까지의 높이가 1,650mm이며 측면중앙에 변선을 세우고 문선을 붙여 2짝 판문을 내었다. 문인방(文引枋) 사이가 높이가 1,550mm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 협문 역시 허리를 낮추어야 들어 다닐 수 있다.

처마의 깊이는 450mm(주심에서 연목끝)이며 측면 박공뺄목은 435mm이다. 소와 규격이 기와로 맞배지붕을 꾸몄다.

협문의 최고 높이는 3,060mm로 비교적 낮은 편이며 기와 끝은 와구토(瓦口土=마사토에 적절한 비율의 강회를 섞어 반죽하여 수키와의 열린 구멍을 막는 것)가 발라져 있다.

목재면(木材面)은 석간주와 뇌록가칠로 마감되어 있다.(제주향교 홈피) 계성사 현판은 성균진사이며 제주향교 교수였던 정헌(靜軒) 김용징(金龍徵, 1809~1890, 납읍리 출신) 진사가 썼다.

전사청은 제사를 준비하는 곳, 삼문은 대성전 정면에, 협문은 좌우측면에 있는 문이다.

일반적으로 향교의 건물 배치는 대지가 평지인 경우 전면에 배향공간(대성전)이 자리잡고 후면에 강학공간(명륜당)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는 것이 원칙이나 제주향교는 잦은 이설과 주변 사정으로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제주의 문화재 183∼184쪽)

 

오늘날 제주향교에서는 방학을 이용하여 어린이들에게 예절과 한문 교육을 가르치기도 하고, 전통혼례를 주관해 주기도 한다.

제주향교의 북쪽 구석에는 선정비가 많이 세워져 있는데 옛날의 목사·판관을 기리는 비석으로부터 오늘날의 유공자에 대한 비석까지 다양하다. 그 중 옛비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牧使金公夢 尊□聖待士碑(移建鄕校 快遂士願 儒林仰德 沒世難 ) (建隆二十四年 四月 訓長前縣監高處亮撰 掌議邊聖運書 舊在加樂泉上光緖乙酉移竪)
②沈使相英錫移建鄕校碑 (自卜吉基移建校宮 扶植本原永世立功) (庚寅 三月)
③李使相行敎四學改建碑 (移校巨役盡心□  推其餘力改葺三學) (庚寅 三月)
④使相張公寅植崇儒右文碑 (科事解□ 學政克擧) (咸豊元年 五月 三邑 儒林 各廳立)
⑤御史沈公東臣去思碑 (□錢四百  柴 戶) (同治元年 二月)
⑥牧使趙公羲純校宮修改碑 (壬申 十月)
⑦牧使白公樂淵興學碑 (捐錢置齋 設 養士) (崇貞五年 壬辰 二月)
⑧使相洪公圭待士碑 (惠洽却金 頌□□石) (丙戌 五月)
⑨牧使沈遠澤興學碑 (庚寅 五月)
⑩使相洪公重徵立靑衿案碑

 

용담동 노인회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예전에는 향교 터가 좋아야 출세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향교 자리는 어느 자리보다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제주향교도 향교 터를 여러 번 옮기면서 선비를 출세시키려 했었다는 것이다.

특히 향교 터가 어디에 자리잡았는지에 따라 배출되는 관직들도 달랐다는데, 제주향교의 경우는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이어서 무과 급제자들이 많았고, 정의현(현 서귀포시 성읍)에 있는 정의향교는 문장투필형(文章投筆形)이어서 문과 급제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대정향교는 향교터가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어서 문장이 뛰어난 선비들이 가장 많았음에도 과거 급제자는 전혀 내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에 풍수에 맞게 부자로 사는 선비들은 많았다고 한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현혜경 글)

《작성 041018, 보완 140327, 1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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