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거석문화..용담2동 고인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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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거석문화..용담2동 고인돌6호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2.07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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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고인돌의 60% 이상 한국에 분포..탐라국시대 유물'

 

용담2동 고인돌6호

 


제주도 기념물 제2-6호(1971년 8월 26일 지정)
위치 ; 용담2동 2623-1번지.

 

제주시 용담2동 적십자회관 부근 남성로타리에서 서쪽으로 한천로를 따라 가다 제3한천교를 지나 50여m 가면 남쪽으로 난 좁은 길(서천길)이 있는데 100m 못 미쳐 서천길 8호 울타리 안에 고인돌이 있다. 남쪽에 50m 지점에 음식점 '제주장터' 주차장이 있다.


시대 ; 탐라시대

 

 

고인돌이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까지 이어진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며, 고대국가(古代國家) 발생 직전의 사회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호칭이 다른데,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석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 지역에서는 돌배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특히 고인돌이 많아서 전세계 고인돌의 60% 이상이 우리나라에 분포한다고 한다.

특히 강화도의 부근리·삼거리·오상리의 약 120여 기(基)의 고인돌군, 고창군 상갑리·죽림리 등 고창군 전역 205군집 총 1,665기의 고인돌, 화순군 효산리·대신리의 고인돌 500여 기 등이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고인돌은 부족사회 지도자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고인돌 아래에서 사람의 뼈가 발견된 적도 있다.

1967년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에서 사람뼈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키는 176센티미터 정도이며 두개골의 형태는 장두형(長頭形)이다.

그 밖에도 강원도 춘천 중도, 대구 달성 진천동, 경남 진양 대평리 등의 예가 알려져 있으며, 중국 길림 지역, 북한 황주 침촌리 지역에서도 사람 뼈가 출토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제주도에서는 탐라국시대의 유적이라고 한다. 간혹 무덤이 아닌 제의시설로 만든 것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고인돌이라 부르고 있다.

이 고인돌의 상석은 길이 315cm, 폭 217cm, 두께 105cm으로 장축 방향은 정남북이며 평지에 만들어졌다.

지석(받침돌)은 11매의 잘 다듬은 높이 68∼90cm, 폭 39∼74cm의 판석으로 상석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병풍처럼 고였는데 상석을 지형에 맞게 수평으로 고이기 위해 각각 그 크기를 다르게 했다.

매장부는 1959년 조사 때 석실 한가운데에 길이 160cm, 폭 100cm의 직사각형 토광(土壙)을 파서, 바닥은 자갈돌을 얇게 깐 다음, 토광 테두리를 괴석(塊石=덩어리돌)으로 돌린 석곽으로 조사되었다.

지금은 이 시설은 관찰되지 않는다.

 

이 고인돌은 지상에 매장부가 있으면서 판석으로 벽을 쌓아 놓고 벽 안에 시신을 놓은 후 큰 돌을 지붕삼아 덮은 형태였으나 판석 5~6개는 없어져 버렸다.

이와 같은 형태는 제주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제주도 특수형'이라 할 만하며 석실형(石室形) 또는 위석식(衛石式) 고인돌이라 분류하기도 한다.


현재까지 제주도에서 발견된 고인돌 중에 가장 큰 것으로 상석의 무게가 8∼10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고인돌이지만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건축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인돌은 지석 일부가 쓰러져 눕혀진 상태에서 발견되어 1988년 경 상석을 들어 올리고 지하에 대한 발굴조사를 한 다음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지석을 세워 복원한 것이다.


주변에서 확인된 유물은 곽지패총 5지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경질무문토기(곽지Ⅰ식토기)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토기의 저부(底部=바닥 부분)과 구연부(口軟部=주둥이 부분) 형태는 일부 삼양동식 토기와 유사한 것들이 있다.

이 고인돌에서 매우 가까운 곳(용담2동 2696-2번지)에서 탐라국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집자리, 우물, 불 땐 자리 등의 유적과 각종 토기와 석기 등 유물이 발굴되어 2012년 5월에 국가 사적 522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주변에는 많은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없어져 버리거나 이전된 것 말고도 고인돌이 6개가 남아 있고, 무덤유적(용담2동 741-1번지), 제사유적(용담1동 311번지), 탐라시대 마을 움집터(용담2동 746-2번지)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탐라국 시대에 오랜 기간 매우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작성 041018, 보완 1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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