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고대마을..용담2동 월성마을 움집(복원-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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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고대마을..용담2동 월성마을 움집(복원-철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2.0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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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동 일대 5만평 이상 제주섬 최초 가장 큰 고대마을 형성' 추정

 

용담2동 월성마을 움집(복원-철거)


월성마을 주거유적(복원)

위치 ; 제주시 용담2동 746-2번지 월성교차로 일대
시기 ; 기원전 5∼3세기

 

 

제주섬 최초의 목조 주거문화는 언제부터 나타날까.

그 흔적은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 해안가에 형성된 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단순한 표류이든 혹은, 의도적이든 한반도 남부 등지에서 이곳에 흘러들어온 청동기인들은 제주섬 최초의 정주를 위한 목조건축의 주거문화를 남겼다.

기원전 2500년쯤의 이 유적은 출토유물로 볼 때 당시 선사인들은 소규모 마을을 형성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제주섬에 뿌리내린 주거문화는 차츰 규모를 갖춘 발달된 양상을 보인다.

상모리에서 파생된 문화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관련성을 찾을 수 있는 유적으로는 한림읍 동명리, 애월읍 곽지리, 구좌읍 김녕리, 서귀포시 대포동, 제주시 용담동 월성마을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은 약간의 시기차가 인정되지만 당시에 소규모 마을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용담동 월성마을 선사유적은 소규모 주거유적이 아닌 제주섬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대규모 마을유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제주시 용담2동 746-2번지 월성교차로 일대. 제주국제공항 바로 인접한 이곳에는 선사시대의 주거지가 복원되었다.

1999년 말 제주대박물관의 발굴결과 확인된 유구중 일부를 제주시가 2000년 5월부터 복원에 들어가 2001년 2월초 완성 재현해 놓은 것이다.

당시 발굴에서는 장방형 수혈주거지 1기, 부정형 수혈유구 2기, 지상식불다짐유구 2기, 수혈식 석곽 1기, 기타 분묘 관련 적석시설, 각종 석기·토기 등 유물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수혈식 가옥 2동과 고상가옥 1기 등 모두 3기가 복원된 것이다. 그러나, 3채의 움집 중에서 지상가옥 작은 것 한 채만이 원형대로 복원된 것이고 나머지 둘은 원형이 아니다.

원래 위치도 횡단보도와 자전거도로에 걸쳐서 녹색페인트가 칠해진 곳이다. 큰 움집은 1.5배 확대하여 복원한 것인데 삼양동 유적지에 비추어 볼 때 이렇게 큰 움집도 있었을 거라는 추정 아래 복원했다고 한다.

게다가 고상가옥(2층집)은 삼양동에서 발굴된 집자리를 그대로 본떠다가 이곳에 복원한 것이다.

삼양동에 있었으니까 당연히 용담동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여 확인되지도 않은 것을 복원한 것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이영권, 제주역사기행. 30∼31쪽)

이 유적은 기원전 3세기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구순부각목토기(口脣部刻目土器)등 토기양상으로 유추했을 때는 기원전 5∼3세기 유적으로 연대를 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제주섬의 여건상 기원전 5세기쯤에 월성마을과 같은 대규모 마을이 형성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로 볼 때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제주섬의 당시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이 무렵에는 기원전 6세기대 이후의 상모리와 기원전 5∼3세기의 김녕 등지에 아주 소규모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월성마을의 수혈주거지는 상모리 보다는 늦지만 삼양동 고대마을터 보다 앞선 단계의 유적인 셈이다.

상모리 문화양상을 이어 받은 당시의 선사인들은 이곳 월성마을을 중심으로 한 용담동 일대에 이전보다는 훨씬 분업화된 구조와 기능을 갖춘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생활을 시작한다.

상모리 유적에서 부정형으로 주거흔적이 확인된 것에 비해 집자리가 대형(장방형 수혈유구 12평 규모·장축 745㎝, 단축 500㎝, 깊이 25㎝)이고 4개의 중심기둥 배치를 기본으로 견고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또 이들은 주거지 내부의 공간을 기능·용도별로 분할해서 사용하는 좀 더 발달된 생활행태를 보여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당시까지만 해도 선사인들은 식량 획득의 용이성이나 자연조건에 따라 계절적으로 주거지를 달리하는 등 불완전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 이전부터 훌륭한 보금자리 역할을 한 동굴입구집자리등이 그 좋은 예이다. 용담동 월성마을은 선사인들의 이러한 삶과 생활의 패턴에서 벗어나 어엿한 규모의 마을을 형성하고 완전한 정착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수렵이나 채집 어로생활 중심의 상모리 문화에서 농경 중심의 문화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이 곳을 중심으로 한 용담동 고대마을터의 범위는 5만여평 이상의 규모로 추정된다.

 해안으로부터 약 1.5km 거리에 바다가 있고 동쪽으로 한천(漢川)을 끼고 있는 이곳은 당시 선사인들의 삶의 무대로 더없이 좋은 여건을 형성했다.

상모리 문화의 일단을 지닌 집단은 이곳 월성마을을 중심으로 용담동 일대에 제주섬 최초의 가장 큰 고대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모리집단이 직접 이주해서 형성했는지의 여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청동기 문화의 전파라는 연장선상에서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이윤형기자(한라일보 2002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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