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걷는다(16)..'상상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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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걷는다(16)..'상상의 길'을..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3.07 0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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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16코스 탐방기)고내포구-광령까지 숨어있는 아름다움이

 

(1번에서 계속)

 
 
 
   

 

 

 

고개를 끄덕인 그는 감귤을 하나 주자 들고 먼저 일어나 갔고 나는 잠시 더 앉아 있다 일어났다.

정상쪽으로 가다 보니 조그만 샘이 하나 있었다.

오름 정상에서 샘을 만나는 일은 참 드문 일이다.
이름이 수산봉이라 그런 것일까..


나는 특별히 만난 연못같은 샘을 보며 위쪽을 향해 올랐다.

그곳 정상에는 또 무덤 3개가 오롯이 앉아 있었다.

왜 오름 정상에는 꼭 무덤이 한 두 개씩 있는 것인지..
이곳에 있는 3개의 무덤은 더욱 그런 느낌이 더 들게 했다.
그곳에 무덤이 있다면 다른 무덤도 있을 만 하지만..무덤은 한쪽으로 비켜 몇 개가 더 보이긴 했다.

오름 정상의 무덤은 늘 "왜 꼭 거기에.."라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애월읍의 특별사업인 듯 이 수산봉 정상에는 시비가 몇 개 서 있었다.
이 시비들은 올레16코스를 걷는 동안 길마다 돌담마다 또는 개인 집 입구에도 수도 없이 서 있었다.
그 시비들은 올레꾼들에게 보라고 만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시비보다는 그 마을에 대한 설명하는 비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은 사업이었다는 생각이다.

마을 곳곳마다 그 지역 특성이나 마을 소개 또는 전설같은 내용을 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다고 그 일을 추진하라는 권유는 아니다)

수산봉을 다 내려오자 10킬로미터가 남았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이곳 수산저수지는 방역관계로 사람의 통행을 전면적으로 막고 있었다.

이어지는 수산리마을..
고풍스런 이 마을도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는 중이었다.
집들은 현대식으로 변해가고 마을길은 훨씬 넓어진 모습이었다.

 

 

마을을 지나는데 큰섬지란 샘물이 하나 나타났다.
예전에는 샘이 마르지 않고 수질이 좋아 인근 장전리나 소길리에서도 이 물을 뜨러 왔다고 하는데 ..불행하게도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는 이 물도 음용수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안내돼 있었다.


길은 다시 마을과 함께 밭길따라 걷도록 안내했다.
16코스는 유독 오르는 길이 많았다.
계속 오르고 또 오르고..
바닷가마을에서 중산간까지 걸어야 하는 탓인지 길은 계속 오르막길만 나타났다.


이런 오르기만 하는 길을 계속 따라 가다보니 9킬로미터 지점이 나타났고 곧 이어 예원동마을이 나타났다.
이름이 예쁜 이 마을을 지나니 다시 대로로 이어지고..
대로를 지나자 항파두리쪽 코스로 안내한다.

장수물입구에서 생긴 일화 하나..
장수물이라고 쓰여진 곳을 지나려는데 어디서 본 얼굴이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윤용택 교수님 아니냐..?"고 물었고 그 분은 "윤 교수가 아니.."라며 "윤 교수는 어느 대학에 있는 분이냐"고 물었다.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라고 했더니 "자기도 한번 자기 닮은 얼굴을 보고 싶다"며 "윤용택 교수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같이 사진을 찍어서 남기기로 했던 것이다.

명함을 주고받고 보니..성창특허법률사무소 대표인 고영회 변리사(기술사)였다.


진주고를 77년에 졸업하고 81년에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했으며 98년에 석사, 2003년에 박사과정을 마쳤다고 명함에는 쓰여 있었다.


변리사시험을 거쳐 97년부터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대한변리사회 공보이사와 부회장을 거쳐 대한변리사회장과 대한기술사회 회장을 역임한 후 지금은 세종과학포럼 상임대표로 있다는 분이었다.

올레길에서의 만남은 이처럼 우연히 특별한 인연을 부르기도 한다.

장수물은 가 보지 못했지만 올레길은 숲속으로 들어가도록 안내했다.
다시 오르막길이 계속 되는 길이었다.

 

 

 
   

 

오르다 보니 토성이 우뚝 나타났다.
마치 서울에 있는 백제토성같은 모양을 한 거대한 성이었다.
다만 이 토성 양 옆으로 한쪽은 비닐하우스가, 한쪽은 감귤농업을 하도록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중요한 문화재라면 주위 땅을 사서라도 조금 더 돋보이게 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토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 토성위로 일부러 올라 걸어보았다.
만리장성보다야 못하겠지만 우리 지역에 있는 토성이여서일까.


토성이 가슴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토성 중간에서 항파두리로 오르는 계단옆에는 11km지점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

 

제주도 기념물 제28호. 현재 15리에 이르는 토성(土城)과 삼별초(三別抄) 군사들이 궁술훈련 때 과녁으로 사용했던 ‘살맞은 돌’, 성의 건물 문지였던 ‘돌쩌귀’, 김통정(金通精) 장군이 성 위에서 뛰어내린 발자국이 파여서 샘이 솟는다는 ‘장수물’, 삼별초 군대가 급수로 이용한 ‘옹성물’·‘구시물’, 옥터 등이 남아 있다.

이 유적지는 1977년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총화단결을 다짐하는 뜻에서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석성(石城)인 내성(內城)이 위치했던 9천여 평의 경내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우는 등 성역화되었다.

진도에서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 군대가 제주에 들어온 것은 1270년(원종 11) 11월 3일 이문경(李文京) 부대의 제주 명월포(明月浦) 상륙이었다. 이문경 부대는 이미 제주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관군(官軍)과 송담천(松淡川)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제주도 내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어 1271년(원종 12) 5월 김통정은 진도의 용장성이 무너지자, 남은 삼별초 군대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와 이문경 부대와 합세하여 대몽항쟁을 위한 본격적인 방어 시설을 구축해 나갔다.

이 항몽유적지는 1273년(원종 14) 4월 고려의 김방경(金方慶)과 원장(元將) 흔도(忻都)가 이끄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삼별초가 토벌되기까지 대몽항쟁의 거점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로는 올레가 이어지지 않고 큰 길따라 그 반대쪽으로 안내했다.

이 길을 조금 걸어 가니 중간스탬프 포스트가 조그만 공원안에 서 있었다.

중간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15시05분.

 

 

이제 길은 다시 들길쪽으로 걷는데 계속 토성이 이어지는 길이다.
토성이 얼마나 장엄한지 선조들의 피와 땀이 밴 그 숭고한 마음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다시 그 토성위로 올라 가 걷기 시작했다.
토성 위를 걷는 기분도 괜찮았지만 자꾸만 토성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런 토성을 세웠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토성을 지나쳐 보리가 자라는 밭길을 지나면서도 나는 계속 토성을 바라보며 걸었다.
토성이 끝나는 길에서는 이제 다시 숲속길로 올레길은 이어진다.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조그만 숲속길.

 

 

그 숲속을 다 나오니 거대한 계곡 하나가 나타났다.
아직까지 기계가 무너뜨리지 않은 귀한 계곡이었다.
그 계곡을 뒤로 하고 걸어가니 다시 밭길로 이어진다.


그 길은 마을로 이어지고 있었고 어쩌면 새로 생긴 마을일지도 모르는 주거단지가 하나 나타났다.
이름 하여 비버리 힐즈..
고급 주택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리라.


16코스에는 중산간 지역으로 많은 주택들이 세워지거나 세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들 주택지는 지금 시내권에 무분별하게 세워지는 아파트단지보다는 나을지 모른다.

 

 

 

 

단독주택 위주의 단지가 16코스에는 참 많이 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을 지나 집들이 띄엄띄엄 있는 마을을 지나고 또 지나고..

 

그렇게 무작정 길을 따라 걸었다.
드디어 15km지점..
1.7km가 남은 곳까지 오자 드디어 다 왔다는 안도가 생겼다.


그렇게 좁은 마을길을 계속 걷다 보니..
붉은 카페트가 깔린 듯 한 길이 나타났다.
광령초등학교 옆길이었다.


이 학교 입구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광령1리사무소가 나타난 것은..
드디어 종점에 도착한 것이다.
시간은 16시54분.
5시간 30분 정도를 걸었다.

 
     
 

그러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버스는 언제 올지 모르고..
택시는 잡을 수가 없어 콜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애월콜택시로 전화를 했더니 “15분쯤 걸릴 거”란다.


내가 “기다린다”고 했더니 “중간에 지나가는 택시를 타면 안된다”고 신신 당부했다.
나는 “절대 안타고 기다리겠다”는 다짐을 전해줬다.

그렇게 해서 17시 20분경 출발점인 고내포구에 내렸다.


택시비는 9200원이 나왔다며 기사는 내게 “1만원을 받아야 하는데 9천원만 내라”고 했지만 나는 “1만원을 드리겠다”고 했다.


일요일에 태우러 와 준게 고마웠기 때문이다.


나는 걷는다(3권)의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시안에 도착하기 전 신장이라는 곳에서 쓴 글이 있다.

 


“ ..(중략)지혜란 어떤 것일까? 조상이 가졌던 마음의 평정? 어쨌든 나는 사회를 떠난 ‘은퇴자’이니, 운둔자의 이런 덕목이 내 운명에 예정되어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꿈을 꾸고 고독을 느끼며,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걸은 보람이 조금씩 나타났다.
보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보람이라고 느꼈다.


지나쳐가는 풍경과 생각과 만남으로 이루어진 보람. 우리 사회를 뒤덮은 듯한 광기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긴박하게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나는 생각의 속도로 살기를 바랄 뿐이다.
걷기는 소위 문명화되었다고 하는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죽음-사람들은 삶과 혼동하고 있다-의 달리기에 브레이크를 건다.


내가 느끼기에 우리 사회는 텔레비전이 내미는 일그러진 거울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문하기 전에, 사마르칸트를 떠난 이래 오랫동안, 매일매일 짧은 여정속에서 떠난 이유를 내 자신에게 물었다.


무엇보다 시급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깨닫는 것이다.
나를 떠나게 부추긴 것은 우선 너무 오래도록 얌전히 생활하면서 억눌려온 모험에 대한 갈증이었다.

 

 

 

올레는 목적지가 있어서 좋다.
가다 보면 힘은 들지만 끝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건 분명 목적지가 있고 도착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레는 무작정 걷는 길이 아니기에 늘 즐겁게 걷고 있다.

다음 코스는 광령에서 제주시를 관통하는 17코스다.
제주시를 올레꾼으로 걷는 그 마음이 무척 궁금하다.
그곳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제주올레 지도

제주올레코스 전도(제주올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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