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총체적으로 보는 방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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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총체적으로 보는 방법에 대하여
  • 이범
  • 승인 2017.03.17 2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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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락은 중국의 중원을 흐르던 12개의 큰 강으로 이미지화한 것


몸을 총체적으로 보는 방법에 대하여/이범의 몸펴기칼럼 


 

 

 


사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한다면 종합적인 연관관계 하에서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사물을 따로 떼어 놓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물을 분리해서 보면 분리된 그 부분만 보이고 전체가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보는 것이 사물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인가 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특히 몸살림운동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보는 것이 몸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지요. 지금 한방(韓方)에서는 양방(洋方)에 대해 사람의 몸을 따로따로 분리해서 보기 때문에 전체적인 연관관계 하에서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비판합니다.

반면 양방에서는 한방에 대해 음양오행이라는 전근대적이고 비과학적인, 따라서 아무런 근거도 없는 방법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현대의학과 전통의학이 하나로 통합돼 있기 때문에 이런 대치가 없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두 방법이 완전히 분리돼서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두 주장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양쪽의 주장 중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요?

저는 두 주장에 일리가 있기도 하고, 틀린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면 타당성이 있는 반면, 일면 잘못 보고 있는 측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인간의 사고가 어떻게 전개돼 왔으며, 이에 따라 몸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 왔는가를 검토해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역사적으로 보면 아주 천천히 점진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한번 사고의 패러다임이 바뀌려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립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생각의 변화에 따라 시대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선 한방에서 양방을 비판하는 부분에 대해서 보면, 양방이 현재 사람의 몸을 전체적인 연관관계 하에서 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옳은 지적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짚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양방이라는 말은 서양에서 들어온 방법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정확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현대의학이 될 것입니다.

현대의학이란 서양의 고대의학이나 중세의학, 근대의학이 아니라 바로 최근에 이루어진 현대의 의학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는 대체로 20세기 이후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 직전의 의학을 근대의학이라고 합니다.

19세기까지 서양에서 발전한 자연과학을 토대로 해서 사람의 몸에 대해서도 많은 이해가 이루어졌고 기술도 많이 발전했는데, 이를 토대로 해서 성립한 의학이 현대의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학은 자신을 과학적인 의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이 다른 의학은 과학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다른 의학의 체계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나름대로 그 사회에서 형성된 전통적인 사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해서 전적으로 옳은 것으로 보거나, 전통적인 방법은 모두 틀렸다고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의학이 사람의 몸을 보는 방법에 한계가 있을 수도 있고, 전통적인 방법에는 그 방법이 만들어지는 기간 동안 경험에 의해 입증된 좋은 성과물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학은 분명히 몸을 쪼개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의 의학이 예전부터 몸을 쪼개서 본 것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시대에는 몸의 균형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중세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 과학이 발전하면서 몸을 세분해서 보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몸의 기관(organ: 조직이 모여 특정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 부분)을 발견했고, 다음에는 조직(tissue: 구조와 기능이 비슷한 세포집단과 세포간 물질로 구성되는 다세포 생물 구성의 한 단계)을, 다음에는 세포(cell: 막으로 둘러싸인 생물체의 구조 및 기능의 기본 단위)를 발견했습니다.

점점 더 미세한 단위까지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분자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세포 수준에서 화학적으로 분석하게 됐습니다. 현재 현대의학은 분자생물학을 기초로 해서 성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본다고 해서 반드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는 것은 사람의 몸에 대해 한 단계 진전된 새로운 지식을 제공해 줍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는 것에 한정돼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전체적인 연관관계를 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슷한 성질의 세포가 모여 조직을 이루고, 조직이 모여 기관을 이루고, 기관이 모여 기관계를 이루고, 이런 기관계가 모여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척추동물의 경우에는 피부계, 골격계, 근육계, 신경계, 내분비계, 소화계, 호흡계, 순환계, 배설계, 생식계 등 10가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의 협동으로 인해 떠오르는 집단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물리학계에서 논의되기 시작하고 있는 복잡계 이론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포가 모여 조직이 되면 협동을 하면서 세포 하나로는 가질 수 없는 성질을 갖게 되고, 조직이 여러 개 모여 기관이 되면 협동을 하면서 조직 하나로는 가질 수 없는 성질을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관이 여러 개 모이면 기관 하나로는 가질 수 없는 성질을 갖게 되고, 더 놀라운 것은 기관계가 모이면 서로 협동을 하면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이렇게 개별 세포부터 시작해 기관계까지 서로 협동을 하면서 하나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리고 개별 세포로서는 가질 수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독특한 생명체가 됩니다.

단세포 생물은 그 나름대로 여러 분자가 모여 협동하면서 독특한 생명체 현상, 즉 집단성질을 나타내고, 다세포 생물은 또 이런 단세포가 모여 협동을 하면서 독특한 생명체 현상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사람의 몸을 볼 때에는 이런 협동으로 인한 집단 성질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의학은 이런 협동으로 인한 집단 성질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고, 개별 세포 내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주로 분자생물학에 기초해 개별 세포의 이상 유무로 사람 몸의 이상 유무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지럼증을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현대의학에서는 어지럼증을 귓속에 있는 세반고리관에 이상이 생겨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어지럼증은 대개 세반고리관과는 상관없이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학에서는 어지럼증을 거의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반고리관은 몸의 균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이에 대해 세포 수준에서 그 기제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현대의학의 큰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지럼증을 거의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지럼증을 세반고리관만의 문제로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현대의학의 맹점이 있습니다.

우리 몸의 협동으로 인한 집단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연관관계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살림운동에 입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지럼증을 해결하기 위해 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어지럼증이 심한 사람은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핑 하면서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깨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모두 어지럼증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증세가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깨를 둘러싼 근육이 굳어 있어 어깨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본운동 중 온몸펴기와 상체펴기를 꾸준히 해서 어깨 주변의 근육이 풀리면 어지럼증은 점차 사라집니다. 어깨 주변의 근육이 풀리면 목을 둘러싼 근육이 풀리고, 그러면 어지럼증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저는 아직 그 기제를 정확하고 상세하게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다만 미루어서 추정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경험을 보면 아무리 증세가 심한 사람일지라도 어깨가 풀리면 목이 풀리면서 예외 없이 이 증세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저는 어지럼증은 세반고리관 자체보다는 세반고리관에서 몸의 균형을 잡는 두뇌로 연결되는 신경의 문제라고 봅니다.

목 근육이 굳으면 이 신경이 눌려 세반고리관에서 신호 또는 정보가 잘 전달되지 않을 때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몸이 굽어 어깨가 앞으로 움츠러들면 목 근육이 굳고 이때 어떤 사람은 귀에서 두뇌로 가는 신경이 눌려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전체적으로 하나로 보아야 몸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뼈와 근육, 신경, 혈액 등이 상호 협동하면서 사람의 몸이라는 집단 성질을 나타내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편두통의 경우를 생각해 보지요. 뒷골이 당기고 아프다는 후두통(後頭痛) 역시 어지럼증과 마찬가지로 몸이 전체적으로 굽어 어깨가 앞으로 움츠러들어 있을 때 생깁니다.

이 기제는 명백합니다. 어깨를 감싸고 있는 등세모근(=승모근) 중 상부의 근육이 심하게 굳어 있을 때 머리 뒤쪽의 근육이 굳으면서 후두통이 생깁니다.

머리 위가 아픈 정두통(頂頭痛)이나 머리 앞이 아픈 전투통(前頭痛)의 경우도 마찬가지 기제에 의해 나타난다고 보면 됩니다. 이 세 가지 두 통은 상부등세모근이 풀리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머리 옆이 아픈 측두통(側頭痛)은 좀 원인이 다릅니다. 측두통은 목빗근(=흉쇄유돌근)이 심하게 굳어 있을 때 이와 줄기를 이루고 있는 귀 주변의 근육이 굳어서 생기는 것으로 봅니다.

두통이라는 것도 결국 몸이 구부러져 몸의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근육이 굳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학에서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으로 처방을 합니다.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부작용이 없는 두통약이 많이 개발돼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몸을 전체적인 연관관계 하에서 보지 않기 때문에 이런 불합리한 측면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편두통이 심한 사람은 평생 두통약을 달고 살아야 하게 됩니다.

이제 양방에서 한방을 비판하는 내용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방의 이론은 현재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체질론(四象體質論)입니다.

음양오행론은 중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에서 정착된 것이고, 사상체질론은 우리나라의 이제마(李濟馬, 1837~1900) 선생이 창안한 것입니다.

사상체질론에 대한 검토는 추후의 과제로 남기고 여기에서는 음양오행론에 대해서만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린다면 양방에서 한방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론적 방법론의 측면에서 보면 고대 철학의 외피를 두르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오류를 수정해야 하겠지만, 경험적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의학이 심각하게 간과하고 있는 측면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요소가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양 측면을 함께 보고 한방의 발전뿐만 아니라 양방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음양오행론이 고대 철학의 산물이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양오행론이 중국 고대의 철학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중국의 춘추시대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발전해 오던 음행설과 오행설이 전국시대에 이르러 통합되면서 음양오행설이 성립됐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중국 고대의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까지 부정하면 다음 얘기가 전개될 수 없게 됩니다. 문제는 중국 고대의 철학을 전제로 성립됐다고 해서 그 유용성이 전적으로 부정되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위의 이론이 음양론이고 이것을 보충하는 것이 오행론입니다. 음양론은 세상 모든 사물의 이치를 음과 양으로 갈라서 보는 것입니다.

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면 이치대로 돌아가 정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고, 부조화가 생기면 이상이 생긴다고 봅니다.

사람의 몸도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면 건강하고, 그렇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고 봅니다. 음이 과하거나 양이 과해져 병이 생긴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음양론에 오행론이 부과돼 음양오행론이 되는데, 저로서는 왜 음양이 오행과 연결되는지 그 논리적 구조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음양론과 오행론이 논리적 연관성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상위와 하위의 이론으로 결합돼 있다고 보는 것이 제가 보는 관점입니다. 이론적 정합성을 갖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음과 양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 적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원자의 전자와 양성자, 세상 생물들의 암컷과 수컷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음과 양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들어 음양론이 맞는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얘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자와 양성자는 쿼크로 이루어져 있고 쿼크는 양과 음의 전하가 없으며, 생물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세포에는 암과 수가 따로 없습니다.

생물이 암과 수로 갈리는 것은 유전자의 DNA 구성에 따라 모인 세포의 집단 성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해가 뜨는 낮이 양이고, 달이 뜨는 밤이 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행론을 보면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행론은 고대 인도에서 시작돼 다른 문화권으로 퍼져 나갔다는 견해도 있는데, 이런 주장에 대해 아직 확인할 길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고대 인도에서 오행론과 유사한 이론이 있었고, 고대 그리스에도 오행론과는 다르지만 사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물(水), 불(火), 공기(空), 흙(土)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라고 보는 철학이 있었는데, 이런 이론이 토(土), 목(木), 금(金), 화(火), 수(水)의 오행설과 유사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음양론이든 오행론이든 모두 일종의 고대 철학의 산물이며, 근대 이후 서양에서 탄생한 자연과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현대의학이 한방에 대해 가하는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아무런 방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재 한방은 분명히 근대 자연과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과학적인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또 얘기가 달라집니다. 한방은 중국에서 탄생해 우리나라에 전래돼 나름대로 정착이 됐습니다.

이는 한의학의 한자명을 대한한의사협회에서 漢醫學에서 韓醫學으로 바꾸자고 제안하고 당시 보건사회부에서 법을 개정하게 된 것이 것이 1986년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전국시대(BC403~BC202)에 한방의 방법이 이론적으로 정립됐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한방에는 수천 년에 걸친 경험이 누적돼 있을 것입니다.

약을 쓰는 방법이나 침과 뜸을 놓는 방법이나 모두 유용성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을 것이고, 수천 년에 걸쳐 개선돼 왔을 것입니다.

침과 뜸을 놓는 데 기초가 되는 경락이론을 예로 들어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물론 경락이론도 음양오행의 철학을 토대로 해서 성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음양오행의 철학을 토대로 성립한 경락이론을 전제로 한 방법으로 침과 뜸을 놓는다고 해서 침과 뜸이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일까요?

물론 침과 뜸을 비과학적이라고 해서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침과 뜸이 아직도 상당히 유용한 치료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저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현대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심각한 병이 침이나 뜸을 통해 낫는 사례를 여러 차례 보았고 또 그런 사례를 많이 들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경락은 어떤 지점(이를 穴이라 함)에 자극을 주었을 때 시큰하고(酸) 저리고(麻) 묵직하고(重) 팽팽한(張) 느낌이 흐르는 노선(길)을 중국의 중원을 흐르던 12개의 큰 강으로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노선을 따라 강에서 강물이 흐르듯이 기(氣)가 흐른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라는 것은 물론 음양론에서 얘기하는 음과 양의 기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앞쪽이나 안쪽을 음이라 하고 뒤쪽이나 바깥쪽을 양이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저도 경락이론은 과학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사람의 몸을 접하면서 이 방법이 상당히 유용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손끝이 시릴 때 팔뚝을 때려서 풀어 주면 이 시린 것이 풀립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어깨 근육을 풀어 주면 이 머리 아픈 것이 풀립니다. 무릎의 특정 지점이 아픈 사람은 고관절 서혜부를 풀어 주면 이 무릎 아픈 것이 풀립니다.

뿐만 아니라 다리 근육이 풀려 다리가 편안해지면 잘 돌아가지 않던 목까지 수월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픈 지점과 풀어 준 지점이 연결되는 곳의 근육을 따라가면서 눌러 보면 약간의 곡선을 이루면서 일정한 선을 이루며 아픕니다.

현재 이 선을 ‘근육의 줄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육의 줄기에 대해 󰡔몸 펴면 살고, 굽으면 죽는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뇌 이랑(=뇌회: 대뇌피질의 주름에 의해서 생기는 뇌 표면의 구불구불한 융기)의 한 지점을 자극하면 어떤 한 개의 근육만 수축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무리의 근육이 동시에 수축해 한 방향으로 조정되는 운동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때 한쪽이 수축할 때 다른 쪽은 늘어나게 되어 있는 한 쌍의 근육인 길항근(拮抗筋)의 움직임 역시 동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이는 운동을 할 때 두뇌에서 근육 하나하나에 따로 명령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한 묶음의 근육에 동시에 명령이 내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운동은 하나의 근육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협력근(協力筋: 힘을 합해 서로 도와 같은 작용을 하는 근육)과 길항근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인데, 그것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일정한 패턴은 이미 대뇌피질에 입력돼 있다. 그래서 어깨뼈에서 손끝까지, 골반에서 발가락 끝까지 동시에 움직이는 근육의 줄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서 ‘근육의 줄기’가 형성되는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경락이론은 이 ‘근육의 줄기’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경락의 노선을 따라 기가 흐르는가는 차치하고, 또 현재 경락이 얼마나 그 노선을 정확하게 짚어 내고 있는가는 차치하고, 경락에서 보듯이 우리의 몸이 상호 연결돼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는 수술을 할 때 침으로 마취를 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몸의 상호 연관성을 잘 이해하게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방은 수천 년의 경험을 통해 몸의 연관관계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됐고, 그 덕분에 상당한 정도 치료에 효과가 있었고, 그래서 현대의학이 풍미하고 있는 현 시대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와 학문이 미분화돼 있던 고대 시대의 음양오행설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경험을 통해 축적된 몸의 연관관계에 대한 사고는 오히려 현대의학의 시대에 더 주목하고 살려야 할 과거의 중요한 성과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학은 아주 미세한 세포의 구조는 화학적으로 보고 있지만, 이렇게 상호 연관돼 있는 몸의 구조는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현대의학의 결정적인 약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최근 21세기 물리학의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복잡계 이론에서 보는 것과 같이 생명체의 몸에 나타나는 협동에 의한 집단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을 보완해야 현대의학은 절름발이에서 벗어나 두 발을 굳건하게 땅에 딛고 서는, 진정으로 과학적인 의학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서양에서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즉 전근대의 시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사고는 미분화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종교와 철학, 자연관, 인체관 등이 모두 하나로 통합돼 있었습니다. 서양에서 근대를 맞으면서 종교에서 철학이 분리되고, 철학에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분리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역시 더 세부적으로 분화가 이루어져 왔고, 또 지금도 또한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몸에 대해서도 좀 더 세분해서 보게 됐습니다.

서양의 근대 이후 세분해서 보는 방법은 그 이전에 대충 뭉뚱그려서 보는 것에 비하면 분명히 발전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사물을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과학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분해서 보는 것만 가지고는 전체의 상이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이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보는 방법론이라면, 현대의학은 물질의 협동에 의한 집단 성질에 대해서도 주목을 해야 합니다. 이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방이 그 풍부한 경험을 살려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려고 한다면 음양오행이라는 중국 고대의 철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론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엄청나게 큰 작업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음양오행론에만 매달린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펴기운동은 과학적인 인체학(人體學), 즉 인체과학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의 성과물을 기초로 해서 몸의 각 세포와 조직, 기관의 연관관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분해서 보는 방법을 수용하면서 전체적인 연관관계를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생명체인 사람의 몸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쌓여 있던 풍부한 경험 또한 흡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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