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걷는다(18)",'슬픈 길'을..(1)
상태바
"나도 걷는다(18)",'슬픈 길'을..(1)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7.03.21 16: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레18코스 탐방기)제주-조천,역사의 숨결 가득 아기자기한 길

 

 

올레길은 지금 봄이다.
다만 아직 봄꽃이 만개하지 않았을 뿐..


그렇게 봄은 항상 더디 온다.
봄은 그렇게 느릿느릿 왔다가 빨리 가 버린다.

봄이 왔나 하면 곧 초여름이 와 버리기 때문이다.
올레를 걷는 발걸음도 그래서 봄의 길이 더욱 여유롭다.

길을 가다가 올레리본을 찾지 못해도 여기저기 찾아 보면 다시 나타나고..
그 길을 따라가다 사라지면 또 찾고..
숨바꼭질 하듯 그런 보물찾기 같은 올레리본을 보는 일도 실은 올레를 걷는 묘미다.

그렇게 나와 똑같이 헤맨 올레꾼을 만나는 일 또한 때로는 즐거운 일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 3월18일(토요일)은 제주시에서 조천 만세동산까지 18코스를 걷는 날이다.
18코스라 그런지 길이도 18km였다.

제주시 중앙양과 인근 간세올레라운지에서 출발 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09시15분.
걷기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18코스의 시작은 중앙로 대로변을 따라 길은 오현단으로 안내하고 있었고, 올레길은 제주성 돌담이 남아있는 이 제주성안의 제주에서 처음 선비들을 가르쳤던 귤림서원이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

 

 

귤림서원..

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 따르면 귤림서원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안에 있는 조선 시대 유교 교육 기관이다.

조선 시대 초기 및 중기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오현(五賢), 곧 충암 김정·규암 송인수·동계 정온·청음 김상헌·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교 교육 기관이었다.

초기의 학생수는 2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35명까지 늘어났으며,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기 전까지 오현사와 영혜사, 향현사 등 하나의 본사와 2개의 별사, 그리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수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귤림서원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뒤 사사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1659년(효종 10) 제주목사 이회가 장수당을 건립하고, 1665년(현종 6) 판관 최진남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으로 옮기면서 사(祠: 충암사)와 재(齋: 장수당)를 갖춘 명실 상부한 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1682년(숙종 8) 예조정랑 안건지가 제주도에 파견되어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며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뒤이어 1695년(숙종 21)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오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었는데, 1892년(고종 29) 제주 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2000년 이후 귤림서원 복원 작업에 들어간 제주시는, 2004년 10월 학생들이 공부하던 장수당과 협문 1채, 돌담 110m 등을 완성한 데 이어, 2007년 8월 향현사 복원을 마무리지었다.

조선 시대 유학과 유교 문화의 전당으로 제주 유생들의 지주 역할을 하였던 귤림서원이 복원됨으로써 제주 선현의 정신을 되살리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김봉옥, 『제주통사』(제주문화, 1987))



이 오현단이 있는 곳은 지금은 화북으로 옮겼지만, 제주도의 명문사학 오현학원(오현중,고교)이 있었던 곳이다.
학교 이름도 그래서 오현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 길을 따라 밖으로 나가니 올레길은 남수각 계곡이 보이는 다리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동문시장 입구로 안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주동문공설시장 입구에서 올레를 안내해 주는 리본을 잃어버렸다.
이 동문시장은 제주시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최근 관광객이 크게 늘어 인기가 많은 곳으로 발전하고 있다.

길을 잃어버린 나는, 지도를 보니 다음 찾아야 할 코스가 사라봉이어서 무작정 사라봉을 향해 골목길을 따라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느 블로그에선가 봤던 제주국제부두 위쪽 1백년도 넘은 산지등대로 길이 이어지나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등대를 가는 길목에 다다르니 올레리본이 달려 있었다.


올레리본이 보이니 일단 안심이 됐다.
사라봉 입구쪽으로 가는 동안 어느 아파트 입구에는 올레18코스라는 예쁜 안내판도 하나 보이고..

자주 다니던 사라봉도 이날 만은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사라봉은..

높이는 148.2m, 비고 98m, 둘레는 1,934m, 면적은 233,471㎡, 폭은 647m이며, 모양은 북서쪽으로 벌어진 말굽형이다.

제주 시내에 위치하는 대표적인 오름으로서, 바로 옆으로 이어져 있는 별도봉[화북봉 또는 베리 오름]과 더불어 오랫동안 제주 시민들의 공원으로 널리 이용돼 왔다.

제주시에서는 정상까지 산책로를 조성함과 동시에 다양한 체력단련 시설들을 갖추어 시민들의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특히, 사라봉 정상에는 망양정(望洋亭)이라는 정자를 세워 바다와 시내를 동시에 전망할 수 있도록 하였고, 또 조선시대 때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던 봉수대(烽燧臺)가 복원돼 있다.
사라봉은 낙조가 아름다워 영주10경의 하나인 사봉낙조를 볼수 있는 곳이다.

 

 
     
 

별도봉은..

화북악, 베리오름이라고도 한다. 쇄설성(碎屑性) 퇴적암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생 화산으로 화북1동의 동쪽 해안에 있다.

해발 136m의 낮은 산이지만 제주시 최고의 산책로로 평가받는 장수산책로(長壽散策路)가 둘레를 감싸고 있어 제주 시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북쪽 사면은 급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절벽인데, 이곳에 유명한 바위인 애기업은돌과 자살바위가 있다. 별도봉 정상에 오르면 제주항, 마을 전경, 아름다운 해안과 드넓은 앞바다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출처 두산백과)


사라봉은 제주시의 대표적인 주봉이지만 제주시민들은 콘크리트로 된 사라봉길보다 별도봉을 운동 삼아 많이 찾는 것 같다.
물론 사라봉도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만 사라봉을 거꾸로 오르는 일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사라봉으로 오르는 중간에는 아마도 50여년전 쯤에나 만들어졌을 중간 쉼터가 나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모습이 변함이 없다.
사라봉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길은 다시 구불구불 이어진 사라봉산책길을 따라 입구를 향해 내려가 별도봉 북쪽 길로 안내됐다.
이 별도봉 북쪽 산책길에 서면 굉활한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제주국제부두가 바로 눈 앞에 펼쳐진다.

별도봉 산책길은 그 길이 있는 것 만으로도 기막힌 존재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중간에 '애기 업은 돌'이라는 망부석이 하나 우뚝 서 있다.
북쪽길 정상이다.

 

 

 

 
 

이 아래쪽에는 그 옛날 ‘다시 한번 생각하시오’ 라는 글귀가 쓰여진 자살터가 있었다는 곳이다.
물론 지금은 그쪽으로 내려갈 수도 없게 막아버렸지만..

올레는 그 길을 따라 더 바다쪽 운동장 같은 잔디밭이 있는 호젓한 길로 안내했다.

호젓한 그 길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길은  바다 가까이 난 쪽으로 이어진다.

그 길 중간, 어귀에 놓인 평상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잠시 쉬는데..
바다에는 새 한 마리가 부지런히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이 잠시 보였다.


그런데 그 새는 물속으로 들어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궁금해서 유심히 바다를 살피는데 그 새가 물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시간을 재 보니 40초가 넘었다.


그 새는 실력이 부족했던 건지 쉴새없이 물속으로 들어갔지만 고기를 물고 나오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다만 새가 물속에서 그렇게 오래 숨을 참을 수 있는 것인 지가 참으로 경이로웠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새가 무사히 고기잡이를 하도록 마음으로 격려해 주고 일어섰다.

 
 
   
그곳에서 바로 지난 곳에 돌담이 무수히 널려있는 지역이 나타났다.
그 돌담을 사진으로 남기면서 나오는데 4.3유적터라는 표지가 나타났다.

제주 곳곳에 남아있는 잃어버린 마을터 중 하나였다.

 

 

화북1동 곤을마을터..

잃어버린마을 화북1동 비석거리 서쪽 곤을마을터는 화북천의 하류는 비석거리 부근에서 둘로 갈라져 바다로 들어간다.(2007년에는 동쪽 지류를 막아 버렸다.)

마치 삼각주처럼 된 곳이 있었는데 이곳을 '가운뎃곤을'이라 하고, 내의 서쪽을 '안곤을'이라 하였으며, 내의 동쪽은 '동곤을' 또는 '밧곤을'이라 하였다.

1948년 이전에는 안곤을 22가구, 가운뎃곤을 17가구, 밧곤을 28가구 이렇게 세 마을 합하여 약 75∼6호 정도가 살았던 곳이다.

4·3 이후 잃어 버린 마을은 모두 중산간 마을인데 비하여 곤을동만은 해안마을임에도 토벌대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복구되지 않아 '잃어 버린 마을'이 되었다.

 

군인토벌대 1개 소대(42명)는 1949년 1월 4일(음력 1948년 12월 6일) 오후 3∼4시경 곤을동을 포위하였다. 그리고는 서서히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각각 집에 들어가서 마을 사람들을 무조건 나오라고 했다. 이들을 바닷가에 데리고 가서 10여명을 총살하였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불을 붙여 안곤을과 가운뎃곤을을 모두 태웠다. 당시 집에는 석유병을 기둥에다 걸어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 석유를 촐(목초)이나 조짚, 보릿낭에 뿌려서 불을 붙이고 집을 불태우니 마침 사나운 북서풍에 삽시간에 다 타버린 것이다.

일부(12명)는 '화북국민학교'에 가두었다가 다음날(1월 5일) '연디밋'에 데려가서 총살했다. 그리고 곤을동 출입을 통제하고 동곤을도 불태웠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을은 없어져 버렸고,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았다.

그러면 왜 바닷가 마을인 곤을동이 군인들의 토벌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화북동 '남문' 주변 도로에서 군용차가 무장대의 습격을 당해 군인들이 죽었는데 그 중 살아남은 한 사람이 보니까 무장대 한 사람이 곤을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인들은 곤을동을 '폭도마을'로 규정하고 보복살인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무장대는 곤을동 사람도 아니고 곤을동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별도봉으로 숨어 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163∼210쪽에서 발췌)

2009년 마을터 잡초를 깨끗이 제거하니 말방아돌이 고스란히 나타났고, 집터의 벽과 굴묵 어귀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말방아가 있는 곳에서 동남쪽 가까운 곳에는 작은 샘도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연못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돌이 쌓여 있다. 마을길도 그대로 남아 있다.('고영철의 역사교실'에서 내용 발췌)


별도봉을 그렇게 많이 다녔어도 그런 곳이 그곳에 숨어 있었다니..

 

 
   

이제 길은 아름다운 용암돌들을 기계로 부숴서 볼품없이 만들어버린 아쉽고 슬픈 계곡을 지나 화북동으로 들어선다.

제주시 중앙지점에서는 가장 먼 제주시의 끝마을이다.
예전에는 걸어서 다녀도 힘들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에 있는 마을.
새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동안 평화로운 바다가 이어진다.

화북포구는 산지포와 함께 육지와 제주를 잇는 해상루트였다.

 

화북포는..


화북포는 건입동 산지항이 축조되기 전에는 화북포구는 전남 강진과 영암, 해남 등과 제주를 잇는 중요한 관문이기도 했다.

이 포구를 통해 쌀과 소금 등 생활필수품이 들어왔으며, 관리들과 유배인도 들어왔다. 1641년 8월 5일부터 8월 19일까지 광해군의 시체를 모신 곳이기도 하다.(“화북포구에서 제주성(城)안까지 옛 길을 걷다” 안내 자료)

화북포구가 유배인을 제주목에 인계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곳으로 들어온 유배인이 많다. 서재 임징하,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 유배인들도 이 포구로 들어왔다.


이처럼 화북포구는 제주를 오가는 이들에게 많은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애환이 서린 포구였으며 역사의 현장이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배비장전(裵卑將傳)’의 도입부인 정비장(鄭卑將)과 제주기생 애랑이 이별의 정회를 나누던 문학의 현장이기도 하다.

포구 서쪽에는 바다 용왕신을 모시는 해신사(海神祠)가 있는데 매년 정월 보름과 선박이 출항할 때면 제를 올려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곳이다.(잊혀져가는 문화유적)


이런 역사적 기록과 사연이 많이 남아 있는 길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갔다.
가다 보니 긴 환해장성이 나타났다.

 

 
 

해안경계와 함께 봉수대 역할을 했다는 별도연대라는 설명이 붙은 곳을 지나는데 또 올레리본이 보이지 않았다.

해안으로 나가 환해장성을 보고 나오는데 한 올레꾼이 자신도 올레리본을 찾지 못하겠다며 헤매고 있었다.
둘이 함께 전봇대 뒤에 숨어있는 리본을 다시 찾아 길을 따라갔다.

이제 올레길은 화북과 삼양을 잇는 아주 예쁜 들길을 따라가도록 안내한다.

삼양해수욕장에 들어서기 전 바다를 바라보니 해안가에 재갈매기떼 1백여마리가 가득 앉아 있었다.

그 새들은 감시조가 있는 듯 새들이 모여 있는 이쪽 끝과 저쪽 끝에 큰 새들이 앞쪽을 바라보며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사면경계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 바로 옆 마을 입구에는 새각시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자가 놓여 있었다.
여자의 몸매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바로 그 위로 정자를 놓아버려 예쁜(?) 그 물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이곳에 이르니 9.5km가 남았다는 표시가 있었다.
거의 반 정도는 걸은 셈일까..

이제 삼양해수욕장이다.

여름철 뜨거워진 검은 모래에 몸을 덮고 있으면 신경통에 좋다 하여 어르신들이 즐겨 찾는 곳.

 

 

 

하지만 검은 모래는 패여져 노란색 모래가 드러나고 있었고 모래밭에 모래가 날리지 않도록 씌워둔 덮게 또한 있으나마나였다.
여름철이라면 모르겠으나 푸석거리는 모래밭이 걷기에 영 불편하기만 했다.

이 길을 따라 밖으로 나와 조금 더 걸으니 해수욕장 동쪽 끝에 만들어진 정자에 중간스탬프 포스트가 놓여 있었다.

중간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12시57분이었다.

이곳에서 아까 화북에서 올레리본을 함께 찾았던 아저씨와 다시 만났다.


"제주에 사시냐"고 물으니 “2년전부터 내려와 올레를 모두 걷고 다시 걷고 있는 중”이라며 “2년전만 해도 올레 안내가 잘 안돼 있어 힘들었는데 이번에 걸어보니 정비가 잘 돼 있는 것 같다”며 올레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2년간 전세로 집을 빌려 제주에 살고 있다"는 그는  "2년후에는 제주도에 들어와 살 것인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일어나 떠났고 나는 잠시 더 쉬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길은 원당봉길로 안내한다.

 

 

원당봉은..

원당봉은 원나라 때 이 오름 중턱에 원나라의 당인 원당(元堂)이 있어서 원당봉(오름), 조선시대 때 원당봉수가 세워진 데서 망오름, 삼양동에 있어서 삼양봉, 3개의 능선에 7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어 원당칠봉(일명 삼첩칠봉)이라고도 한다.

원당봉은 주봉(큰원당오름)을 중심으로 북쪽에 망오름, 망오름 동쪽에 도산오름, 서쪽에 앞오름, 앞오름 남서쪽에 펜안오름 그리고 주봉과 망오름 사이에 나부기(동서로 나누어져 있어 동나부기, 서나부기라 함)로 구성되어 있다.

주봉의 원형굼부리는 말굽형으로 북쪽이 트였다. 문강사가 세워진 분화구는 예전에는 논밭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이곳은 금장지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에 금장지로 정해져 있어서 무덤을 만들지 않는데, 어느 해에는 삼양, 화북, 도련, 신촌 일대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금장지에 무덤이 있는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몰래 봉분을 만들지 않고 깊이 묻은 무덤이 발견되어 이를 이장하도록 하니 금새 비가 내려 해갈되었다고 한다.(고영철 역사기행 발췌)

 

 
 
 
 
 
 
 
 

 (내용이 많아 2번에서 계속 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