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최초 상수도..서호동 서호수도기념비(치수비)
상태바
[향토문화]최초 상수도..서호동 서호수도기념비(치수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3.22 0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사는 서호리 출신 6,000円, 호근리 출신 4,500円 기부

 

서호동 서호수도기념비(치수비)

 


위치 ; 서귀포시 서호동 811-1번지. 마을 안 길 담옆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비석(기념비)

 

 

 

비석의 크기는 높이 68cn, 너비 34cm, 폭 15.5cm 정도이다.

비석에는 「西好水道紀念碑」라고 새겨져 있다. 그 좌측면에는 [本里卽古所稱好近磊里 而及공녀백년의 여의승분 癸卯分界 名以西好수 命 更]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리고 우측면에는 [昭和十五年(1940) 七月 日] 글자가 있다.

그 뒷면에는 [료수도광륭]이라는 글자가 있다.

서호리는 전도에서 제일 먼저 수도를 시설하였다. 이 마을이 일제시대인 1927년에 벌써 상수도를 설치하였음을 보여 주는 비석이다.


당시 서호리는 생수나는 곳이 없어 리민들이 원거리에 있는 ‘통물’(물이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잘 썩지 않는 나무로 통을 만들어 박아 놓았다 해서 붙은 이름)을 식수원으로 사용했으나 마을에서 거리가 멀어 물허벅으로 운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6년 당시 구장인 김익규씨와 허은씨를 중심으로 마을 유지들이 오사카에 거주하던 마을 출신 재일동포들과 수도시설을 하기로 결의했다.


수원지 조사를 거쳐 각시바위(鶴秀岩) 동쪽 절곡지물을 수원으로 결정하고 인접 마을인 호근리와 공동으로 수도시설을 하기로 했으나 급수량이 적어 경비만 손해보게 된다며 호근리에서 포기하자 서호리 단독으로 시설을 하게 되었다.(호근리는 다음해 5월에 수도시설을 했다.)


당초에는 대정읍 신평리에서 만든 옹기토관으로 수도관을 매설할 계획이었으나 파손 우려가 높아 철관으로 변경, 수도기성회를 조직하고 마을 출신 재일동포 5000원, 마을 주민 4670원 등 9690원을 모금해 1927년 1월 24일 착공, 마을 주민들이 모두 동원되어 서귀포항에서 절곱지까지 약 6㎞의 거리를 인력으로 철관을 운반하고 정과 해머로 암반지대를 파서 관을 매립하여 7월 7일 완공하였다.

절곱지물에서 마을에 이르는 수도관은 1900간 3454m에 이르렀고, 마을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공동수도를 설치하여 물을 공급하였다. 1934년 2곳에 공동수도가 추가 설치되었고, 1935년 4월에는 수도조합에서 104원을 들여 2차 수도시설공사를 해서 서호간이학교 운동장과 숙직실에도 수도를 시설했다.

물사정이 좋지 않았던 ‘섯동네’도 주민들이 336원을 모금하여 수도를 설립했다. 마을 사람들의 물 사용료는 무료였다. 비석은 이를 기념하여 1940년에 세운 것이다.(마을홈피, 제민일보 2004년 10월 18일)


1938년 일본중앙공업시험소가 발행한 『제주도수원조사개보』에는 서호동의 수도와 관련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제주의 물 용천수』 217~218쪽)


"호근리․서호리 간이수도 및 토평리․하효리․신효리 간이수도 ; 이들 부락은 원래 음료수 사정이 좋지 않은 부락이었지만 주민의 노력에 의해 현재는 간이수도를 설치, 종래 원거리 물 수송에 필요했던 노동력을 산업 방면으로 전환하였고, 더욱이 전염병 등에 의해 손실되던 비용이 적어져 일반 재정도 양호하게 되었다."


주민들의 시각에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시각에서 기술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 발행된 위 자료에는 일본에 사는 서호리 출신 6,000円, 호근리 출신이 4,500円을 기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