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중문동 치수비..채구석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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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중문동 치수비..채구석기적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3.2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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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제주판관 채구석이 백성 위해 재산 내놓아'


중문동 채구석기적비(蔡龜錫紀蹟碑)(치수비)

 

채구석기적비 蔡龜錫紀蹟碑
위치 ; 중문동 천제연 입구
시대 ; 조선시대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천주교란으로 널리 알려졌던 대정군수 채구석의 기념비인데 이 비는 천주교란과는 무관한 것이다.

비의 크기는 관석과 대석을 합하여 180cm이다. 비 전면에 "通訓大夫大靜郡守蔡龜錫紀蹟碑"(통훈대부대정군수채구석기적비)라 새기고 이면에 비기(碑記)와 함께 비 건립에 관계한 사람과 연대를 기록하고 있다.

비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대정현 천제연폭포는 중문천이 흘러 靈沼(영소)를 이루었다. (중략) 누구나 이 곳을 探勝(탐승)하는 사람은 嘆美(탄미)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물을 당겨서 민생을 이롭게 한 사람은 없었다. 채구석이 이 곳을 한 번 보고 난 후 玩賞(완상)에만 그치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관개에 이용된다면 만인을 살릴 수가 있는데 그 방도가 없겠는가를 궁리했다. 비록 물 있는 곳이 낭떠러지가 되어 물 끌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지세를 잘 이용하여 바위를 뚫고 한 줄기 물길을 열어 놓았다.

이 물이 성천봉 아래까지 2-3리 끌어당겨 5만여평의 땅을 水田(수전)으로 개간하였다.(하략)"
고 되어 있다.(제주의 문화재 330쪽)

고종31년갑오(1894, 광서20)9월19일 승정원일기에는 "전 현감 송두옥(宋斗玉)은 미(米) 100석을 스스로 준비하였고, 본주의 판관 채귀석(蔡龜錫)은 봉미(俸米) 60석은 출연하고 전미 70석은 스스로 준비하였습니다.

실질적인 시혜와 큰 업적이 되기에 일체 거론하였습니다. (중략) 이러한 때에 자원하여 바쳐 진휼에 보태고 의로운 마음으로 곡식을 출연한 것은 더욱 가상한 일이니, 전 현감 송두옥은 가자(加資)하고, 본주의 판관 채귀석은 승서(陞敍)의 은전(恩典)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1894년 제주판관 직에 있던 채구석이 백성을 위하여 재산을 내놓았음을 알 수 있다.
관개시설 개척 과정은 성천답수로 참조
《수정보완 1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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