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백작약 피는..하원동 傳탐라왕자묘(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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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백작약 피는..하원동 傳탐라왕자묘(추정)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3.30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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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앞이 상당히 넓은 것, 전설 아닌 실제 왕자의 무덤 확신


하원동 傳탐라왕자묘(추정)

◆ 傳왕자묘석상(하원동).


◆ 하원동_왕자묘_2호분1


문화재 지정사항 ; 제주도 기념물 제54호(2000년 6월 21일)
위치 ; 서귀포시 하원동 21번지. 속칭 여가밭. 하원동 법화사 앞에서 동쪽으로 900m 지점인 폭낭모르에서 시멘트포장된 농로를 따라 몰뜬내(도순천)를 건너서 1500m 올라간 곳에서 동쪽을 보면 비닐하우스 있는 과수원이 있는데 그 과수원 북쪽 동산에 있다. 2002년 묘보다 위쪽으로 진입로가 새로 만들어져 접근이 쉬워졌다.
시대 ; 조선시대
위 사진은 3호, 아래 사진은 1호임

 

속칭 왕자묘(王子墓)로 불리는 이곳 하원동 분묘군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95년 경에 답사했을 때는 봉분 두 기가 모두 도굴 당하여 깊이 2m 정도로 파져 있었다.

1980년대에만 해도 봉분이 멀리서도 뚜렷이 보일 정도였고 배롱나무도 있었다고 하는데, 봉분 바로 옆에까지 잡목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았었다.

문관석 하나가 몸통만 남은 채 쓰러져 있었는데 석질로 보아 제주돌이 아니고 육지에서 만들어 들여 온 것 같다.

상석은 보이지 않으나 다듬은 돌로 제절을 만들어 설치하였고 봉분 앞이 상당히 넓은 것을 보면 단순한 전설만이 아니라 실제로 왕자의 무덤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직사각형 모양의 2평 정도 되는 무덤이 위아래로 나란히 셋이 있다.(1호분과 2호분 사이, 2호분과 3호분 사이에 후대에 조성된 무덤이 각각 1기씩 있다)

직사각형의 무덤가에는 정교하게 돌을 다듬어 세웠으며 풍파에 파손되어 8cm 정도 남아 있다.

옛 문헌에 대정현의 동쪽 40리 궁산의 두 내 사이에 왕자묘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 무덤을 가리키고 있지 않나 추측된다.(중문중학교, 향토지. 1986. 53쪽)


봉분의 크기는 둘 다 비슷한데 도굴된 밑을 보니 앞 봉분에는 숯을 넣었었고 뒷 봉분에는 숯이 발견되지 않는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렵도록 비슷한 무덤을 여러 개 만들었던 예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중 하나는 헛무덤(虛墓)일 가능성도 있다.

광무3년(1899) 읍지에 의하면 '대정현 동쪽 40리 지점(중문면) 궁산(弓山) 두 하천 사이에 왕자묘 3기가 있는데 지금도 섬돌이 남아 있다. 양쪽 구석에는 백작약이 심어져 있다.

가래촌(加來村, 강정리)에는 궁궐 터가 있는데 초석들이 남아 있어서 아마도 탁라왕이 도읍하였던 곳이 아닌가 한다. 속설에 산방을 이도(二都)로 삼았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이원조 목사(1842∼1845년 재임)의 耽羅誌草本 大靜縣 古墳條(탐라지초본 대정현 고분조)에도 나와 있다.

고려 우왕8년(1382) 7월에 명태조가 운남을 정벌하여 양왕(梁王)의 가족 백백태자(伯伯太子)와 그 아들 육십노(六十奴)를 제주에 안치하고, 우왕 14년(1388) 9월에는 명태조가 북벌할 때 귀순한 달달친왕(達達親王) 등 80여명을 제주에 안치하여 살게 하였다.

공양왕 4년(1392) 3월에는 양왕의 손자 애안첩목아(愛顔帖木兒) 등 4명을 제주에 안치하여 백백태자 등과 함께 살게 하였다. 이들이 모두 제주에서 살다 죽고 묻힌 묘라고 한다.(교육박물관 시행 향토문화기행 자료. 1998년)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백백태자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조 4년(1395) 5월 8일 ; '백백태자에게 쌀과 콩 4백곡(斛)과 저마포(紵麻布, 모시) 30필을, 양왕 손자에게는 쌀과 콩 백곡과 저마포 10장(匠)을 하사하였다.'


정종 2년(1400) 9월 16일 ; '제주의 백백태자가 환자(宦子)를 보내어 말 3필과 금가락지를 바쳤다.'
태종 4년(1404) 10월 4일 ; '백백태자가 제주에서 죽었다.'


세종 26년(1444) 3월 3일 ; '병조에 전지하기를 「백백태자의 처가 연로한데 빈궁하여 살아가는 것이 불쌍하다. 제주로 하여금 매년 의복과 양식과 혜양지물(惠養之物, 혜택을 베풀어 노약자를 잘 보살펴 기를 수 있는 품목의 물건)을 공급하여 특별히 존휼을 더하라. 또 사위 임울에게는 군역을 시키지 말고 오로지 봉양만을 맡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보고서는 제주세력가의 무덤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남평문씨 남제공파의 왕자직 역임자인 文昌祐, 文昌裕, 文公濟, 文臣輔, 文忠傑, 文忠甫, 文忠世, 文承瑞 중 누구일 것이라고 한다.

그 근거는 이 분묘군을 최근 50여년전까지 제주고씨 집안에서 관리해온 것과 조선 중기의 文忠基亂(소덕유 길운절의 역모사건. 문충기 등 23명이 서울로 압송되었고 문충기 등 11명이 사형당한 사건)을 연결지은 가정이다.

조선 중기 제주도내 유력가인 문씨 집안이 역모사건에 휘말려 몰락하게 되자 문충걸의 사위인 고봉례(마지막 星主)의 후손이 묘를 관리하게 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제주 하원동 분묘군 126쪽)

제주시 화북동 능동산의 고봉례 묘 추정 분묘도 이 왕자묘와 형태가 같으나 돌이 덜 다듬어진 게 다르다.
그러나 성주인 고봉례의 묘에는 석상이 없는데 그보다 낮은 직위인 왕자의 묘에 제주에서 보기 드문 형태의 석상을 설치했다는 것은 이해가 쉽지 않다.

원래 이 무덤 앞에는 2기의 석상이 있었다. 하나는 얼굴 부분이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얼굴 부분이 없어졌다.

얼굴이 있는 석상(키 105cm, 넓이 37cm, 두께 26cm, 홀 50cm)은 "비교적 온전한 한쪽 문인석상은 누가 가져갈 요량으로 제 자리를 벗어나 굴러다니던 것을 만농선생과 이영배 관장이 어렵게 발견하고 남제주군 문화공보실장에 위탁하고 다시 옮겨져 제주민속박물관에 이관 보존하고 있다." 얼굴이 없는 석상(키 60cm) 은 현장에 남아 있다.


傳왕자묘 석상의 얼굴 부분은 매우 독특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눈은 크지만 도드라짐이 덜 하고, 코 또한 높지도 않고 작은 편이다.

이 석상은 조각의 심도(深度)가 낮은 편인데 두꺼운 돌을 깎으며 코와 눈을 강조하며 높인 것이 아니라, 약간 둥그스름한 돌 자체에서 눈과 코를 파들어 가면서 표현했기 때문에 눈과 코의 볼륨이 약해진 것이다.

특히 코는 코 높이나 얼굴 높이가 수평이 되는데 코 양옆만 파서 강조한 것 때문이다. 눈을 처리한 조형적 기법은 '좇아 파기 방법(循石造型)'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단단한 돌이나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두드려서 표현하고 있다.

이 순석조형(循石造型) 방법은 큰 석재를 다룰 수 있는 조각기술이 부족하고, 석재 공구가 미흡할 때 쓰이는 방법이다. 이 순석조형(循石造型) 방법은 진한(秦漢) 시대에 유래하고 기술력이 부족할 때 많이 나타난다. 손을 몸에 붙이는 자세 또한 조각기술의 한계 때문이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쇠가 나지 않아 돌을 다루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조각술이 자유롭게 발달할 수 없었고, 선(線) 위주의 단순한 조형성, 크기도 작은 석상들이 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목의 단령(團領)이나 넓고 긴 소매를 선묘 위주로 처리하고 있다. 옥을 끼워 만든 대(帶)를 허리에 찬 것으로 보아 문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에 비해서 작은 손, 긴 홀을 든 것은 어색하지만 석공이 나름대로 엄숙한 영혼의 시종(侍從)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마음은 잃지 않고 있다.


석상의 재료는 누런색과 회색이 비치는 '영실조면암'으로 추정된다. 제주에는 서호 각시바위조면암, 돈내코조면암, 산방산조면암, 백록담조면암, 영실조면암 등 다양한 조면암이 분포돼 있다.

이런 토산재(土産材)는 석상의 풍토성을 규정하지만, 傳왕자묘 석상만큼은 제주다운 석상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특이한 사실이다.


이 석상이 제주 조면암으로 만들었지만 중국의 소수민족풍의 석상으로 보이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제주에 유형 온 중국 사람들의 솜씨가 아닐까.(제민일보 2011년 4월 16일)


이들 분묘는 1910년경부터 여러 차례 도굴되었기 때문에 유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으나 여기서 발굴된 유물로는 자기 조각, 소옥(小玉), 혼유석(魂遊石), 석재 향로, 문인석 등이다.

1호 분묘는 점판암 판석을 받침돌로 쓰고 현무암 판석을 세로로 맞추어 곽을 만들었는데 가로 300cm, 세로 430cm, 높이 100cm이다.


2호분은 점판암 할석을 7-8단 수평쌓기로 곽을 만들었는데 규격은 1호분과 같다.
3호분은 가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현무암 판석을 세로로 맞추어 곽을 만들었는데 가로 310cm, 세로 450cm, 높이는 65cm이다.

내부층위는 세 분묘 모두 위로부터 (1)표토 (2)흑갈색부식토 (3)황갈색점토 (4)흑갈색부식토 (5)황갈색점토 (6)목탄층 (7)흑갈색부식토 (8)황갈색점토 (9)흑갈색부식토 (10)황갈색점토 (11)목탄층 (12)흑갈색부식토 (13)황갈색점토 (14)목탄층으로 번갈아 다져 넣었음이 밝혀졌다.(현장의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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