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수량 풍부..하원동 법화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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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수량 풍부..하원동 법화사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3.3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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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사 호숫가에 물화(物華)가 그윽하니/대나무 소나무 휘둘러있어 혼자 스스로 유유하다'


하원동 법화사 터

하원동 법화사 터 (法華寺址)
문화재 지정사항 ; 지방기념물 제13호
위치 ;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일대
시대 ; 고려

▲ 하원동_법화사구등루

 

▲ 하원동_법화사대웅전(0902)전경

본도 불교의 유래를 더듬어 본다면 제주는 백제와 밀접한 교류를 하고 있었고 백제는 동진과 교류하고 있었으므로 동진의 불교 문화가 백제를 거쳐 제주에 유입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전파된 것은 고려 초기로 본다.

그 후 고려말 원종 14년(1273) 4월에 본도에서 항거하던 삼별초를 여몽연합군이 평정함에 동년 윤6월에 몽고는 본도에 다루하치 총관부를 설치하고 南宋과 倭의 요충으로 보고 동방 침략의 근거지로 삼은 후부터 본도는 元에 직속되었고, 몽고인의 왕래가 많아져 元의 불교와 神敎가 들어와 제주에 사찰과 신당이 왕성해졌다. 이로 인하여 한때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까지 있었던 것이다.

사찰 앞으로는 구산봉(해발 150m)이 있고, 동편에 강정천, 서편으로 예례천이 흐른다. 대웅전 뒷편과 동편에 두 개의 용천수가 있는데, 서쪽의 용천수는 과거 하원동 주민의 식수로 이용되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했다.

사찰이 자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용천수 때문으로 지형이 낮은 남쪽 앞으로 흐르면서 자연 늪지를 만들었고, 이를 이용해 논농사도 가능케 해주었으며, 주변 야산은 밀감과수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법화사가 통일신라 문성왕1년(839) 장보고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를 고증할 직접적인 사료는 없다.


법화사에 관련된 사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269∼1279년 중창. 이는 1992년 발굴 때 출토된 명문(銘文) 기와에 의하여 밝혀졌다. 기와에는 《至元六年己巳始重 十六年己卯畢》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보다 앞선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3세기초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至元六年己巳(1269)년은 원종10년이며, 至元十六年己卯(1279)년은 충렬왕5년이다.


법화사 중창이 시작된 1269년은 몽골이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기 4년 전이고, 마무리된 1279년은 직할령으로 삼고 5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중창시기와 발굴유물로 미루어, 중창은 고려왕실의 착안으로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추진과 마무리는 몽골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몽고의 여러 차례에 걸친 침입이 막바지에 이르러 결국 항복하고(1270년), 제주도로 옮겨온 삼별초마저 진압되고(1273년) 몽고가 탐라총관부를 설치(1273년)한 이후이다.


이 때의 중창 주체에 대해서 이영권은 ①몽골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 ②발굴된 유물 중에 구름봉황무늬 기와와 구름용무늬 기와가 몽골왕국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다는 점을 들어 몽골제국에 의해 수행된 것이며 이는 남송과 일본의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 건설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제주역사기행 93∼96쪽)
1406년 법화사에 봉안된 금동 미타삼존여래상 명나라가 가져감. 다음은 태종실록 중 법화사와 관련된 내용이다.

(태종)6년(서기1406) 4월 경진 (20일) ⇒ 임금이 태평관에 이르러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황엄(黃儼)은 취한 것을 핑계대어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한첩목아(韓帖木兒)가 말하기를 '제주의 법화사에 있는 미타삼존은 원나라 때 양공(良工)이 만든 것입니다. 저희들이 곧바로 가서 취(取)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정말 마땅하다. 다만 부처님의 귀에 물이 들어갈까 두렵다.' 하였더니 한첩목아 등이 크게 웃었다.(上至館設宴。 酒酣, 儼辭以醉, 先入室。 帖木兒曰: “濟州法華寺彌陀三尊, 元朝時良工所鑄也。 某等當徑往取之。” 上戲曰: “固當, 但恐水入耳。” 帖木兒等皆大笑。)

황엄 등이 친히 제주에 가서 동불상을 맞이하려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황제가 황엄 등으로 하여금 탐라의 형세를 보게 함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걱정하여 군신과 의논하고 급히 김도생(金道生)과 사직(司直) 박모(朴謀)를 선차(宣差 ; 선전관으로 임명함)하여 제주에 급히 가서 법화사의 동불상을 가지고 오게 하였다. 대개 말하기를 만약 불상이 먼저 나주에 이르면 황엄 등이 제주에 들어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6월 을유(27일) ⇒ 박모를 호군(護軍)으로 삼고 김도생을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으로 삼았다. 박모 등은 서울을 떠나 제주에 이르러 동불 3구를 싣고 해남현에 돌아와 배를 대었는데 무릇 17일이 걸렸다. 그러므로 그 빠른 것을 상 준 것이었다.


7월 계묘(16일) ⇒ 황엄·한첩목아·양녕·기원이 나주에서 돌아왔다. 처음에 황엄 등이 돌아와 용구현에 이르렀다. 임금이 불편하여 출영하지 못하고 이조판서 이직(李稷)을 보내어 연고를 알렸다. …중략… '황엄 등은 전하께 동불을 맞이할 때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하게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황엄이 나를 욕보임이 어찌 여기에 이르는가? 황엄은 탐람하고 간험하다. 또 불상을 수송하는 연고로써 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그 죄 또한 중하다. 내 이를 천자에게 상주하고자 한다.' 하였다. …중략… 황엄 등이 태평관에 이르자 백관이 예를 행하고자 하니 황엄은 임금이 나오지 않았다고 화를 내며 이에 말하기를 '지금 전하를 뵙지 못하였으니 예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의정부에서 대신 하마연을 베풀고자 하여도 또한 받지 않았다. 황엄 등이 동불상 3좌를 받들고 왔는데 감실(龕室) 15개에 불상·화광·연대·좌구를 나누어 담고 또 모란·작약·황규 등의 기아한 꽃을 감실에다 흙을 담아 실었다. 궤를 만들었는데 판자 1천장, 철 6백근, 마 7백근을 사용하였다. 그 불상과 화광의 감실이 셋인데 높이와 폭이 각각 7척쯤이며, 안에는 막이(隔)용으로 백지 2만8천장과 면화 2백근을 사용하였고, 짐꾼은 수천여인이었다. ……하략


7월 기유(22일) ⇒ 황엄 등이 동불 3좌를 받들고 경사(京師 ; 중국의 수도)로 돌아가니 임금이 반송정에서 전송하였다. 우군총제 조면을 보내어 경사로 따라가게 하고 예부에 자문(咨文 ;중국의 6부와 교섭하는 문서로서 조선의 국왕과 중국의 각부는 동등한 격식으로 왕복한다)을 청하여 동불을 보내는 뜻을 알리게 하였다.(법화사, 조선국과 명나라간의 외교적 쟁점을 야기시켰던 금동미타삼존불상에 관한 왕조실록의 일부. 1-6쪽)

법화사지는 서귀포시 하원동 우회도로 북쪽에 있는데 현재의 법화사 주위에 옛 법화사의 유적이 있다. 법화사는 13세기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元의 순제가 날로 세력이 강해지는 明의 주원장을 염려하여 만일의 경우 피난처로 탐라에 궁전을 지었는데 이 법화사지가 바로 그 궁전터라고 전해진다.

공민왕 16년 무렵 元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순제는 만일의 경우 피난처는 제주도뿐이라고 여겨 사전에 피난처 적격지를 조사하기 위해 몽고인 단장 1인과 중국인 부단장 1인을 파견한다. 이들은 직접 답사를 끝내고 돌아갔는데 그 중 부단장이었던 중국인은 '탐라지략'을 저술했다.

이 책은 제주도 통치 단계 등 당시의 제주 상황을 기록하고 있지만 서문만이 전해온다. 순제는 피난처로 타당하다는 보고 결과에 따라 제주에 궁전을 짓게 하는 한편 사신 고대비를 파견하여 제주에 황실의 금은보화를 옮기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말 조선초에 제주에 금은보화가 많았다는 것은 곧 몽고에서 들여온 것으로 나중에는 명나라에 공납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이송된다. 피난궁전 건설은 고려사에 의하면 중단되었다고 한다.

조선태종실록에 의하면 명나라 황제의 칙서에


"내가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 탐라에 가서 동불상(銅佛像) 몇 좌를 가져오도록 하였으니 같이 협력해서 이 일을 성사시켜 달라."


라고 되어 있고, 이 칙서를 가지고 온 사신이
"탐라 법화사의 아미타삼존불상은 원(元)의 훌륭한 공인(工人)이 만든 불상이므로 우리가 직접 가서 가지고 가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명(明)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사신을 보낼 만큼 법화사에 안치되었던 불상이 걸작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책에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주의 법화사 노비 280명과 수정사 노비 130명을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각각 30명씩만 가지게 하고 나머지는 전농사(典農司)에 속하게 했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법화사에 속한 사원전(寺院田) 등 사찰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며 탐라에서는 가장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에는 "...절터와 나한전 자리의 주춧돌과 섬돌을 보면 모두 크고 정밀하게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였으니 전성시기에는 굉장하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단지 초가암자 몇 간만이 있다. 그 서쪽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는데 절 앞 논에 물을 댄다..."라 기록되어 있어, 제주의 원나라 3대 사찰 중 원당사와 수정사의 기록은 남아있는 반면 법화사는 이미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 사찰은 1702년 목사 이형상의 불사훼철령에 의하여 제주도 전역의 많은 신당과 사찰이 소실될 때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관음사를 창건한 비구니 안봉려관의 도움으로 1914년 도월(道月)선사가 법화사를 다시 일으켰지만 4.3사건 때 완전히 소실되고, 한국전쟁기인 1951년 육군 제1 훈련소 제3숙영지로도 쓰여졌다.

1960년 경내 정리 작업중 당시 건물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지름 65cm나 되는 주춧돌 10개(전장 15cm, 가로 90cm, 세로 7cm)와 70여개의 축대들이 발견되어 이를 지방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1961년 복원되었으며, 현재의 대웅전 건물은 1988년 원래 법화사 대웅전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116-117쪽)


그러나 이 대웅전의 복원에 대해서 최완수 선생은 금당의 전호가 대웅전이 아니라 극락전이어야 하며 모셔진 불상은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야 옳다고 한다.(제주역사기행 96쪽)


대웅전 서쪽에서 다량의 주춧돌들이 발견되고 있다.
1994년 5월 17일에는 대포동 민가(대포동 2004번지 이성림 씨)에서 법화사 주초석(柱礎石)이 발견되어 1990년 5월 대포동 바닷가에서 발견된 주초석과 함께 구전되어 오던 대포리 절터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더해 주고 있다.(제민일보 1994년5월18일자)

그러나, 법화사 측에서는 원래 법화사가 원나라 순제가 피난궁을 지으려고 하기 훨씬 이전인 통일신라시대 문성왕1년(839)에 장보고가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장보고는 청해진과 중국 산동성 적산촌, 우리 동포들이 거주한 양자강 하류 그리고 제주에 법화사(법화원)라는 같은 이름의 절을 지은 것이다.

고려시대 충렬왕5년(서기1279)에는 충렬왕비(장목왕후)의 원찰(신분 높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지정하여 다니는 절)로 중창되었다. 이 때부터 국가가 지정하는 비보사원(裨補寺院)이 되어 국찰이 되었다. 그리고 왕은 공주(여기서 공주라 함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칸의 딸로서 충렬왕비 장목왕후를 말함)와 두 차례에 걸쳐 친히 법화사에 행차하였다.

법화사의 불상 반납을 요구한 명의 황제라고 하는 왕은 영락제(永樂帝)이며 영락제는 부모인 주원장 부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남경에 황실의 원찰 대보은사를 세우고 거기에 모실 부처님을 구하게 되는데 가장 원만하고 자비하신 부처님으로 제주 법화사의 아미타삼존여래가 회자되어 꼽히게 되어 반납 문제로 외교적 쟁점이 된 것이다.

그 사신은 조선에서 90여일을 머물다 금동미타삼존여래상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4328년4월16일, 법화사 주지 시몽스님, 법화사, 사적지 도지정 문화재 법화사 연혁 및 역사. 1-3쪽)

'법화사 호숫가에 물화(物華)가 그윽하니/대나무 소나무 휘둘러있어 혼자 스스로 유유하다'


고려시대 고승 혜일선사가 구품 연지에 피어있는 연꽃과 그 둘레에 갖가지 나무들로 장관을 연출했던 당시의 모습을 읊은 시구이다. (제주일보 2002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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